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울보다 다윗을 축복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은 그 이름대로 늘 ‘싸울’ 려고만 했으나 다윗은 모든 사람을 ‘다 윗’ 분으로 존경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사무엘하 1장에는 오랫동안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행한 모습이 나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전사한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며 슬피 울며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애가를 지어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기억하며 유다 족속에게도 그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이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는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늘 다윗을 상대하며 다윗만 죽이면 자신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윗은 늘 하나님을 상대하며 원수와 같았던 사울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종으로 인식하며 열린 마음으로 긍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로마 제국 전체를 복음을 전하는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로 만들기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디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 때부터 4천년전이 넘는 믿음의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성을 가진 곳이었지만 글로벌선교(Global Mission)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편협했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선민의식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적대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타성과 편협한 마인드를 가진 백성들로서는 하나님의 꿈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은 다양한 사회적, 인종적인 배경을 가졌지만 성령안에서 하나됨을 이루고 있었던 안디옥교회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북미주의 도시들마다 한인 1세대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더 나아가 교단내에서도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소식을 자주 듣게됩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이런 모습들을 놓고 사람들과 공동체가 모두 다 썩었거나 타락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의 토벽을 가지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홍목사의 ‘순간을 위해 평생을 투자하라’라는 책에 보면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요, 영성 운동가였던 헨리나우웬은 살아 있을때 평균 500명 이상의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에게 장애우 공동체 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방문해주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하프타임의 저자 밥 버포드는 헨리나우웬과의 만남에 대해서 “그는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흥미로운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고”고 말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는 누구와 만나든지 백퍼센트 그에게 집중하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처럼 대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열린 모습으로 자신의 전부를 준 것입니다.
전설적인 세일즈맨이었던 레스 기블린(Les Giblin)은 대인관계에 도가 튼 사람들은 인간을 ‘그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내 마음에 드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인관계에 형통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지은 토마스 아켐피스는“다른 사람들을 당신이 원하는대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말라. 당신조차도 당신이 원하는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해서는 선택할 수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반응은 우리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계 안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성급한 사람, 차분한 사람, 느긋한 사람입니다. 성급한 초침, 차분한 분침, 느긋한 시침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멋진 조화를 이루며 미래의 문을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급한 초침은 차분한 분침을 비판하지 않습는다. 또한 느긋한 시침은 성급한 초침을 비판하지 않습는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함께 더불어 공존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깊어가는 이민의 역사가운데 서로의 차이점들로 인한 갈등을 변화와 성숙의 해산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들로서 오해와 비판의 돌을 던지는 자들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주며 사랑을 꽃피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위기의식, 변화들은 역사와 시대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주신 새 가나안복지를 향하게 하는 비전(Vision)과 희망(Hope)의 씨앗들이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라고 말했습니다. 비전(Provision)에는 문제(Problem)가 내재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의 말씀(Promise)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미래의 가나안을 향한 중단없는 전진을 계속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비판의 고리가 난마처럼 얽혀있고 정죄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군끼리 서로 돌을 던져 상처를 주기보다는 사랑을 던지는 사람이 참으로 그리운 때입니다. 아군끼리의 전쟁, 주고 받는 상처 이제 그만 접어야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 연합과 일치, 갱신과 변화, 상생과 차세대 선교를 위해 한 마음을 모아야할 때입니다. 사회문화적, 정치적 사안들, 신학적인 견해차들이 전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일에는 사랑을”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평생의 신념처럼 그는 말년에 감리교단이 사라지는 것보다 본질적인 정신(Spirit)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소모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쟁보다는 결코 후회함이 없는 사랑의 길을 택하십시오.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의로움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히 없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실력에는 고개를 숙이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꿈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대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여리고성과 같은 장애물이 있다할지라도 결단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안일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성전에 들어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느헤미야와 같이 오늘도 새벽을 깨우며 꿈꿀 수 없어 무너져가는 가슴들속에 푸르고 푸른 하나님의 꿈이 솟아나도록 눈물과 사랑, 기도의 씨앗을 뿌립시다. 그 곳에 우리 시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눈길이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느니라(히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