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라비안 선교인가? 사람들은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때 윌리엄 캐리라는 이름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 선교를 떠나기 60년 전에 이미 수많은 모라비안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지로 떠났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으로 선교하러 떠나기 150년 전에 먼저 선교지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소속 영지였던 서인도 제도에 처음 모라비안 선교사가 나갔을 때 그곳에는 10만명의 노예들이 매해 팔려 와서 가련한 인생을 보내야 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서인도 땅에서 노예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 일으키자 백인 지주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그들의 헌신과 기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노예해방의 기틀까지 쌓은 사람들이 모라비안 선교회였다. 어떻게 모라비안 선교회가 세상의 역사를 고치는 선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모라비안 선교회는 선교회라고 말을 하지만 평범했던 하나의 교회였다. 우리와 동일했던 교회였지만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기에 선교회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모라바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던 때가 1700년대이다. 그들이 20년 동안 파송했던 선교사 숫자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지난 2백년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보다 더 많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선교는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 모라비안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라비안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선교였다.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선교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한 교회가 20년간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지난 200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보다 더 많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세계선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왜 적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종교개혁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세계선교를 모든 교회에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명은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루터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장로교 기틀을 세운 칼빈 같은 경우는 선교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브라질로 수십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칼빈을 따랐던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이미 하나님이 하셨으면 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세계선교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의 열두 제자들과 부름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세계선교를 위해 그들의 삶을 내던졌다. 순교자 ‘존 후스’ 왜 모라비안 교회라고 이름을 부르는가. 모라비안 교회를 이해하려면 한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존 후스’로 1373-1415년까지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종교개혁자이다. 후스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우리는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갈 수 있고, 성경만이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할 대상이라고 평신도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선포했다. 복음은 사제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고 증거했던 사람이다. 오늘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마치 ‘혁명’ 같은 말이었다. 그를 잡아 가둔 가톨릭교회는 ‘발언을 취소하고 평생 감옥에서 살든지, 아니면 타오르는 불 속에서 화형시키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시 가르치시지 않는 한 자신의 생각을 고칠 생각이 없었고 결국 1413년 타오르는 불덩이 속으로 들어가 화형의 이슬로 이 땅을 떠났던 순교자였다. 존 후스를 따랐던 많은 개혁가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가톨릭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던 소수의 무리였다. 그 소수의 무리들이 모라비안 교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사람, 세계사에도 이름이 잘 알려진 ‘진젠돌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만나서 함께 이룬 것이 모라비안 교회가 된 것이다(그들이 축출된 모라비아는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으로, 1029년에 보헤미아에 합병되었다). 모라비안 선교의 시작 – 진젠돌프 진젠돌프 백작(Nicholas von Zinzendorf)은 170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삭소니 정부의 장관이었는데 그가 태어난 지 6주 되었을 때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그가 4살 때 재혼을 하여 그는 할머니와 숙모의 품에서 어린 시절 자랐다. 어린 진젠돌프는 할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 할머니는 엘리트층으로, 특히 대학교수들과 교제하며 당시 특별한 신앙 흐름인 경건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진젠돌프도 경건주의의 대가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기초를 배웠다. 진젠돌프는 여러 외국어도 능통했으며, 외적인 지위나 내적인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백작이었다. 그는 5살이 되었을 때부터 그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단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말씀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대학에 다니면서 했던 3가지 결단이 있다. ‘첫째 나는 한 사람 한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면서 친절하게 내 삶을 그들을 위해 드리리라, 둘째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리라,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까지 전파하리라.’ 대학 때부터 복음을 향하여 신실하게 살아갔던 진젠돌프가 예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헌신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났다. 진젠돌프는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을 투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진젠돌프는 한 회당에서 특별한 그림을 하나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받으시는 장면이었다. 그 밑에 글귀가 쓰여 있다. “나는 너를 위해서 피 흘려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그 글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들려주신 음성이었다. 그때부터 진젠돌프 백작은 결단한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살아왔다고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는 내 인생을 나를 위해 보내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진젠돌프는 목사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러나 진젠돌프는 높은 귀족의 가정이었지만 당시 목사는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젠돌프는 할머니의 권유로 변호사직을 계속 수행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커다란 영지를 사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주일에 초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 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농부와 부랑자들, 그리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젠돌프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던 특별한 계기가 일어났다. 1722년으로 그가 22살 때였다. 순교자 존 허스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핍박을 받다가 진젠돌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진젠돌프의 영지에 와서 정착을 한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교회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모라비안 교회가 생겨나게 된 첫걸음이었다. 진젠돌프는 1734년에 목사가 되었고, 백작 등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결단하고 나아갔다. 그가 평생토록 가졌던 한 구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을 받고 세계선교를 시작하다 모라비안 교회가 평범했던 교회였지만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어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 모라비안 교회 가운데 거룩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시발점은 1727년 8월이었다. 오늘날 교회처럼 부흥집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성령님이 집회 가운데 그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는지 가시적으로 성령을 체험할 정도로 집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그들의 삶을 주님을 위해 드리기로 결단을 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732년에 선교가 시작된다. 진젠돌프가 코펜하겐 왕실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그곳에 온 노예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노예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진젠돌프는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듣게 된다. 어떻게 한 인생이 태어나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예들을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여 그들의 생활을 교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진젠돌프는 교인들에게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로 삶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을 초청을 한다. 26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그들의 삶을 노예들을 위한 선교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며 손을 들게 되었다. 전혀 가보지도 못했던 곳에 가서, 전혀 이름을 듣지 못했던 이방 땅의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그들의 삶을 드리겠다고 헌신하며 나온 사람들이었다. 모라비안들의 선교지 몇 군데를 소개하면, 얼음으로 뒤덮인 그린랜드에 1733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특별히 배움이 없었던 사람들이 파송을 받았다.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굶어죽고 때로는 핍박을 받았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증거 했던 복음 때문에 에스키모 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수많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미국 초창기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이다. 많은 미국지역에 모라비안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했다. 미국 초창기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복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킨 모라비안 선교사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가 1735년 영국에서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배가 뒤집힐 정도의 폭풍 속 죽음의 위협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던 요한 웨슬리는 배 한편에서 너무나 고요하고 평안한 소리로 하늘을 향하여 찬송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그들이 바로 모라바인 교도들이었다. 요한 웨슬리는 ‘저들은 누구이기에 죽음의 위기에서도 전혀 요동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요한 웨슬리가 조지아에서 한 선교는 성공적이 아니었다. 선교에 실패하고 기진맥진해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738년 5월에 영국에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요한 웨슬리는 설교를 듣고 그의 심령 속에 다시 한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설교를 한 사람이 모라비안 평신도 선교사였다. 요한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설교를 통해 내 가슴이 강렬히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죄와 내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구원의 확신을 주셨다.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 부터 나를 구원하셨다.” 요한 웨슬리는 다시 한번 힘을 얻어 영국의 런던을 변화시키고, 런던의 모든 술집을 닫게 할 정도로 거룩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영국의 브리스톨에 가면 요한 웨슬리가 목회했던 조그마한 교회가 남아 있다. 요한 웨슬리는 말을 타고 일생 동안 여가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아침 7시 30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3,500명 모임. 오전 11시에 가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 2,500명 모임. 오후에 티타임을 하고 4시에 다시 복음을 전하러 가다. 2,500명이 모임.” 요한 웨슬리는 일생동안 말을 타고 말위에서 잠을 자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를 변화시킨 사람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하면서 세계를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했던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킨 사람이 모라비안 선교사였다.(류응렬목사 글, 워싱톤 중앙교회. 크리스천 Weekly 주간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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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안(Moravian)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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