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上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신부(修士神父)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비텐베르크 교회에 첨부된 95개 조문에 의해 발단된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회 역사상 가장 큰 파문과 영향을 미친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노트르담대학의 오브라인 박사는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간에 서구문명과 인류생활과 사상에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은 인류역사상 거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프랑크푸르크대학의 프란즌 교수도 그가 쓴 교회사(1965년 간행)에서 종교개혁은 교회사상 교회의 유례없는 큰 재난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세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전제하고 루터는 당시의 모든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화약통에 불똥을 던진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각자의 시각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종교개혁의 배경 역시 복합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어서 단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실 종교개혁은 당시 가톨릭교회 내부의 쇄신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면에 큰 변혁을 가져다 주었으며 근대 시민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서양 근대화의 계기가 된 르네상스와 더불어 인류역사상 한 시대를 마무리짓고 새로운 한 시대를 개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근원적으로 대립되는 정신운동이지만 계몽주의(啓蒙主義)라는 측면에서 두 정신운동이 하나로 융합되어 서양근대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어쨌든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지켜온 가톨릭교회 내부에 대한 쇄신의 표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당시까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초국가적 권위와 국제적 성격을 지켜온 교회 내부의 일부 성직자 평신도와 귀족 특권계층과 많은 평신도들의 타성과 부패, 즉 세속화가 그 발단의 원인이 되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가톨릭 측면에서도 당시 교회의 세속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만 자체적 내부의 쇄신이 좀 미약하였을 뿐 몰락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후반기 교회는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변화에 따라 세속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뜻있는 성직자들의 쇄신의 노력도 많았고 일부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세속성이 강하여 뜻있는 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중세사회의 지식층은 모두가 성직자들이었고 또한 이들이 당시 사회를 이끌어왔기에 일부의 세속화는 있을 수 있는 일로 교회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부의 표면적인 시각의 이유만을 탓하여 전부인 양 그 성격을 규명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교육부에서 채택하고 있는 많은 세계사 교재에 의하면 가톨릭의 원천적 오류와 부패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는 확실히 너무나 지나친 편견으로 시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교회내 일부의 부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근원적이고 전체성을 띤 것도 아니며 절박한 세속적 부패도 아니었다. 교회도 항상 자체적으로 잘못을 시정하고 쇄신이 뒤따르고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부패를 바르게 이해하는데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해명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다음호에서 설명)
또한 세계사 교재에 나오는 95개조의 ‘반박문’이라는 용어는 저항적 감정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으로 ‘질의문’과 같은 유연성 있는 표기가 더 옳지 않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95개조의 주된 발단이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 염출을 위한 대사(大赦,Indulgence) 문제로 도미니코회 수사신부인 텟셀(Tetzel,1465-1519)의 능변의 헌금 모집 선전이 루터의 마음을 자극하였기 때문이다.(후일 교황도 텟셀의 무분별한 헌금모집 능변을 문책하였음)
그리고 세계사 교재에 한결같이 면죄부(免罪符)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대사, 속죄(贖罪) 또는 중국식 한자어인 속유(贖宥) 등으로 표현함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전호의 대사문제 참조)
그리고 부연할 것을 당시 95개 조문이 첨부된 교회문은 게시판의 역할로 논쟁의 정보와 학술적 행사가 게시되는 곳으로 텟셀의 헌금모집 능변에 대한 학술상의 논쟁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대사는 교회나 수도원의 신개축과 교량같은 공공건물의 건축과 관련하여 발하는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종교개혁 당시 레오 10세(재위 : 1513-1521)에 의해 반포된 대사는 율리오 2세(재위 : 1503-1513)가 선포한 것을 수정하여 재선포한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 사용에도 많은 이설(異說)이 있다. 즉 개혁이냐, 혁신이냐, 반란이냐, 혁명이냐 하는 시각은 각도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고 있지만 개혁이 없었던 것이 아니기에(자체 개혁 또는 쇄신) 가톨릭측에서도 종교개혁이란 말을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떻든 이렇게 발단된 종교개혁은 교회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으로 이는 신앙의 기본을 흔들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여러 갈래로 분열시킴과 동시에 30년간의 종교전쟁이라는 슬픈 결과를 초래하고 유럽사회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는데에 종교분열 이외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밖에서의 개혁(Reformation)과 교회 안에서의 개혁(Reform)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인 교회 밖에서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개혁이라 하는 즉 개신교(Protestantism)의 발단이 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며 이는 가톨릭적 의미에서는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몇가지 형태로 세분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再洗禮派)의 급진적인 종교개혁 그리고 칼빈의 종교개혁과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다.
그리고 교회 내부에서의 종교개혁은 가톨릭종교개혁 (Catholic Reform) 또는 반동종교개혁 ( Counter- Reformation)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반동종교개혁이란 용어는 개신교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교회개혁운동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을 단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발해서 일어난 방어적이며 부정적인 운동으로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관계없이 그 이전에 가톨릭내에서 일어나 성장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러한 개혁운동의 결과가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의 결정이라는 사실로 보아 최근의 학자들은 긍정적 의미의 가톨릭교회 쇄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반동종교개혁이란 용어도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 또한 쇄신과 개혁의 의미가 큰 차이가 없으며 교회의 세속화 경향을 개혁하였으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란 말은 프로테스탄트(반란자)란 말과 같이 임의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근거에서 유래되었다고 노트르담대학의 오브라인 박사는 말하고 있다.
즉 그는 루터의 심한 독설과 이에 대한 요한 에크의 맹렬한 반박연설을 반영시키고 있으며 또 이러한 반박연설에서의 고도의 흥분과 열광 그리고 증오의 격렬한 종교적 논쟁은 당시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이란 용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만국백과사전에서는 ‘개혁’은 혁명이라고 해야 오히려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서는 종교개혁이란 말은 16세기의 종교적 정치적 혁명이며 그 직접 성과는 서유럽 가톨릭교회의 부분적 분열과 각종 국교와 지방교회의 설립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이라고 프로테스탄트 역사가인 코베트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톨릭측에서는 개혁은 있었지만 이는 교회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지 이른바 개혁론자가 말하는 루터나 츠빙글리 및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적 그리스도교회의 굳은 단결을 분열시켰고 많은 교파로 혼란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측의 이론(異論)도 제기되었겠지만 논쟁에는 으레 찬반의 견해가 있기 마련이며 진리는 변함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사실이 규명될 것이고 현대에 와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주장에 대해 현대 학자들간에는 일반적인 일치를 보고 있다. 즉 컬럼비아대학의 로빈슨 교수는 종교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가되어 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역사가인 찰스 리어드는 루터의 반역을 야기시킨 동기는 그것이 원인이던 근인이던 간에 모두 영성적(靈性的)이라기보다 더욱 세속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종교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란 것이 있기도 하였으나 사실 종교적 개혁이란 종교개혁이 목적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를 입증하는 것으로 루터의 ‘독일 귀족에 고함’이란 소책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내용에 의하면 종교문제보다 당시의 사회, 경제, 교육, 사업 및 일반적인 도덕문제를 주로 취급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루터와 동시대인인 후텐은 이 책자를 순속서(純俗書)로 간주하여 너무나 종교적 열성이 결여되고 세속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교회의 교의(敎義)와 관련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프로테스탄트 저자들은 16세기초의 교회상태를 절망적인 암흑기로 묘사하고 루터를 광명의 사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찬미하며 종교개혁은 당시의 부패와 오류를 타파하고 미신과 무지로부터 이성과 계몽의 승리였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당시의 교회가 그렇게 절박하게 세속화 되었던 것은 아니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방적인 상황판단으로 객관성의 결여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당시 로마교황인 레오 13세는 개혁론자들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바티칸 도서관 문을 개방하여 가톨릭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바티칸 도서관장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정확한 통찰과 공명정대한 감정(鑑定)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교황의 조처이며 진리는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가톨릭측의 주문이기도 하다.
물론 논쟁에는 시각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언젠가는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지는 것이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왜곡은 그 빛이 오래가지 못하며 많은 사료의 입증은 진실이 그대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종교개혁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당시 교회의 세속성을 불러일으킨 사회상의 배경을 이해해야 하며(다음호에서 밝힘) 곁들여 언급할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적 세계국가 건설의 목표에는 군주와 제왕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발전의 도전을 받고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변화는 종래의 교황 권위가 약화됨과 동시에 세속화의 현상은 교회내부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도전도 없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下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순탄하지만은 아니하였다. 때로는 외부로부터의 침략도 극복해야 했고 내부로부터의 저항세력과도 싸워야 했다.
뿐만아니라 부정과 부패도 있었고 이들에 대한 단죄와 뜻있는 자들의 개혁과 쇄신도 뒤따랐으며 그늘진 사회의 한쪽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2천년이란 오랜 그리스도교의 역사과정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 이슬람교와의 대립을 통한 십자군운동이란 역사적인 대사건, 그리고 16세기의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통한 많은 교파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괴로운 역정을 교회도 밟아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역경의 배후에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종교개혁은 내,외적인 많은 요인은 물론 시대적, 역사적 제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는 ‘교황과 교회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내용만 있을 뿐 배경설명이 없어 학생들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도 많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내용설명 여하에 따라 학생들의 수용이 다를 수 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부 세속화된 실상을 그대로 살펴보고 그러한 요인과 배경을 알아봄으로써 종교개혁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중세를 통해 초국가적, 국제적 기능과 권위를 발휘해 왔던 가톨릭교회는 십자군 운동의 실패와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의 유수(幽囚)와 교회의 대분열, 그리고 교권(敎權)과 황제권(皇帝權-王權)의 대립의 격화로 로마교황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더욱이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국가의식의 발달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인류적 세계국가 건설은 시대적 역사조류에서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발전상 우리들의 현실사회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다.
그런데 당시 교회가 원천적으로 모두가 세속화된 것은 아니며 일부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 개혁운동의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 성직자들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으니 지탄의 화살이 교회로 돌아감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개혁의 배경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쟁점으로 남아 있다. 많은 교회 역사가들이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였지만 아직 그 합일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의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개혁의 배경을 정치적 상황과 윤리적 사실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전자인 정치적 상황은 왕과 지방관리 제후들의 권위적 태도와 물질적 욕망을 들고 있으며, 후자인 윤리적 사실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일부 고위성직자들이 탐욕으로 정치권력을 얻으려(당시 교회도 제후역할의 위치에 있었다) 한 사실들을 들고 있다. 또한 개신교 학자들도 정치적 원인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적합한 생활을 강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역사가들은 인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회경제적 요인을 중요시하여 종교개혁을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태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 또는 결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는 현대 역사가들과 어느 정도 공통된 역사해석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가톨릭과 개신교, 비그리스도교의 역사가들은 모두 세속적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종교적 배경을 더욱 강조하려고 하는 실정이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진지한 개혁안을 갖고 있었는데도 역부족이었다. 그의 고결한 심정은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뉘른부르크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치스코 치에레가티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훈령은 국회에서 공개되기도 하였다(1523.1.3.) 요약하면 교회분열의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며 반성을 촉구하고 쇄신을 강조하였다. 후일 바오로 6세(재위:1963-1978)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2회기 개막식(1963.9.29.)에서 종교개혁에 의한 교회의 분열은 신구교 모두의 책임이라며 화합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당시 주교직도 봉건제도의 구속이 강하여 세속성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극도로 이기적인 귀족이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를 조직하여 그들 중에서 주교를 선출하였으며 선출된 주교는 다시 귀족에게 예속되고 그들에 대해 의무를 지게 하였다. 당시 제네바시가 프로테스탄트화 한 것은 그곳 주교가 사보이 주(州)의 군주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도시, 교구, 지방 등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가 있었다. 주교좌 성당과 사유성당 참사회의 고위성직자들도 비슷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들도 인접한 귀족들에게서 친족정치의 압력을 받아 교회시설은 귀족의 부양기관이 되었으며 그곳 생활은 귀족정신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특히 하급 성직자들의 생활은 가난과 비참이 따를 뿐이었다.(아우구스트 프란젠의 ‘교회사’ 참조)
이러한 당시의 교회상황은 교권의 약화, 왕권의 강화라는 국민국가 건설의 시대적 역사조류가 세속화를 재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종교개혁 전의 니콜라오 5세(재위:1447-1455) 이래 종교개혁 당시의 레오 10세(재위:1513-1521) 사이의 역대 교황 중에서도 훌륭한 교황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탄의 대상이 된 세속화한 교황도 있었다.
즉 니콜라오 5세와 비오 2세(재위:1458-1464), 식스토 4세(재위:1471-1484)와 같이 존경받은 교황도 있었으나 인노첸시오 8세(재위:1484-1492), 알렉산데르 6세(재위:1492-1503) 처럼 세속성이 강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교황도 있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인 레오 10세(재위 : 1513-1521)는 예술과 문화의 인물로 자애롭고 결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세속성이 없지 않아 당시의 개혁론자인 포이히린, 에라스무스 후텐등의 경종의 소리를 외면하였다는 평도 듣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10분의 1 세 징수를 통한 교황권의 행사(항의출현)와 대사문제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회내적인 요인과 12,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사회경제적인 요인이 종교개혁의 발단을 재촉하였다.
즉 당시의 상업과 도시의 발달로 중세말의 유럽사회는 경제적으로 도시와 지방 사이의 빈부차가 극심하였다.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전통적 윤리관이나 고리대금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물욕에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금의 부를 가져왔고 배금사상에 젖어 황금의 위력은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후일 교황청 건축기금 염출인 대사에 대한 참된 신학적 의미를 외면하고 오랜 교회의 권위로부터 탈출하려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변화를 요구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의 요구는 발달된 독일의 남부지역보다 낙후된 북부지역에 더욱 확산되어 지지를 얻었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앞에서 언급한 교황의 권위상실과 왕권강화(세속성의 발로)로 오랜 중세를 통한 교회의 전통적 인습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루터의 개인적인 성격과 사상 그리고 신학에 있어서 교회생활과 연결되지 못한 원인도 배제할 수가 없다.
즉 신학이나 교리가 성서구절의 인용이나 학문적인 견해의 나열과 같은 단순한 지식전달보다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방법을 일깨워 주는 지혜의 부족에도 아쉬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문제를 모호하게 만든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唯名論)과 영혼이 직접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신비신학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엑크하르트, 그리고 인간의 절대가치를 주장한 반그리스도교적인 인문주의 운동이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의 내적, 외적 제요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몇가지 반성의 단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종교개혁이 구원문제에 바탕을 둔 운동이기는 하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시대적 역사조류에 대응함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국민국가, 제후국가, 자유도시 등의 발전에 따른 교회내적 쇄신이 선행됐어야 했다. 그리고 인노첸시오 3세(재위:1198-1216)이래 보다 강력히 주장되어 오던 교황의 제국주의적 요구로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는 사회상을 외면하였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과 청빈을 설교하면서 부유하였다. 수도원은 언제나 청빈을 이상으로 했다. 중세후기 프란치스코회는 그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수도회는 그러한 청빈성을 이탈하는 수가 많았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에 개인주의가 이탈리아로부터 전해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통해 지식인들에게 침투되고 있었는데 교회는 오직 공동체만을 강조하고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여 스스로의 개혁을 선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기존 교회의 성직제도에 도전한 개인주의는 육체적 자유가 아니라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게 되자 하층계급은 이것을 사회경제적 용어로 바꿀 수 있었고 실제로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에 의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중개하는데 그들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기존교회 조직을 비판하였다. 요셉루츠는 종교개혁을 교황권에 대한 비성직자층의 반란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개혁초기 교황에게 보낸 루터의 서신에는 “나는 교황이 가그리스도인지 가그리스도의 사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라고 쓴 부분이 교황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지만…. 어쨋든 종교개혁은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초래하였고 루터는 불행한 과오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루터 이전의 개혁론자들의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게 하였다. 후일 종교개혁의 과격파들조차 과거의 ‘훌륭한 옛시대’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재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사학가의 말대로 그렇게 몰락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아니었으며 사태의 미연의 방지(쇄신)도 중요하였고 사후의 수습도 좀 슬기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다만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교회의 분열이 안타깝기만 하다.
(조경래교수, 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