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크게 걸리는 부분중의 하나는 ‘의(義)’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 중의 가장 큰 문제는 특별히 우리의 자아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스트리아(현재 체코영역)출신인 정신분석학자요 심리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Sigismund Schlomo Freud)는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드는 리비도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적 상태 즉 본능을 말하고 에고는 자신의 자아 즉 본 모습을 말합니다. 슈퍼에고는 자신의 실제모습보다 더 크게 늘려놓은 자신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드의 힘과 슈퍼에고의 힘이 균형을 이룰 때 에고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크게 늘려놓은 모습에 의해서 컨트롤(control)당할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실제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의 나보다도 너무 크게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에는 빠른데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한계에 빠지게 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과 같이 타인에게는 가을서리와 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유전과 보수의 안전틀(Boundary)을 정해놓고 가을서리와 같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인 400년기간동안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하시딤’이라는 경건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후예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란 ‘분리된’자라는 뜻으로 불경건한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려고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을 생활과 신앙의 최고규범으로 인정하며 613개 조항으로 되어있었던 유전법과 그 유전에 대한 해석(248개는 ‘하라’, 365개는 ‘하지말라’ 조항)에 대해 큰 권위를 부여하고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자들로서 예수님도 그들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신적이 있었습니다.(마5:20, 23:3)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비판하고 다른 유대인들에게 잘못되게 적용하려 했을때 예수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외경(1 Maccabees)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카비 반란이 한창이던때 하루는 시리아 군대가 공격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들은 철저히 지켜지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들은 결국 안식일에 일하지 말하는 규범을 따라 저항을 포기한채 고스란히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등장한 질문이 “과연 안식일 준수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동족의 보호를 위해 싸우는 것이 경건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이후 유대사회에 편만해있던 경건의 기준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였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본인은 경건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예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8)”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정신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지 안식일 자체의 제도에 대한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의 궁극적인 정신이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함을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미네소타 대학과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가르쳤던 폴 홀머(Paul L. Holmer)교수는 ‘성경에 대한(about the Bible)’삶과 ‘성경의(of the Bible)’삶이 구분되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전자는 성경에 대한 지식정도를 축적하는 ‘종교적인 삶’이지만 후자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 즉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경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동행하며 거룩한 성화를 이루어가는 ‘복음적인 삶’을 말합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도중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 라는 말씀을 하셔서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당황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황해하던 성도들을 향해서 그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기록된 문자 그 자체보다 성경 말씀의 주인공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우선순위를 뒤집으면 성경은 하나의 율법전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복음’이요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신앙’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앞에 서 있는 연약한 질그릇임을 하루빨리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복음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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