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최초 선교사 파송, 감리회의 홍승하(洪承河) 선교사
올해(2013년)로 111주년, 1902년 12월, 하와이 이민단과 함께 선교사 파송
1903년 1월 도착, “한인전도회” 조직하고, “호놀루루 한인교회” 등 교회 설립
홍승하 선교사는 교회개척으로 교포사회의 중심 단결, 신민회 창설키도
▲ 노종해 목사 (선교사, CMRC원장) |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 받고, 교회를 설립한 것은 1903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였다. 이는 물론 한인교포로 시작되었지만 해외로 목회자를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하며 현지교회와 협력한 복음을 전도한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다. 하와이에 첫 목회자를 파송한 것은 공식적으로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첫 이민 사업에서 기인한다.
굶주림과 헐벗은 고난의 때 첫 집단이민단, 낙원으로?
한국인의 첫 집단이민사업은 1902년에 시작되었다. 국내적인 요인으로는 1901년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고난을 격던 때였다. 이때 주한 미국공사알렌(H.N. Allen)은 1901년 휴가 차 하와이를 방문하는 동안 농장경영주들과 만났고 노동자 수급의 긴급성 등을 협의하였으며, 경영주들로부터 촉탁 받아 내한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이민문제를 제시했다.
고종황제는 한국인들의 이민은 예기치도 못하고 생소한 일이였지만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승낙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하와이 농장경영주 협회에서는 1902년 5월 9일에 제물포에 거주하는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의 테슬러(D.W. Deshler)를 이민모집 요원으로 선정하였다. 데슬러는 알렌과 함께 제물포지역 선교사인 죤스(H.G. Jones, 趙元時)의 협력으로 한국인 이민단을 모집하였다.
“수민원” 설치하고 이민단 모집공고
▲ 하와이 이민 한인들 |
고종황제는 하와이 이민사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1902년 8월 20일에 수민원(綬民院, 외무부 여권과)을 설치하고 민영환(閔泳煥)을 총대로 임명하였으며, 서병호(徐丙浩)를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서병호는 한국기독교 최초 유아세례인 이였다. 수민원은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개발회사를 두고 이민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에 신문에 광고를 내며 거리에 국문으로 벽보를 부쳐 광고하였다. 이때 내걸은 일곱가지 공고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와이 제도 각 섬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독신이나 직계 가족을 동반해 주거를 원하는 사람은 편리하게 주선하노라.
둘째, 기후조건은 적당히 온화하여 심한 추위나 더위가 없으므로 개인의 기질에 알맞고 쉬이 적응되리라 믿는다.
셋째, 학교설립이 방대다면하여 모든 섬마다 학교가 이미 설립되었고 영문으로 학생을 교수하며 학비는 일체 없다.
넷째, 농부들은 그들을 위해 해마다 절기에 따라 직업을 얻기 쉬운데다가 다만 육체가 건강하고 품행이 방정한 사람이면 장기간의 직장을 구하기 쉬우며 하와이 법률의 제반혜택을 받노라.
다섯째, 보수는 미국 달러 화폐로 월말 15달러씩이며 경우에 따라서 후한 상여금이 있고 매일 열 시간 일하며 일요일엔 휴무이다.
여섯째, 노동자의 숙박비와 병원 치료비는 일체 경영주가 부담하노라.
일곱째, 대한제국 국내에 이 공시를 널리 광고할 권한을 대한제국 황제께서 허가하노라.
이러한 공고사항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통하여 소개되었으므로 초기 이민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다.
첫 이민자들 노예 같은 생활, 나라까지 잃어-교회개척, 신앙으로 극복
이렇게 모집하여 첫 출발한 이민자 수는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항을 출발한 121명이었다. 이듬해 1903년에는 1,133명, 1904년 3,434명, 1905년 7월까지 7,226명이 이민하였고, 이민사업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중단되었다.
초기 이민자 중에는 죤스(H.G. Jones) 선교사가 담당했던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이때 첫 이민단과 함께 파송받은 분이 전도인 홍승하(洪承河) 선교사였다. 제물포교회에서 목회하던 안정수 전도사도 이민단 통역인으로 함께하였다. 2차 이민단에는 정동교회의 정동교회 현순(玄揗)목사가 통역인으로 참여하는 등 감리교 전도사(당시, 권사)로 활동하던 분들로 1905년에는 “하와이 군도 감리교 선교연회“(12월)가 조직되었다. 해밀톤 감독(Bishop J.W. Hamilton)의 사회로 열렸고, 하와이 군도지방 감리사는 워드만(J.W. Wadman) 목사로 당시 선교연회에서 파송받은 사역자와 교회는 다음과 같다.
안정수(통역관, Kahulch), 현순(玄揗,통역관,Lihue & Hanamaulu), 홍치범(洪致範, 남산현교회, 스프렉클스빌 & 와일루아), 임정수(林正洙,Kahuku & Waialua) 민찬호(閔燦鎬,배재학당,호놀루루) 이경직(李景稙, Eleele & Koloa), 김이제(金利濟, Waipahu), 신판석(申判錫, Hilo & Olaa), 최진태(崔鎭泰,Kohala), 윤병구(尹炳求, 한인기독보 주필), 송헌주, 이지성, 장경화(이민화사 총무), 문또라 등
*전도사역자 부족으로 파송받지 못한 7개 교회-라히이나, 카아나팔리, 키아네아, 케알리아, 마카왈리, 케카하, 코나, 호노카, 오아칼라, 하칼라우 등 (후에 미감리교 연회로 편입됨)
이분들은 하와이 교회개척뿐아니라 교포사회의 중심 지도자들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 섯고, 귀국하여서도 활발히 전도활동하던 분들이며, 민족구국 독립운동, 교육운동 등에도 열렬히 활동한 우국지사들이였다.
한국기독교 최초 선교사 홍승하, 그는 누구인가?
▲ 홍승하 선교사 |
홍승하(洪承河) 선교사는 최초 이민간 한인들이 약속과는 달리 혹독한 환경에서 노예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목격하였다. 홍승하는 한인들이 고난 속에서도 절망치 않고 교회를 통해 단결하도록 이끌었다. 이들은 도착한 후 3-4월부터 곳곳에서 전도인들의 인도로 스스로 예배드리기 시작하여 “한인전도회”를 조직하였고, 1903년 11월 11일 리버 스트리트(River Street)에 집을 얻어 하와이 한인교회를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한인교회는 복음사역뿐 아니라 고난과 나라 잃은 절망감 속에서 서로 격려하며 극복케하여, 피로 얼룩진 급여를 모아 오히려 고국을 도왔다. 선교사 홍승하 목사는 “신민회”를 조직(1903.8.7.)하여 초대 회장으로 활략하였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인교포교회는 인간적인 삶을 누리게 하는 배양처가 되었다. 이점은 오늘날의 미주 한인들이 이국땅에도 뿌리내리며 성장케 하는 정체성 확립시키는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미주 한인교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2013년)는 미주에 첫 한인교회가 설립된 110년이 되는 해로써, “하와이 교회 총연합회”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계획되어 있어, 이 자리에 인천 내리교회 담임인 김흥규 목사가 특별강사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 홍승하선교사를 파송한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1901년 건축. 현 내리교회) |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향해더욱 힘차게 나아가야
그런데 정작 최초 이민단의 대부분이 감리교인들이었고, 첫 선교사로 홍승하(洪承河)를 파송한 한국 감리교회가 둔감하고 냉담 하고 있다면, 이러한 무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교단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그렇 수록 더욱 힘써서 사명 감당해야 하지 않는가? 감리교회는 세계선교사도 1천2백 명 넘도록 파송하고 있는 교단이 아닌가? 왜 주체적인 사명을 감당치 못하는가? 말로만 구호로만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감리교회”인가? 어느 개교회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1902년 한국 감리교회는 남, 북, 서, 세 지방이 한 연회(한국연회)였지 않은가? 당시 제물포교회는 한국 서지방의 중심이었고, 경기도, 충청도 등 남부지역까지 선교지휘부요 본부 아닌가?
더욱이 홍승하(洪承河) 선교사는 장로교회 등 타 교단 역사학자들도 한국기독교의 첫 선교사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둔감하고 있지 않는가? 미주 교회들이 교파연합 하여 기념행사를 열고, 새롭게 선교의 사명을 결단하고 있는데, 정작 선교의 모체인 한국 감리교회는 무엇하고 있는가? 본부와 선교국, 각 연회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가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일깨우고 결단하여 세계선교를 향해 힘차게 합심해 나아가야할 것이다.(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