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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을때

이창동감독이 제작한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밀양(Secret Sunshine)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신애’라는 여인이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표적이 되어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는 슬픔과 번민속에 지내던 이 여인은 우연한 기회에 가까운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고 신앙의 세계에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목사님과 상의한 후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들을 죽인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고 하자 그는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이미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피해자인 이 여인은 큰 혼란과 충격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이후 내내 마음의 고통속에 방황하며 지내면서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교회의 교우들에게 분노와 보복의 감정을 갖고 대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나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이나 아들을 잃고 고통속에 지내온 이 여인에게 용서한번 빌지않고 잘못했다는 고백이나 사과 한마디없는 살인자의 태연한 모습때문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여러 상반된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기독교인들을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면서 피해자에게는 한마디 회개를 하지않는 말없는 살인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사랑과 관용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용서하지않고 보복의 충동속에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이중성을 빗대어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학장이었고 신학자였던 윤성범목사님의 일화가운데 그 분은 주기도문을 외울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에서는 늘 그냥  넘어가셨다고 합니다. 그 분의 일생에 용서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 인해 늘 마음속으로 괴로워했고 그것으로 인해 늘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마다 마음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용서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간적인 배신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누군가의 말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았을때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보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남들에게 섭섭한 말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게되면 마음속으로 분개하며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고자 하는 충동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때 그 중심부에는 늘 배신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배신한 사람이 나에게 있어 더욱 의미있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로부터 받은 상처는 더욱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몸과 마음이 무너져가면서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종말론적인 인생관의 부재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일까지만 산다면 오늘 용서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기에 오늘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 한번뿐인 유한한 인생임을 안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진정으로 삶속에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셨는데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챨스 스탠리 목사님이 쓰신 ‘용서(Forgiveness)’라는 책에 보면 사람들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어떤 사람이 인질로 잡혔을 때 범인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범인들은 돈을 요구할 수도 있고 무기나 포로의 석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사항의 초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면 인질을 되돌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이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무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는 것 대신에 그들에게 요구사항을 내걸고서는 사랑과 용납, 존경심, 도움, 친절,인내 그리고 상대방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억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네가 나에게 저지른 과오에 대해 보상할때까지는 너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속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조건적인 용서, 부분적인 용서, 임시적인 용서입니다. 조건적인 용서는 무엇을 하면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용서는 이것은 용서하지만 저것은 용서못한다는 것입니다. 임시적인 용서는 지금은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한 용서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왜?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셨기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백가지를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수천가지를 잘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모습의 우리를 완벽하게 용서해 주셨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3-14)”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해 3번 용서하면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베드로가 주님께 “용서를 하되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됩니까?”라고 물었을때 “일흔번(70)씩 일곱(7) 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용서의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끊없이 용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7)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깊은 계시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과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을때 그 분은 우리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성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용서하지도 않으셨고 용서한 이후에는 그 일을 기억하지도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때에도 일곱(7)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중의 한 말씀이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두 강도중의 오른쪽의 강도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왜 강도에게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게 되었을까? 바로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아버지의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무죄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이 이 강도를 죽음직전에 변화시키게 된 것입니다.

용서는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용서할 수 없을때 우리의 죄와 허물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인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단 ‘한 분의 용서’로 모든 사람들이 소망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실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습니다. 원수를 용서할 수 없고 보복의 감정이 일어날때에도 하나님께 원수갚는 것을 책임지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고 주님의 도우심을 입게될 것입니다.(롬12:14-21)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인 ‘소테르(Soteriology, σωτὴρ)’라는 말은 구원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즉 상처가 치유받고 영광이 되게 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며 스스로의 분노와 원한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픔많은 세상속에서도 주님께 용서함을 받은 흔적(Stigma)을 가지고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강물이 흘러 축복의 열매가 곳곳에 맺히고 진정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내가 너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었다.  너도 가서 화해의 사명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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