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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수상 Pator's Column

시냇물과 같은 사람

구약 역대상 19장에 보면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다윗은 이웃에 있는 암몬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려고 조문사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의 방백들은 하눈에게 진언하기를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하며 조문사절을 간첩으로 매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조문사절들을 결박하고 그들의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을 허벅지까지 잘라서 온갖 모멸감과 수치를 주어 돌려 보내게 되는 엄청난 일이 발생합니다. 이리하여 양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고 하눈은 암몬 병사들 외에 은 일천 달란트를 주고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마아가와 소바에서 병거 삼만 이천승, 마아가왕과 그 군대들을 사서 이스라엘을 침략해 옵니다. 사소한 오해가 전쟁으로 발전한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주류사회로부터 고립된 섬과 같이 같은 동포끼리 만나도 서로간에 쉽게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만날때마다 미리 전해들은 오해와 선입견으로 인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공동체 안에서 만나도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는지 어떤 신앙의 컬러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 결과 또 다른 오해와 불신을 낳기도 합니다.
사실 오해는 대부분 이해의 부족에서 생깁니다.오해는 이해의 부족이요 이해의 최대치는 관용입니다. ‘5-3=2, 2-2=4’ 어떤 오해(5해)가 있어도 생각을 세 번 고쳐먹으면(3을 빼면) 이해(2해)할 수 있고, 이해(2해)를 두 번만 할 수 있으면 감사(감4)할 수 있고, 사랑(4랑)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냐(think)에 따라서 이해하고 감사(thank)하며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Under-stand)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Philippians2:5)

성경중에서 이 짧은 구절은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진수를 잘 요약해서 소개하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규모는 작은 교회였지만 늘 사역가운데 사랑과 기쁨이 넘치고 바울의 선교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건강하고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 두 여성그룹의 대표자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빌4:2)’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간의 깊은 이해와 낮아짐의 자세를 통해 서로에게 관용할 것을 권면하며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리라(빌4:5)”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The Lord is near(Philippians4:5)

빌립보서(2:1-11)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진리는 우리들이 이웃의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용과 이해를 실천하도록 하는 화육적 영성의 삶을 살도록 도전을 줍니다. 사랑은 이해와 관용으로부터 출발하고 내 편이 아닌 상대편에서 보는 것이 사랑이고 그 이해의 깊이가 사랑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하는 삶, 가장 낮아짐의 극치를 나타나는 화육적 영성(Incarnational Spirituality)으로 이웃의 삶속으로 경계선을 뛰어넘어 들어가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화육적 영성은 섬김정신(Servantship), 청지기 정신(Stewardship), 목자정신(Shepherdship)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아울러 양을 결코 이용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목숨을 바쳐 양떼를 지키고 보호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 졸업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부터 그대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하나 알려주겠다. 하버드 졸업하느라고 수고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하버드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세상 속에 뛰어들어라. 세상 사람 대부분은 하버드 졸업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광야와 같이 거친 세상속에서 우리가 만나고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해와 관용으로 겸손히 낮아져 섬기는 모습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아지고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에 희망의 꽃들이 아름답게 싹트고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멀리 타국의 선교지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귀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들을 이해와 관용, 기도와 낮아짐의 자세로 섬기는 것 또한 ‘선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주하는 고집을 버리고 조용히 낮은 곳으로 흘러가 자신의 삶속에서 깊은 샘을 만드는 ‘시냇물 같은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교지는 가정과 직장이며 교회와 캠퍼스요, 이웃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시냇물 같은 사람              -소 천-

사람을 찾습니다 시냇물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하늘에서 시작되어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안주하는 고집을 버리고 시냇물 같이 흐르는 사람을 찾습니다
노래하는 산새같이 자유로운 시냇물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햇살의 오색 옷을 입고 아침의 사슴 같은 시냇물 마음이 너무나 좋습니다
어딜 가나 힘이 되고 무엇이나 하려하고 안 되는 일은 해보자고 하고 그 험한 일도 척척해나가는
땀만큼 열매를 찾고 정직을 힘으로 여기는 사람
힘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시냇물 같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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