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문화와 교회의 역할
by 조경래(前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언제나 그 시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사상이 있었고 때로는 그 시대를 주름잡는 중심인물이 나타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분야의 발전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한 사상과 인물은 짧은 당대에 그 역할이 끝나 역사의 뒤안길에 영원히 사라지기도 하고 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빛이 더욱 빛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렇게 성립된 문화는 나름대로 고유성을 띠면서 민족문화를 형성하기도 하고 한 시대문화를 형성하여 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본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서양의 중세문화는 후자에 속한 것으로 굳건한 그리스도교 사상이 중심이 되어 로마제국의 멸망 후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고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영도하였으니 당시의 교회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다시말하면 서양 중세사회의 정신적 활력소가 된 보편적 그리스도교 정신이 그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지도이념과 문화는 세계적, 인류적 보편성을 띠지 않으면 오래 지탱할 수가 없다. 즉 당대인의 감각과 생활에 알맞고 정신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문화가 아니고는 유지, 발전할 수가 없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사가, 현대문명비평가)인 도오슨(Christopher Dawson)교수는 서양중세는 암흑이고 무가치한 시대가 아니고 어느 의미에서 근대보다 더욱 현대의 세계정세와 흡사한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게르만(German)과 노르만(Norman)의 민족이동을 통한 혼란한 사회와 미개한 그들을 개종케 하고 유럽사회를 안정케 한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말로 해석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방향감각조차 바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문명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교회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과 대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정신은 서양중세 사회만을 바르게 인도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그 빛이 더욱 빛나며 현대 사회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으니 그 위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서양 중세사회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어떠하였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921년 ‘교회의 사회적 역할(Le role social de L’eglise)’이란 책자를 발간한 프랑스 파리대학의 쉐농(chenon)교수는 가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세계문화 발전에 얼마나 공헌하였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 저서는 30년간의 오랜 연구 결과라는 점에 무게가 있지만 고금의 많은 사료와 반(反) 가톨릭 학자들의 논란공격(論難攻擊)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씌어진 책자라는 데 더욱 무게가 있다 할 것이다.
쉐농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서양문화에는 강고한 그리스도교적 정신문화가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으므로해서 난숙한 물질문화의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세계문화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쉐농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며 현대문명 비평가인 도오슨(Dawson)교수도 그의 저서인 ‘유럽의 형성(The making of Europe)’에서 “서양중세는 한마디로 말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시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와 문화는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유럽문화 형성에 큰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서양중세는 그리스도교적 세계라는 이름의 사회적, 종교적인 통일체가 육성되어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윤리 그리고 지성(知性)이 점차 유럽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서양중세 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 신앙 뿐만 아니라 지식의 영도자, 고전문화의 보존과 도덕성의 앙양, 근로의 신성성, 평등의식의 고취 등 서유럽 형성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하나의 국제국가, 국제왕국으로서 초국가로 군림하여 당시의 국제사회의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교회도 법률, 입법자, 법정 및 법률가가 있었고 13세기에는 교회가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중세후기에는 교회법이 전유럽의 공동법으로서 제법률로 인정되었다. 또한 가톨릭 법률은 일정한 시일내에 교회와 화합하지 않고 파문 처벌된 자는 역시 국가에서도 공권을 상실한 자로 취급받아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그래서 제왕도 파문을 받으면 국민들에게 왕의 구실을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부터 처벌받은 이단자가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국권에 의해 새로운 재판을 받을 필요없이 사형이 집행되었다. 즉 교회법은 국법의 상위에 위치하여 그리스도교적 사회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중세사회에서의 지식계층은 성직계급 이외는 별로 없었으므로 자연 성직계층이 의원 또는 행정관으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민회의에 출석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에서는 반대로 왕국과 그밖의 세속적 권력자가 교회의 제회의에 참가하였다.
특히 당시 문화활동의 중심은 교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제도의 가장 중대한 의의는 학문 특히 고전문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빈민구제, 병자의 간호, 약자의 보호, 사회교화, 지식보급, 복음전파 등 국가기능의 수행이다. 따라서 당시 교회는 문화활동의 중심지로서 교육, 사상, 문학, 예술, 도덕, 풍속 등 그리스도교의 교의(敎義)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은 기도와 명상생활을 통하여 학문연구와 자립생활을 근본정신으로 근로의 신성성을 고취하여 노동은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 중세 경제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정신 세계를 바로잡고 오늘날 서양문화 발달에 산실 역할을 하였다.
또한 최고 지식을 양성하는 대학도 교황의 특허를 얻어 교회내에 설립하였다. 교수들은 성직록을 받고 있는 성직자들이었으며 12세기부터는 수도원 부속학교로 대학이 발생하였다.
대표적 대학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사래르노(Salerno)대학, 보로그노(Bologno)대학, 프랑스의 파리(Paris)대학, 영국의 옥스퍼드(Oxford)대학 등이 있다. 이들 대학들은 모두가 700-800년의 역사전통을 자랑하고 지금도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당시 대학들은 교황이나 왕으로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으며 학생들도 특별대우를 받았고 대학은 각기 특성을 갖고 있었다. 즉 사래르노 대학은 의학으로 유명하였고, 보로그노 대학은 법학,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특히 파리대학은 노틀담 교회의 부속학교로 출발하였는데 당시 프랑스가 낳은 매혹적인 철학자인 아벨라드(Abelard)와 이탈리아 출신인 파리 주교 롬바르드(Lombard)등과 같은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명강의는 많은 군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중세 초기의 학문은 교부철학(敎父哲學)이 중심이었고 후기에는 스콜라(Schola)철학이 중심이었다. 초기의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란 말이 있듯이 철학과 신학은 별도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철학은 신학체계에 동화되었다.
교부(敎父)라 함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를 지칭하였는데 신국론, 고백론, 삼위일체론을 저술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간은 원래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나 아담이 죄를 범한 때부터 원죄를 얻어 그 죄는 신(神) 즉 그리스도에 귀의(歸依)함으로써 구제된다고 하여 교회 밖의 구원은 없다는 중세철학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신에게 절대 복종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는 지상에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역사는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대립으로 지상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보다 우월하다는 교의와 권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신학체계를 마련하여 플라톤 내지 신플라톤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여 중세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중세후기 학문을 대표한 것은 스콜라 철학으로 교회와 부속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는 9세기 예루게나(Eriugena)에 의해 창시되고 안셀무스(Anselmus), 아벨라드(Abelard) 등에 의해 발전되고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대성되었다. 특히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중세철학의 집대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신앙과 지식의 타협을 시도하여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신학의 과학성을 강조하여 명목론(名目論, 이성의 선행)과 실재론(實在論, 신앙의 초월성)의 조화와 합일을 이루어 놓았다.
또한 중세문학 역시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였다. 특히 민족고래의 신화와 전설, 영웅의 사적을 노래한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의 민족적 서사시인 ‘니밸룽겐(Nibelungenlied)의 노래’와 기사문학으로는 영국의 전설상의 지배자 ‘아더왕의 이야기’와 찰스대제의 영웅담인 프랑스의 ‘로랑의 노래’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에는 라틴어로 씌어지고 작자도 교회관계자가 대부분이었으나 후기에는 차츰 속어(俗語)로 씌어져 기사(騎士)의 모험이나 연애를 주제로 하는 기사문학이 성행하였다.
예술방면에 있어서도 교회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교회건축이 중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바시리카, 중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였고 후기에는 고딕양식이 중세 건축을 대표하였다.
이는 천국을 바라보는 중세인의 종교적 동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미술도 교회내부의 공간을 장식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색채유리에 의해 더욱 효화를 표현하였다. 조각 역시 교회를 장식하는 기교에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서 문화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참된 문화활동의 중심지로서 국가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였다. 참으로 교회는 사랑의 정신의 구현자로 군림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교회에 협조하였고, 교회는 제국간의 분쟁을 조절하고 인도하면서 초국가적인 국제국가로 중세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많은 시련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당시의 세속적 발전에 따른 시련의 극복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신앙정신이 있었기에 시련의 극복이 가능하였으리라 믿는다. 따라서 그러한 시련의 과정에 있어서 일부의 세속성만을 탓하여 교회의 전세성인양 유도 평가하려 함은 그릇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로 서양 중세 문화 발달에 교회는 크게 기여하였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빛은 더욱 빛나고 있으며 정신문명의 고갈로 방향감각조차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중세사회를 이끌어간 교회의 역할이 요청되는 바이다.
십자군 운동
프랑스 과학원의 모리슨은 그의 저서 ‘십자군의 연구'(Les Croisades,1969)에서 십자군 사상은 ‘예루살렘 순례’와 사라센(이슬람)인에 대한 ‘정의의 싸움’이란 이론과 그 실천이라고 설명하고 이 두개 전통의 합류에서 십자군운동이 발생하였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 성지인 예루살렘의 순례는 7세기 이래 그리스도교회법상의 속죄로 간주되어 하나의 전례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9세기 중엽부터 프랑스 귀족들의 순례관습이 일어나면서부터 확대되어 10세기말부터는 크게 성행하여 지중해 지역에 평화의 사도역할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십자군운동을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방의 이슬람세계와의 대립이 낳은 서양중세의 최대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많은 변질을 초래하였다.
사실 십자군운동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심에서 우러난 성지회복에 목적을 둔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식에서 발생하였다. 즉 이교도인 이슬람 터키의 예루살렘 정복으로(1071) 순례자들에 대한 박해와 유적의 파손이 그리스도교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당시 터키의 침략을 받은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재위:1081-1118)가 1090년 서유럽제국의 도움을 얻고자 노력하였고 1095년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위기에 처하자 로마교황청에 정식으로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당시 로마교황인 우르바노 2세(재위:1088-1099)는 분열된 동방교회와의 재일치의 희망도 있고 하여 피아첸자공의회에서 동방교회의 보호를 호소하였고 이어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남부의 클레몽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통한 성지회복을 역설하였다.
또한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서(루가 14, 23)에 근거하여 이단을 박멸하는 데 있어서 무력사용을 호소한 이론인 ‘Campelle intrare’ 학설을 내세워 방어적 전쟁을 합법화하면서 준수되어야 하는 윤리 및 종교적 원리로 제시한 것을 교회는 무력사용을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과거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도전하던 절대세력에 대항하여 군대를 소집하던 임무와 권한이 세속군주로부터 교회로 이관되어 교회는 전쟁을 수행하는 새로운 핵심세력이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교황은 서유럽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적을 제거하는 성전을 포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제여건들은 십자군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당시 로마교황청은 교권과 제권간의 대립을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고 또한 이교도(이슬람)와의 싸움에 집중시킴으로써 교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동로마제국의 지원요청에 응하여 동방교회에 대한 우월권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원정은 국왕, 제후 기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는데 이들은 각기 목적을 달리하고 있었다. 즉 당시 정체하기 시작한 봉건사회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의 필요성이 요청되었고, 상인들은 동방무역에 대한 탐욕에서, 농민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코자 하였다.
이렇게 각기 이해타산이 다르게 참여한 것이지만 교통의 불편과 원거리, 미지의 세계, 그리고 이교도들의 저항을 극복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열광적인 신앙심이 뒷받침되었지만 평신도들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관심과 사죄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신심은 교황청의 십자군 전대사(全大赦)의 반포를 통해 십자군운동의 참여라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십자군의 참여를 구원의 보장으로 생각하였고, 성전(聖戰)에서 희생된다는 것은 곧 순교로 높이 평가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정열에서 우러난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동사업에 입각하여 출발한 십자군운동은 1096년부터 1270년의 오랜 기간을 통하여 전후 8차례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한때 성지회복이 실현되었지만 곧 반격당하였고, 원정 도중에 비그리스도정신인 약탈과 살육 등으로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피아첸자 및 클레몽공의회를 주재하였는데 주로 성직자 규율문제에 대한 토의였다. 1095년 11월 18일 부터 9일간에 걸쳐 채택된 클레몽공의회 결의 사항은 성직자의 세속권력에 의한 서임(敍任)과 성직매매죄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하달하여 피아첸자공의회의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결의 사항에 2개항목이 직,간접적으로 십자군운동과 관계가 있었다.
그 첫째가 ‘하느님의 평화'(Paxdei, 10세기말 이래 교회의 제창에 의해 봉건무사계급의 개인적인 투쟁을 금지할 목적으로 행해진 평화운동) 문제로 지금까지 지방적으로만 행해지던 것을 교회관구에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순례에 속유(贖宥)를 부여하는 약속으로 예루살렘의 하느님 교회를 해방하기 위해 출발하는 모든 이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몽공의회의 폐회에 즈음하여 시교외(市郊外)에 운집한 성속(聖俗)의 대군중 앞에서 설교하였다. 그 중요한 사항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불행을 생각하고, 서유럽 동포간의 싸움을 경계하고, 상호 증오(憎惡)를 잊고 이교도와 싸워 동방의 형제들을 해방하기 위해 결속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교황은 순례자들이 순례도중 노상에서의 어려움(苦行)을 설파하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태 16, 24)는 말을 인용하여 순례자들의 희생을 상기시켰다.
또한 교황은 조직적 전력(戰力)을 가진 원정대에 편성된 기사(騎士)들을 격려하면서 경솔한 열광으로 발생하는 사태를 제한 방지하려 하였다.
또한 성직자는 직속상관의 동의없이 출정할 수 없으며, 일반 신자는 성직자의 동의하에 출정하여야 하고 젊은 남편은 아내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한번 서약한 자는 파(破)할 것을 불허하고 위반자는 파문한다고 원정에 앞서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당시 이교도에 대한 종교적인 정열, 그리스도교의 공동사업이란 신앙심, 군주와 제후들의 목적의식이 다른 원정, 세속적이고 물질적(동방의) 욕망에 젖은 시민계층, 과격한 기사들의 충동력,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민들의 돌연한 출발, 순례과정에 있어서의 교통의 불편과 식량난 등 고행(苦行)의 순례자들에게 질서있는 원정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때로는 비그리스도교적 행동을 유발케 하였다.
제1차 원정(1096-1099)에 있어서 지도자 없이 구성된 농민군은 원정중 유대인과 동로마제국의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황제가 이들의 원정을 막음으로써 대부분 희생되고 일부가 아미앙의 은수사 베드로의 지휘를 받아 소아시아에 도달하였으나 터키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기사들로 구성된 조직적인 십자군은(주로 프랑스, 이탈리아의 제후와 기사, 다수 민간인) 여러 통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고 여러 제후들의 지휘아래 악전고토끝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여(1099.7.) 지중해 동해안에 예루살렘왕국(1098-1187)과 3개의 봉건제후령을 세웠으나 원정도중 파괴와 참살의 자행은 십자군 원정의 성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제2차 원정(1147-1149)은 예루살렘왕국이 터키의 공격을 받자 신성로마황제와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연합하여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1187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잃었다.
제3차 원정(1187-1192)은 터키령의 이집트제후인 사라딘이 예루살렘왕국을 멸함으로써 영,독,불의 군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으나 내분으로 성지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화해로 그리스도교도의 평화스러운 예루살렘 순례가 보증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의 원정이었다. 그런데 이 원정은 교황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유도되어 동로마제국을 멸하고 여기에 라틴제국(1204-1261)을 세웠다. 이들 원정군의 난폭한 행동과 약탈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조장시켜 재결합을 불능케 하였다.
이는 서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교황의 체면을 잃게 하고 십자군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 터키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제5차 원정(1219-1221)도 상혼(商魂)에 의해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으나 전리품(戰利品)의 분배 분쟁과 지도자의 무능으로 이슬람교도에게 회수되고 말았다.
제6차 원정(1228-1229)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지히 2세가 일으켰는데 전투없이 이슬람교도의 내분을 이용하여 외교수단에 의해 10년간 휴전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쪽 일대를 그리스도교인의 수중에 넣어 스스로 예루살렘왕이 되었다. 그러나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어 제7차 원정(1248-1254)은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주도하에 적의 본거지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병력약화로 패하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가 후에 인질대금을 지불하고 석방되는 창피를 당하기도 하였다.
제8차 원정(1270-1272)은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주도하에 또다시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를 공격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유행병의 만연으로 실패하고 또 왕도 병사함으로써 끝났다. 그밖에 1212년에 소년소녀십자군(불,독에서 수천명) 원정이 있었는데 이는 사기꾼들에 의해 잔인하게 악용되었고 중도에서 해산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악덕한 선박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성지회복이란 서유럽 그리스도교도의 공동사업으로 추진된 십자군운동은 비록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잘못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면의 대변질을 초래하였다.
로마교황청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호소는 국경을 넘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단결시켰고 제1차 십자군운동의 성공은 당시에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문제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간에 각축을 벌이고 있던 상황 속에서 교황의 권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군운동은 평신도들이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구현한 운동이었다.
다른 한편 원정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추락과 원정에 참여한 봉건제후들의 몰락으로 서유럽 특히 영,불에 일찍이 군주국가를 출현케 함으로써 후일 그리스도교세계를 분열시킨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의 공동체 의식을 크게 강화하였고 유럽의 시야를 확대하였으며, 비잔틴과 동방 특히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오늘의 서양문화의 통일체를 마련하였다. 뿐만아니라 1백여년간이나 그리스도교 세계를 위협하던 이슬람세력의 유럽진출을 저지하였고 교세확장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황청은 분열된 동방교회와의 접촉을 통해 재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제4차 원정에서 교황의 뜻과는 달리 이기적인 상인들에게 이용되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라틴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동서교회의 재결합이 희망을 잃게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십자군운동은 본래 순수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성지회복을 통한 순례의 보장이란 공동사업이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잘 훈련되지 않았고, 비조직적이고 또한 오랜 원정이었고, 멀고 험난한 고행길은 신앙심을 가지고서도 극복하기 어려웠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십자군운동의 성격과 의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동서간의 사회상과 십자군운동을 통한 유럽의 대변화를 외면할 수가 없다.
즉 정치적으로는 군주권의 강화로 중앙집권의 길을 열어 절대군주권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동서문물의 교류로 풍요로움을 가져왔으며, 도시발달과 더불어 활발한 상업활동은 자유정신을 고취하기에 이르렀고 로마멸망 후 3대문화권의 접촉과 통합은 오늘의 서양문화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경래(前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