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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흔적(라이프치히, 비텐베르그)

토마스교회_광장의_바하_동상[1]

▲ 성 토마스교회 광장의 바하 동상

라이프치히 곳곳에 묻어있는 신앙인들의 흔적

 

프라하에서 시작된 여정은 드레스덴을 거쳐 라이프치히로 이어진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루터의 도시를 찾아다니기에 아주 편리하다. 라이프치히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계가 깊은 도시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논쟁(1519년 6월 27일~7월 16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고 파문당했다.
라이프치히 논쟁이란 루터와 가톨릭교회 대표 에크(Johann Eck)가 플라이센부르크 성에서 벌인 신학적 논쟁을 말한다. 여기에서 루터는 교회가 얀 후스를 정죄한 것은 큰 과오였다고 지적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연옥은 없으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비성경적인 것으로 없애야한다고 주장했다. 에크는 논쟁 이후 종교개혁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해 당시 교황 레오 10세에게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시킬 것을 제안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고, 그의 저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사건이 독일 사회에 알려지면서 루터의 지명도가 높아졌고, 종교개혁이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 반드시 찾아가봐야 할 볼 곳은 성 토마스교회(St. Thomas Church)다. 이 교회가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교회에서 라이프치히 논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논쟁에 참여할 루터 진영의 사람들과 가톨릭교회 진영의 사람들이 첫날 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다음날부터 진행될 논쟁의 규칙을 결정하였다.

둘째, 이 교회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가 27년 동안 음악감독으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음악가 바하는 루터 서거 이후 약 100년 뒤에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도시 아이젠나흐(Eisenach)는 루터의 개혁신앙을 간직하고 있던 도시였다. 바하는 루터의 개혁신학을 음악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루터의 개혁신앙을 이어받았고, 그 신앙을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바하는 당시 음악인들의 최고 로망이었던 궁중 악장으로서 부와 명예가 보장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자들과 정치인들의 잘못된 삶에 회의를 느꼈고, 그들을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이 신앙 양심상 많은 부담이 되었다. 궁중 악장으로서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한 신앙이 세속적 환경을 거부한 것이다. 거룩과 세속, 의와 불의, 정직과 거짓은 항상 대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바하는 궁중 악장 직분을 내려놓고, 토마스교회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비록 열악한 조건에서 27년 동안 사역했지만, 교회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들을 남겼다.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B단조 미사곡 등은 제목은 몰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그의 대표적인 곡들이다. 바하의 삶과 작곡의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속메시지를 음악으로 구현했다.

개혁신앙이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혹은 무엇을 전공했던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악보 곳곳에 J.J(Jesu Juva 즉 Jesus help)를 적고, 작품을 마무리할 땐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개혁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인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바하는 생전에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100년 후 음악감독이 된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연주하면서 비로소 바하의 진가가 드러났다. 성 토마스교회 안에는 바하 시대의 오르간과 그의 묘가 있다.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 바하가 살아있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온다. 매주 금요일 저녁 6시에 열리는 바하소년합창단의 연주회도 적극 추천한다.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트램을 타고 바하 하우스, 멘델스존 하우스, 슈만 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라이프치히를 만끽하는 것도 좋다. 거리 악사들의 수준 높은 연주를 듣는 것도 라이프치히 여행의 맛 중 하나다.

니콜라이교회도 방문하면 좋다. 이 교회는 월요평화기도회로 유명하다. 1982년부터 시작된 이 기도회가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데 영적 주역이 되었다. 1989년 10월 16일 전국으로 확산된 ‘침묵 비폭력 평화시위’가 11월 9일 베를린장벽을 무너지게 했다.(by 이기훈)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가다

루터의 원서들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에 전시돼 있는 루터의 원서들.

 

개혁신앙을 찾아가는 여행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단체여행은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편리함이 있지만, 개인 시간을 갖기 어렵다는 것과 시간에 쫓겨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더 머물고 싶은 곳과 더 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짬짬이 광장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 시장이나 상점을 들러 보며 그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느껴보는 것이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 루터의 도시들은 바로 이런 방식의 여행에 적합하다. 여행의 무대를 라이프치히에서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옮겨가 보자.
마틴 루터(1483~1546)는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임종했다. 그는 광부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조인이 되기 위해 18세에 에프르트(Erfurt)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친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자 성직자가 되기로 서원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1505년에 안수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 후 로마 계단성당을 방문해 죄 사함의 확신을 얻고자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행을 했지만 확신을 얻지 못한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죄 사함과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508년에는 비텐베르크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신학박사가 되었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다. 작고 아담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로, 개혁신앙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가장 먼저 루터하우스를 방문해 보자. 루터하우스는 루터와 관련된 원본자료 1,000여 점이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이 종교개혁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은 원래 수도원이었는데, 프레드리히 대제가 루터에게 제공해 줘 35년 동안 생활했다. 그의 부인(Katharina von Bora)은 대학생 하숙을 치면서 생계를 이었다. 루터는 이 집에서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했고, 95개 조항 반박문을 작성하였다.
루터하우스에는 꼭 봐야할 것이 많다.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던 인물 중 하나로 루터를 정치적으로 보호해 주었던 프레드리히 대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500년 전 사람의 얼굴에서 현자다운 품위가 느껴진다. 루터가 수도사 복장을 하고 박사모를 쓰고 있는 모습, 루터 부부, 노년의 루터, 루터의 임종 때 얼굴이 잘 그려져 있다. 또 95개 조항을 예배당 문에 붙이는 그림도 감동을 준다. 루터의 흔적들이 그림으로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프레드리히 대제가 궁중의 화가로 임명했던 루카스 크라나크(Lucas Cranach)덕분이었다.

그 다음으로 볼 것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한 대금을 보관하던 면죄금고다. 1517년 10월 31일 성안교회 대문에 내걸었던 95개 조항 문서가 있다. 수도원 식당으로 쓰였던 곳에는 크라나크가 그림으로 표현한 십계명 화판이 걸려있다. 루터가 입고 설교하던 수도사 옷, 1524년 인쇄된 개신교 최초 찬송가, 루터가 1522년에 독일어로 번역 출판한 신약성경 원본과 2년 뒤 완역한 구약성경 원본이 있다.

루터가 성경을 가장 먼저 번역한 것은 개혁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성경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소지할 수 없었다. 성경이 있어도 자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었다. 읽을 수도 없고, 읽어서도 안 되는 것이 성경이었으니 중세교회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여러 도시에 세워진 루터의 동상을 보면 왼손으로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펼쳐진 성경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오직 성경 중심이 참된 개혁신앙인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교회가 제도화되고, 전통이 성경보다 우선되는 날부터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세속화된다는 것을 교회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봐야할 것은 비텐베르크시의 공동금고다. 이것은 루터의 개혁신앙이 단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복지 분야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금고에는 교회, 당국, 시민대표 등이 공동책임을 가지고 운영하도록 3개의 자물쇠가 있다. 헌금은 목회자의 사례비와 교회관리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한 복지비로 사용되었다. 소상공인들에게 저금리로 대출해주기도 하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으로도 사용되었다. 교회개혁이 사회개혁으로까지 확산된 것을 볼 수 있다. 개혁신앙이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품고, 돌봐주는 것이다. 성경적 경건 혹은 영성은 세상의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기훈 목사의 ‘개혁신앙의 흔적을 찾아’,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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