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기 기쁨의 대상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버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돈이 불어나 예금 통장에 차곡차곡 돈이 쌓여가는데 기쁨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주말이면 이곳 저곳 여행하며 살아가는 재미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집을 늘리고 치장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 좋은 옷 입고 멋 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물질로 인한 즐거움도 있지만 기쁨의 기준과 대상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예배 시간이 무엇보다 기다려지고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라는 말씀과 같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기쁨이 너무나 크기에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충성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4-6절에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와중에서도(시37:1-2)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을 복되게 하시고 형통케 하십니다.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세상속에서도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같이 정오의 빛과 같이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욥기서 22장 26절에도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과학자이지만 실제로 철학과 신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팡세’의 저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결정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빠져든 것은 1654년 하늘에서 내려온 음성을 듣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글을 써게 됩니다. 그 글은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 물질,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시편 본문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자들로 인해 불평과 시기하지말며 인생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며 지속적으로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37:1-3)”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기쁨되시니 그 명령을 준행하여 늘 충성하겠네 주야로 보호하시며 바른길 가게 하시니 의지하고 따라갈이 주 예수, 나의 생명 나의 기쁨 주 예수” 찬송가 93장의 가사처럼 이제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인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의 성실과 기쁨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