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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독일 보름시의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예배당(Luther’ Reformation Celebration Church, worms, Germany) 정문에 “내주는 강한 성이여”라고 기록. — at Worms, Germnay.
*Photo taken by Rev. Jaewoong Chang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이제 2년후인 2017년 10월 31일이 되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 북부 비텐베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500주년이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종교개혁일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교권의 타락과 부패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된 중세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교회)개혁운동을 일으킨 날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에 면죄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면죄부 사건이란 카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모금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 1490-1545)라는 사람은 당시 이 면죄부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고 유명한 웅변가 테첼(Tetzel, Johann.1450-1519 )을 고용하여 그에게 신학박사의 학위를 주고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설교 아닌 웅변을 하게 하였고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속아서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을 목도한 마틴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개 조항을 만들어 성당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개신교(항거하는 자,Protestant) 즉 지금의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95개 조항은 라틴어로 씌여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학문적 토론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교황이 이것을 소상히 알게 되면 이 악폐들을 수정할 것이라는 기대감에게 씌여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곧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 다음해인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하게 됩니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르게 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그의 영주이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였던 막스밀리안은 곧 죽을 것 같았고 황제선출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기에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로서 스페인의 챨스나 프랑스의 프린시스가 후보로 나서는 것을 상당히 불편히 생각하면서 차라리 프리드리히가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총애하는 마틴 루터를 적극적으로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521년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면서 신성 로마제국의 새황제였던 챨스 5세는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기 위해 루터를 의회로 불러 자신의 책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루터는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받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3가지의 저서였습니다.‘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뜨렸습니다. 두 달후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에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고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령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게 됩니다.

결국 마틴 루터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 챨스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루터를 추방하게 되었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Wartburg)성으로 보내게 됩니다.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습니다.(김홍기,’세계 기독교의 역사이야기’)

결국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루터가 번역한 이 독일어 성서를 통해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  진정한 종교개혁이 출발하게 됩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교회개혁’이란 말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정도로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변질의 시작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 ‘종교적인 권위주의’로 계급화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주된 관심은 교황(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고 사람이 영광받아야 할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행위로 얻어지는 공로의 결과라는 변질된 구원관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종교개혁 즉 교회 개혁운동이 가져온 신학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구분이나 성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아울러 교리의 전통과 신조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열어가야 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는 하나님을 교회안에 가두어 두고 독점하며 세상속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구제와 선교의 사명을 포기한다면 교회 본연의 사명과 목적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부는 분배되어야지만 부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분배되지 않는 물질은 ‘소유의 본질’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중세말기 성직자의 타락가운데 나온 경구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Vita Clerici est evangeliuum laice)’이라고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북부 비텐베르그를 시작으로 스위스에서는 쮜리히시를 중심으로 쯔빙글리가,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칼빈이,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레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다시 맞이하며 자신의 명예와 권력, 기득권을 유지, 보존키 위해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지배적 소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예배와 교육, 구제와 선교를 위해 땀흘리는 창조적인 소수,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 크리스천 위클리-장재웅목사 초대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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