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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미감리회 목사 두 분.

한국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미감리회 목사 두 분.

 

▲ 가우처

한국 개신교선교는 1883년 9월 13일 민영익 일행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볼티모어에서 탑승한 해외선교 열정에 불타고 있던 미감리교회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박사를 만나 3일 동안 함께 여행하며 대화하던 중 “한국에도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우처가 굳히면서” 시작됐다. 그 후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적극적으로 요청했고 가우처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감리회 선교부 파울러(Charles H. Fowler) 감독은 한국 선교지답사를 추진하게 됐다. 1883년 미국감리회 총회선교위원회에서 한국에 선교할 것을 결의했으며 일본주재 감리교 감리사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목사에게 한국답사를 훈령하게 됐다. 가우처 박사는 한국의 선교지가 성공적으로 개간되도록 거액의 선교기금을 수차례 헌납했다. 훗날 가우처 목사를 “한국 선교의 대부(大父)”라고 추앙하고 있다.

맥클레이 목사는 동경영화학원 교장 당시 1884년 6월 19일 일본나가사키를 출발, 6월 23일 오후 1시 제물포항에 도착, 다음 날 상륙즉시 서울정동에 들어와 미국공사 후트(Lucius H. Foote)의 영접을 받으며 며칠을 머물다가 6월 30일, 일본에서 매우 즐거운 안면을 형성한 바 있는 정부관리 김옥균을 만나 국왕께 “미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일본어로 쓴 선

▲ 매클레이

교 청원서를 전달했다. 7월 2일 황제 고종(高宗 : 1852-1919)로부터 ”미감리교회가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을 곧 착수해도 좋다“는 『선교윤허』 통지문을 7월 3일 받았다.

맥클레이 목사는 1888년 초 미국으로 귀국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헌신한 이 땅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황금 추수 밭으로,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 의사 윌리엄 스크랜턴 목사와 그의 아내, 메리 스크랜턴 부인, 그리고 스크랜턴 의사의 모친에게 영광스런 기회와 명예가 돌아가게 한 위인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한국 선교의 양부(養父)“로 불리워지고 있다. 가우처 목사와 맥클레이 목사의 희생적인 효험 있는 수고와 시도들과 공헌들과 봉사들은 잘 문서화시켜 한국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는 한국 감리교회.

 

▲ 현순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1902년 아펜젤러(H.G. Appenzeller) 선교사의 순교와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의 병환으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모자(母子)가 병 치료를 위해 귀국함으로 해서 선교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의외로 이 일은 이 땅에 한인 선교시대를 열며 정동의 최병헌, 상동의 전덕기라는 구국, 구령의 위대한 선각자를 낳게 한다. 두 분 문하에서 훈련받은 두 사람의 또 다른 선각자가 있으니 현순, 손정도 목사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순교하자 현순(상동) 전도사, 손정도(상동-동대문) 목사는 최병헌 목사의 정동제일교회로 합류, 두 분이 결성한 협성회(충군애국지심, 민족계몽)를 주축으로 새로운 기독교 국가건설에 앞장서게 된다. 아펜젤러, 최병헌, 현순, 손정도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있게 한 주춧돌(초석)이다.

▲ 손정도

감리교회 초기역사를 몸으로 쓴 대표적인 인물로 아펜젤러 선교사와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를 손꼽을 수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쓴 역사가 한국 감리교회의 내적인 면에 충실했다고 본다면 헐버트 선교사가 쓴 역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외적인 면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초대 한국선교사로 한국 감리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역사는 그가 한국에 오게 된 1884년부터 순교한 1902년까지로 5,000장이 넘는 기록들이 미국 드류 아카이보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정동제일교회와 배재대학교 조성환 목사가 마이크로 본을 해독, 5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1902년 이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감리교회 역사는 스크랜튼에서 존스(G.H. Jones), 노블(W.A. Noble), 스웨워러(W.C. Swearer) 선교사 등으로 옮겨가게 된다. 스크랜튼을 비롯하여 드류 아카이보에 있는 이 분들의 기록이 해독, 국역됨으로 미진한 한국 감리교회사를 말끔하게 재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 헐버트

헐버트 선교사(H.B. Hulbert)는 벙커(D.A. Bunker) 그리고 길모어(G.W.Gilmore)와 함께 국립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오게 되나 아펜젤러의 배재학당과 삼문출판사, 스크랜튼의 상동교회를 맡아 일하게 된다. 벙커와 함께 고종의 극진한 신임을 받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상동 만월(마누엘루) 청년회의 이상설, 이준(李儁)과 함께 대황제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했고 회의 참석이 좌절된 후 대표 이상설과 함께 미국을 순회한 다음 그로 하여금 한국 최초의 민주국가를 연해주 소왕령(小王嶺)에 건설하도록 뒷받침했다. 헐버트의 애국독립운동사 또한 한국 감리교회사의 핵으로 애초 중국에서 올링거 선교사(Franklin Ohlinger)에 의해 시작된 이 역사의 줄기는 벙커와 헐버트에 이르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로 하여금 신민회로 태동되며 이는 상해 임시정부를 건국한 손정도 목사와 현순 목사로 이어진다. 올링거, 벙커, 헐버트, 최병헌, 손정도, 현순 문건이 그 순서를 찾아 정리된다면 한국 근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대한민국 건국사 또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헐버트 선교사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에 의하면 한국근대사는 처음 청(淸)나라가 주도하여 쓰다가 소련과 미국, 일본이 끼어들어 제각기 쓰게 되는데 정작 역사의 주인인 한국은 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해 설명하자면 명(明)나라의 사상가 황종희는 명나라의 회복을 자나 깨나 꿈꾸었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명나라의 멸망을 부패한 왕실이 자초(오랑캐를 대망함)한 것으로 새로운 국가는 민(民)이 첫째요, 사직(司直)이 둘째요, 임금은 셋째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황종희의 신국가론은 이홍장으로 하여금 미국을 방문하여, 민주국가를 경험하게 한 후 청나라의 직례총독으로 대권을 거머쥐게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의 속국으로 치부되고 있던 조선은 이홍장과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의 손 안에 있게 되는데, 당시의 이홍장이 자신을 대신해 조선을 섭정토록 한 것이 독일의 외교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ellendorff)이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권과 경제권을 거머쥔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정세에 러시아가 깊숙이 관여되도록 길을 트자 이홍장은 주일청국 공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통해 러시아의 조선침략설을 퍼트리는 한편 묄렌도르프를 파직시키고 미국의 변호사 데니(Owen N. Denny)를 그 후임으로 오게 한다. 묄렌도르프에 이어 조선의 실권자가 된 데니는 조선 왕실로 하여금 수출입 조세권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청한론」(凊韓論)을 통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도 봉국도 아니다”라는 내용을 세계에 알림으로 서방의 자본을 조선 왕실로 끌어드리는 한편 자신의 신분 또한 이홍장의 청국과 상관없이 조선 왕실이 인정하도록 조치함으로 조선의 정세를 미국주도로 이끌어 버린다. 데니의 이러한 극단적 조치는 청나라 특히 원세개와 정면 대결하게 되며 이 일로 정동의 외교 관가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들게 된다. 이 외세의 분쟁은 동학란, 청일전쟁, 민비시해, 아관파천,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역사의 핵심에서 선교사들은 감리교회를 건설했고 그 감리교회가 이 민족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 엡윗 청년회(1921)F.S.파커 감독과 함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대한민국은 한국 감리교회 애국청년에 의해서 건설됐다.

 

유럽 열강의 약탈 장으로 역사에 등장했던 미국이 청교도들 특히 웨슬리안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로 건설된 과정과 대한민국이 선교사들이 길러낸 기독교 애국청년들에 의해서 오늘날 미국식 민주 대한민국으로 건설된 것이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재 협성회와 YMCA, 독립협회를 축으로 활동했던 모든 애국지사들 특히 탁사 최병헌 목사를 중심으로 충성한 이들이 감리교회 성도들이었고 이들은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에 의해 움직여지기도 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김구, 박용만, 이동휘, 신익희, 조병옥 등이 이에 속한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비서였던 김규식과 경신학교와 인연이 있었던 안창호, 오산학교의 이승훈 선생 또한 장로교 성도였지만 정동의 감리교회 애국지사들과 한 부류를 이루며 활동했다. 이를 뒷바라지했던 사람이 감리교 현순, 손정도 목사와 장로교 김병조, 정인과 목사였다. 감리교 협성회의 목표인 충군애국지심을 바탕으로 한 민족계몽의 결과였다. 헐버트는 충군애국의 역군을 양성하는 한편 그 또한 애국독립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국교회 특히 감리교 신학을 이 땅에 정착시킨 존스 선교사의 신학반은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에 “협성회”라는 청년애국 단체를 탄생시킨다. 1896년 대부분 정동교회 교인이며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애국 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협성회는 충군애국지심을 기르며 전국 동포의 계몽을 목적으로 조직된 애국 계몽단체이다. 이 협성회를 지도하는 인물이 최병헌, 윤치호, 노병선, 강매, 여병현 선생이었으며 주요 구성원은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남국혁, 안창호 등이었다고 한다. 배재학당 토론회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모임은 1898년 3월 중순까지 42회의 토론회를 개최하여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토론회에는 당시 궁내부대신 이재순을 비롯한 한규설, 심상훈, 민종묵, 이윤용 등 대신들과 한성판윤 이채변 등 현직 관료들이 참석하여 토론회를 권면하며 조선의 개화와 자주 독립을 고취했으며 한국 개신교가 태어난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는 서상륜, 김윤오가 중심이 되어 장연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협성회는 독립신문에 앞서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발간, 한국의 개화와 자주독립에 앞장섰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1887년 창립된 독립협회가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이 선임되고 조정의 대신 심상훈, 한규설, 박정양, 조병직, 민종묵, 고영희, 이재순 등이 위원으로 들어오면서 아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함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도구로 전락하자 신진 강경파 양흥묵, 이준, 이승만 등으로 아관파천 반대운동을 펴면서 이들을 제거하는 한편 기존의 배재학당 학생 외 벙커 선교사의 육영공원(외국어학교) 학생들이 합세함으로 협성회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주동하는 애국독립운동 단체로 거듭 태어나게 했다.

당시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들 독립당(개화파)들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1천만 원을 차용하게 됨으로 국운탈취의 빌미가 되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1895년 11월 28일 국왕탈권 미수사건인 춘생문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통정대부 호조참의(차관) 벙커 선교사를 비롯, 헐버트, 존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등이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맞선 황국협회 출현과 보부상패의 본부습격, 만민공동회에 이은 독립협회의 강제해산,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는 주권을 잃게 된다.

이 암울한 시기에 충군애국지심의 횃불을 다시 든 이가 있으니 탁사 최병헌 목사이다. 탁사는 신천옹(信天翁)으로서의 큰 입을 열었으니 당시 고종의 예식관(종3품)으로 총애를 받고 있던 아들 최재학을 중심으로 1905년 이준(개혁당), 김구(서북파)와 함께 을사늑약 반대 상소운동을 벌이는 한편 개혁독립 세력의 핵심으로 의분 자결한 그 당시 주 영국공사 이한우 공의 추도식을 드려 항일애국 독립운동의 횃불을 들었다.

정동 엡윗청년회 주관으로 개최된 이 추모식에서 최병헌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오호라! 조선천지가 왜구의 발 아래 있다」고 애도함으로써 항일 애국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이후 이 반대운동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연대하여 감.장.침례교 지도자 연합기도회, 구국철야기도회를 갖는 한편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고종의 밀서를 감리교 헐버트 선교사에게 주어 미국정부에 전달하도록 했으며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정동의 최재학을 소주(疏主)로 상동의 이준, 진남포감리교회 김구 등 22명이 대표로 발기, 대대적인 구국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 일은 미국정부가 승인한 조약을 교회청년회가 정치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로 엡윗청년회의 해산을 가져오게 했고, 이듬해인 1907년에는 이준의 헤이그 밀사사건 실패와 고종의 양위, 안창호의 귀국과 신민회 조직,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로 이어지면서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신민회가 지목되어 기독교 지도자 105인이 검거되는데 1910년 최병헌 목사도 이 조직의 경기지방 책임자로 몰려 일시 투옥되고 전덕기 목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914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전덕기

이 일의 주동자는 최재학, 이준, 김구였다면 그 배후에는 최병헌, 전덕기, 이승훈이었으며 이들의 대표적인 상소주 최재학이 최병헌의 장남인 점으로 보아 이는 곧 최병헌 목사의 정동제일교회와 상동교회가 주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서 최병헌 목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투옥까지 당하는 수모 속에서도 정동교회는 재적 1,968명으로 1,500여 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당 증축을 실행에 옮겼으며, 1913년 3월 배재에서 10일간 개최된 사경회에서는 정동, 배재, 이화학당과 함께 정동의 여섯 지 교회 교인들이 함께 부흥회를 가짐으로 영적생활의 심화를 더했던 것이며 집회 후 70명의 젊은이가 정동교회에 모이는 결실이 있었다.

이로써 정동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하면서 정동교회는 민족교회로 우뚝 서게 된다. 또한 6명의 새로운 전도사를 파송 받으면서 이들로 하여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선교와 애국독립운동을 앞장서게 했다. 이들 중 후일 송기용, 민찬호, 문경호 전도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 이승만 (민찬호 전도사), 샌프란시스코 안창호(문경호 전도사)를 돕게 했고, 현순, 이필주, 손정도(상해) 목사가 미국과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이승만(하와이), 안창호(샌프란시스코), 김구(상해)를 도와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하는 초석을 쌓게 했다. 삼일독립운동을 전후한 1920년대까지 기독교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불렸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계속)

(글:서대문교회이주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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