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흥운동의 선각자 캐나다인 하디와
하루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선교사의 자녀들
양화진에는 우리나라 대부흥운동의 선각자인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A. 하디(Robert A. Hardie)의 가족묘지가 있다. 한국 명으로는 하리영(河鯉泳)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하디와 함께 대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미국인 저다인(J. L. Jerdine, 全約瑟) 선교사 가족 묘지도 함께 있다.
하디와 저다인 선교사는 우리나라 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로, 자녀들 모두 한국에서 낳았지만 단 하루만에 양화진에 묻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선교사들이다.
하디 선교사의 큰딸 매리(Marie)는 1893년 8월 9일 출생해 다음날 8월 10일 사망하였다. 작은 딸 마가렛(Margaret Joy)도 1903년 9월 1일 출생하여 얼마 살지 못하고 1909년 2월 10일 사망하여 양화진 묘지(가-8)의 언니 곁에 묻혔다.
저다인 선교사의 아들 주니어 저다인(Jerdine Jr.)도 1915년 11월 19일에 출생하여 단 하루밖에 살지 못했다고 알려져있다.(나-4) 또 한 사람 개성에서 하디의 뒤를 이은 부흥집회 주창자 크램(W. G. Cram, 奇義男) 선교사의 아들도 1903년 출생하여 2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양화진(나-2)에 묻혔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봉사활동을 하였으나 이 땅의 보건 위생 등 열악한 환경 때문에 사랑스런 자녀들을 잃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선교사들의 고마움마저 잊어버리고 있는 요즈음, 우리 1천만 기독교인들은 지난날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마음으로 지난날의 아픈 발자취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로버트 A. 하디(Hardie, Robert A., 河鯉泳, 1865~1949)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1865년 6월 11일 출생하여 1887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890년 9월 30일 교단(敎團)의 배경 없이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선교회 지원으로 우리 나라에 가족과 함께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에서 게일(J. S. Gale)과 함께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 미국 남감리선교회로 소속을 변경하였으며 1899년에는 개성에 남도병원을 설립하였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중국에서 휴양차 온 화이트(Mary C. White)선교사의 제안으로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개최하게 됐다. 그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그 동안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의 교만, 닫힌 마음, 신앙의 부족을 고백하면서 구원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회개에 가득 찬 고백은 모든 교인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어 죄를 자복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였다. 또한 그 자신도 성령 충만함으로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을 경험했다.
이 같은 부흥집회는 1904년 2월 개성으로 확대, 1904년 3월에는 서울 잣골교회에서도 부흥집회가 계속됐다. 결국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불이 집혀지는 발판으로 구축되었고,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 하디는 1909년부터 1922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장, 피어선 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신학 교육에도 힘썼다. 서울 제중원에서 에비슨과 의료 활동을 하고, ‘세브란스의전’에서 의사(1917~1918)로도 활동하였다. 1916년 선교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하고 조선예수교서회 총무(1921~1927)로서 문서 선교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1930년 기독신보의 사장으로 활동하고 ‘조선 농촌 구제책’이라는 저서도 출판하였다. 1935년 퇴직 후 귀국하였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1-30 (9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