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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 총리사의 생애와 순교신앙-최이우목사(종교교회)

최이우 목사(종교교회), 한복협, 3월 월례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양주삼 총리사의 생애와 순교신앙
서론
최근 한국감리교회는 혼란을 거듭하며,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럴수록 올바른 신앙의 표지를 따라 다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갈 노력과 헌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임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격동의 시기에 일평생을 다해 교회를 세우고 헌신한, 한국감리교회 창설의 주역이라 불리는 양주삼 총리사의 생애와 공헌과, 순교신앙을 살펴보며 이 시대에 우리가 본 받아야할 삶과 신앙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론
1. 양주삼의 초기 생애
양주삼은 1879년(고종 16년) 1월 25일 평남 용강군 산남면 흥문리에서 가난한 선비 양정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가정불화와 사회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유교, 불교, 동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관심을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 서적을 접하며, 19세가 되던 해 1898년에 용강읍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파커 원장에게 세례를 받고(1902.10.7.), 졸업(1905.6) 후 미국에서 한인교포들의 권의 보호와 교육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도사 직첩은 받았지만, 미국 남감리회에서 정식 전도사로 임명받을 때까지 목회자로서의 길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09년 7월 기도 중에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라.”는 소명을 받아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기로 다짐하였다.
1912년 10월에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 후 협성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자교교회 담임목사직을 1년간 겸임하였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8년 미국 남감리회 100주년에 선교백주년기념사업회 총무로 선임이 되어 1923년까지 교회와 민족에게 새 힘과 새 소망을 불어 넣게 되면서 조선 땅에서 감리교회에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다. 각 지방마다 전도대를 조직해서 순회하며 전도하고, 전도 문서를 나누어준 결과 4년 만에 조선에서 남감리회의 교회 수와 교인 수가 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놀라운 결실을 이루었다.

2. 양주삼의 공헌
1) 남북 감리교 합동(감리교 일치 운동)
양주삼의 업적 중에 가장 큰 것은 한국의 남북 감리교회를 하나로 합동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다. 즉, 1930년 이전 까지 북감리회, 남감리회로 나뉘어 선교와 교회조직을 이끌던 두 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한 것이다. 이는 결국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모체가 되었다.
2) 한국 감리교회의 초대 총리사로서의 역할
양주삼은 헌신적으로 한국감리교회의 지도자로서 일생을 바쳤다. 첫째, 박학 다식한 실력과 통찰력으로 감리교회의 인원과 재산, 건물, 조직 등을 일일이 파악하여 공명정대하게 일을 수행해 나갔다. 둘째, 감리교회의 인화에 대해 힘씀으로 남북교회가 하나되고 단결되도록 도왔다. 셋째, 미국에 있는 모교회와 긴밀한 연락으로 한국교회와 자매교회 관계를 훌륭히 맺어주었다. 넷째, 타 교파와의 연합 사업에 적극적이었고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다섯째, 교역자들의 생활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은급제도 결정 등을 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성장에 대한 공헌, 여성 목사안수 허용, 감리교 부동산 유지재단 등록 등의 업적이 있다.
3) 시베리아 만주선교
일제탄압이 심해지면서 시베리아 만주에 떠나사는 한인들이 늘어나자 양주삼은 “저 양들을 누가 돌볼 것인가?” 기도하던 중에 뜻을 정하고 1920년 직접 선교지를 만들고 교회를 조직하고 인적, 경제적 자원을 보충시키고 지도자를 훈련시켜 교회를 가꾸었다.
3. 양주삼의 마지막 모습과 순교신앙
1) 배경
북한 공산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침공하여 3년간 남한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 남침을 시작한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100만 서울 시민은 거의 다 적군의 손에서 탈출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6.25부터 9월 28일까지 약 3개월간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안의 서울은 완전히 불안, 공포, 굶주림, 절망, 죽음, 암흑의 세상이었다. 공산군의 세뇌공작, 식량과 기타전략 물자의 징발, 전쟁 수행을 위한 노무징발, 의용군 모집 그리고 다양한 명령과 요구들 때문에 노인으로부터 어린이까지 총동원이 되어서 그들의 손발 노릇을 해야했다. 공산정치의 공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했다. 남한 정부와 관련이 있었던 사람을 위시해서 반공 사상이 있는 사람, 미군과 관계 있던 사람, 돈푼이나 있던 사람, 사회적 지위가 조금이라도 두드러진 사람이면 모두 감시를 받았고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민 재판에 붙여야할 위험 인물이 되어야 했다. 불과 3개월 안에 서울 장안 백성들은 완전히 절망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불안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공산군이 그들을 싫어하고 그들의 정치 하에서 학대를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기독교인을 가장 다루기 힘든 강한 적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독교인들을 설득시키려 해도 도저히 통하지 않음을 보고 기독교인은 특별히 주의해서 감시하고 혹시라도 투옥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대접하는 것이 그들의 정책이었다. 사변 동안과 공산군의 후퇴 시에 사형 혹은 납치해 간 기독교 교역자의 수는 수백 명이었고 그 중에는 유능한 기독교 지도자도 많이 들어있었다. 공산군의 정책이 이처럼 무지하고 가혹했으니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는 예배를 위시하여 교회의 기능은 전부 마비되고 말았고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피난가거나 은신하여 겨우 죽음을 면했다.

2) 양주삼의 마지막 모습
당시 양주삼은 적십자사 총재직을 맡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다. 또 많은 의료기구와 설비를 맡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무책임하게 서울을 떠날 수 없었다. 더구나 군의관 수는 적고 갑자기 다수의 부상자는 밀려들고 해서 총재의 결재와 활동이 몇 배 더 많이 요구 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급해지는 보도가 각각으로 들어와 할 수 없이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6월 27일 의사와 직원들에게 석달 월급을 미리 주어서 돌려보내고 자신도 석 달 월급 18원을 찾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9시경 누군가가 한강을 건너가야 한다고 권하여 한강철교까지 갔으나 철교에서 엠피가 길을 막고 갈 수 없다고 하자,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양주삼 박사 내외는 “우리는 늙었으니 죽는 것이지만 젊은 것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울었다.
그때 공산군이 달려들어 집안 안팎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그 날부터 8월 23일까지 매일 찾아오다가 23일 아침에 목사들을 모아 놓고 의논할 회의가 있으니 참여하라는 통지가 왔다. 양주삼은 아파서 못간다고 했지만, 심부름 온 공산군이 10분 후에 차를 가지고 와서 양주삼 박사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그 이후 소식이 끊기게 되었고 이것이 양주삼 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3) 양주삼의 순교신앙
순교자 양주삼 목사
양주삼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와 같이 마지막 순교 장면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간 목사와 기독교인은 납북하여 투옥하거나 살해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양주삼 총리사가 순교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목할 점은 그가 피난을 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맡겨진 적십자사 총재직과 수많은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목숨이 위협받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도 한결같이 맡겨진 직분과 수많은 생명들을 지키려 했던 그의 신앙과 삶은 그의 실종이후의 죽음을 “순교”라 칭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코 하루아침에 나온 결단이 아니었음을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그의 전 생애를 빛나게 해준 다른 순교자들과는 다르게, 양주삼은 오히려 그의 전 생애가 죽음을 빛나게 해주었다. 이것이 그의 순교신앙이다.
결론
순교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박해를 물리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일을 말한다. 양주삼의 순교신앙은 그가 신앙을 가진 이후 일생 내내 그의 삶에서 이어졌다. 평생 감리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목숨 바쳐 일했으며, 언제나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도 한결같이 이 순교신앙이 깃들여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양주삼 총리사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현재 한국감리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우려면, 격동의 시기에 한국교회를 건강히 세워나갔던 양주삼 총리사의 순교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줄 믿는다. 교회를 세우는 일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목숨 걸고 지켜내는 순교신앙이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부록- 양주삼 총리사의 중요 연보(年譜)
1879년(고종 16년)1월 25일 평남 용강군 산남면 홍문리에서 출생

1898년 9월 기독교 입교

1901년 5월 중국 상해 중서서원에 입학

1905년 6월 중국 상해 중서서원 졸업

1902년 10월 7일 중서학원 파커 원장에게서 세례 받음

1906년 12월 15일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감리회 설립, 담임전도사로 시무

1912년 10월 13일 집사 목사 안수 받음

1913년 6월 18일 밴더빌 대학 신학과 졸업

1914년 6월 21일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 졸업

1915년 1월 2일 귀국, 감리회 협성 신학교 교수에 취임

1915년 6월 16일 김매륜 양과 결혼

1915년 10월 4일 서울 자교교회를 담임 (1년동안)

1916년 2월 <신학세계> 창간 1919년 9월 9일 서울 종교교회 담임 (2년간)

1921년 2월 재단법인 연희 전문학교 이사에 취임

1922년 4월 미국 남감리회 19회 총회에 한국대표로 출석

1923년 서울 감리회 협성신학교 교수에 취임

1930년 9월 24일 남감리회 조선 연회장에 피선

1930년 12월 8일 기독교 조선 감리회 제 1대 총리사에 피선

1932년 6월 서울 이화 고등 여학교 설립자가 됨

1934년 10월 8일 기독교 조선 감리회 총리사에 재선

1938년 10월 13일 기독교 조선 감리회 총리사 임기 완료,

퇴직 기독교 조선 감리회 만주 선교사업 관리자로 수고

1948년 1월 국제 연합 조선 협회 대표 이사에 취임

1949년 10월 대한 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1950년 7월 6.25 사변 중 공산군에게 납북 되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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