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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종교개혁 배경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해 고등학교 세계사 각급 교과서에서는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영국 종교개혁의 발단은 신앙교리의 상이(相異)에서가 아니라 헨리 8세(재위:1509-1547)의 이혼문제와 그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사적 시대조류와 정치적 국민감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프로테스탄트적 교리의 일부를 수용하고 가톨릭의 전통적 전례의식을 가미한 신구양교의 절충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가톨릭측에서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어서 교과 담당 교사의 설명 여하에 따라 학생들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란에서는 좀더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 개혁과정의 실상과 그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교의(敎義)의 변화없는 종교개혁으로서 당시의 국민국가 건설에 따른 시대적 역사조류와 정치 및 사회경제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론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발단이 되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늘의 영국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영국교회를 성공회(聖公會)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니체아 종교회의(325)에서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로 하고 부(父)인 신(神), 아들 예수,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오파를 정통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만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결정하여 교의를 통일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교회에 관한 내용으로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적인 교회’라고 한 표현을 빌려 성(聖)과 공(公) 두 글자를 합하여 성공회라고 한 것이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이단적 종교개혁을 싫어하였다. 즉 ‘칠성사(七聖事)의 옹호’를 써서 교황 레오 10세(재위:1513-1521)로 부터 신앙의 옹호자란 존칭까지 받았다.

이러한 그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은 전술한 배경도 크지만 그의 다혈적인 정욕(情慾)을 억제하지 못하고 6명의 왕비를 교체한 이혼문제로부터 발단되었다.

헨리 8세는 젊고 아름다운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할 목적으로 왕비인 가타리나와의 이혼을 제기하였다. 가타리나는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스페인의 왕인 칼 5세(재위:1519-1556)의 숙모이자 헨리 8세의 형의 미망인으로서 교회법상 이혼이 불가능하였다.

결혼 18년간 후계 왕세자가 없음이 이혼 사유로 토마스 울지 추기경의 교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 1523-1534)의 불허로 실패하였다. 이때 울지는 실패의 책임을 물어 단죄(형집행전에 사망)되었으며 헨리 8세는 당시 교황에 대한 국민감정이 나쁨을 이용, 의회를 통한 승인을 결심하였다.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1489-1558)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제상 토마스 크롬웰(1485-1540)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529년 가타리나와의 이혼성립을 승인케 하였다. 이후 영국의 종교개혁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교황청에 대한 금전납부의 금지(국민지지 얻음), 수도원 해산을 통한 토지와 재산의 몰수, 가타리나와의 결혼무효선언과 앤 볼렌과의 결혼승인(1534), 수장령의 발부(1534) 등으로 영국교회는 사실상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물론 교황청은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고(1534.7), 교회는 국가에 종속되었다.

부언할 것은 헨리 8세는 6명의 부인을 교체하였는데 2명(볼랜, 하워드)은 처형되었고, 2명(가타리나, 앤)은 이별하고, 1명(시모어)은 출산시 사망하고, 1명(파)은 단죄되었으나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다.

헨리 8세는 1536년 영국교회의 교리 및 예배방식의 기준이 되는 ’10신조’를 공포하였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가톨릭의 중용적 입장을 택하였는데 멜란히톤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이로 인해 성직자에 대한 포고가 국왕에 의해 행해졌으며 모든 교회는 라틴어 성서 대신 영역서가 채용되고 꼭 비치할 것을 훈령하였다.

그후 틴달 및 마일즈 커버데일 번역의 성서 개정작업이 진행되어 1539년 대성서로 간행되었다. 이때 ‘순례자의 반란’의 영향과 칼 5세와 화해의 바람 등으로 ’10신조’보다 훨씬 후퇴한 ‘6신조’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에드워드 6세(재위:1547-1553, 헨리 8세의 셋째 부인 시모어의 아들)치하에서 교회내부의 신앙상의 혁신이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 작업은 왕의 연소로 서머셋(1506-1552)공의 섭정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

즉 1547년 의회에서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함께 사용할 것을 제정하였고, 1539년에 제정된 ‘6신조’의 폐기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어 복음주의 운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해로 자유를 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유를 회복하고 외국에 망명한 신교도 및 외국의 신교도가 많이 영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마터, 녹스 등의 저명한 신학자가 초빙되어 개혁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549년에는 성직자들의 결혼생활이 인정되었고 예배통일령이 공포되었다. 이는 크랜머가 편찬한 ‘일반기도서(C.P.B.:Common Prayer Book)’로 예배, 의식, 전례 등을 엮어 놓은 것으로 영국교회의 예배형식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법으로 제정되어 라틴어가 아닌 영어 사용이 규정되었다. 그후 크랜머가 학자들의 힘을 빌려 프로테스탄트적 색채가 깊은 내용으로 개정하여 1552년 제2기도서로 발간하였으나 외형은 여전히 보수적인 가톨릭적 색채가 농후하다. 이 기도서는 엘리자베스 때 새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1562) 영국교회의 기본적인 기도서로 각국의 사정에 맞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1550년에는 교회내의 성화상(聖畵像)이 철거되고 이어 단식도 폐지되었다. 1553년에는 ’42개 신조’가 의회에서 공포되어 영국교회의 기초적인 신조가 되었으며 이는 1563년에 대폭 개정되고 1571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1553년 에드워드의 사망과 더불어 모든 프로테스탄트적 개혁은 중단되고 메리(재위:1553-1558)가 즉위하자 가톨릭화로 에드워드 6세 치하의 법률이 폐기되었다.(메리는 헨리 8세의 첫째 왕비인 가타리나의 딸)

1554년에는 신교박해를 위한 법률이 부활되었고, 1555년에는 헨리 8세의 치하의 교황 반대 법률도 철폐되었다. 이때 교황 바오로 4세(재위:1555-1559)는 영국에 있어서의 과거의 교회재산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의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메리는 1554년 칼 5세의 요망으로 국왕의 아들인 필리페 2세와 결혼하였는데 영국민의 불만이 많았다.

메리 치하에서의 가톨릭정책으로 많은 영국교회 목사가 교구로부터 추방되었는데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였고 국외 망명자도 많았으며 단죄자도 많았다.

대표적 인물로 켄터베리 대주교인 크랜머를 비롯하여 런던대주교 리들리, 우스타 주교 라티머 등으로 영국교회의 첫번째의 수난이었다. 이어 메리 사망 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즉위하자 영국교회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엘리자베스는 엔 볼랜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국가 통일의 입장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타협을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영국의 독자적인 감독교회제도의 확립이다. 그는 1559년 의회에 헨리 8세보다 온건한 수장령을 승인케 하여 영국유일의 지상의 지배자임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고 의원, 관리 등 모든 성직자도 수장령에 따른다는 서약을 해야만 하였다. 이때 서약 거부자도 많았는데 당시 약 8천명의 성직자 중 약 7백여명이 성직지위를 상실하기도 하였다.

1559년에 ‘예배형식통일법’이 전술한 바와 같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42개조가 39개조로 개정되었고 1571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현재까지 영국교회의 신조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배경에는 시대적 역사조류와 정치적, 사회경제적 제요인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헨리 8세의 이혼문제는 하나의 표면적인 이유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로마 교황의 강력한 권위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교황의 권위약화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국민감정이 배후에서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 사회경제적 변화는 자연 시민계급의 성장을 재촉하였고 농민들의 지위향상은 사회계급의 분화를 촉진하고 특권층에 대한 대중의 불만도 함께 일어났다. 더욱이 영국은 유럽에서도 일찍이 국민정신이 확대되어 14세기에 이미 존 위클리프, 후스 등의 개혁운동이 있었고, 15세기에 들어와서도 존 콜렛, 토마스 모어 등과 같은 계몽주의 운동도 전개되고 있었다.

더욱이 영국은 헨리 7세(재위:1485-1509)가 튜더왕조를 개창하면서 절대왕조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교회의 막대한 재산의 소유는 절대군주의 절대권확립에 장해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신앙상에 있어서의 교리문제로 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복합적인 배경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교회 재일치가 논의되고 있으나 너무나 오랜 세월의 분열은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후일 영국이 스페인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1570년 교황 비오 5세(재위:1566-1572)는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1580년부터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엘리자베스 1세(재위:1558-1603)의 재위기간 동안 250여명의 순교자도 발생하였고 영국국교회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교회가 되어 후일 일어난 퓨리탄 혁명에 의해 영국의 참된 종교개혁은 마무리되었다.

조경래(前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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