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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안(Moravia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1736년 1월 25일(주일),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찰스 웨슬리의 선상일기를 소개합니다. 그는 그 당시 신대륙 미국(대영제국의 식민지였음)에 부흥집회를 위해 그의 형인 요한(John)과 함께 범선(돛단배) Simmonds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미국의 조지아 주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가 탄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 파선 일보직전까지 가면서 배 안의 승객 전원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극심한 공포에 빠졌습니다. 웨슬리 형제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거센 풍랑에 마스터(돛대)가 부러지면서 돛이 배의 갑판을 덮어버리자 배는 방향을 읽고 무서운 파도 속에 잠겨갑니다. 마침 그 배에는 몇몇 모라비안 가족들이 타고 있었는데,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저들은 놀라우리만치 평온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상황에서 그 배에 탔던 영국인 신자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모라비안 형제들은 평온한 상태에서 시편으로 지어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찰스 웨슬레는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가 모라비안 형제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레가 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아내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 평온함에 웨슬레 형제는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영국과 미국을 뒤흔드는 이 영적 지도자들은 미국에 도착한 후에 그 모라비안 형제들을 초청하여 깊은 신앙의 교제를 나눕니다.
이 영적 거성인 찰스 웨슬리는 이 사건이 있은 후, 개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찬송시를 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388장,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일어 날 때에” 입니다. 2절 가사를 보면 웨슬리의 풍랑에 대한 끔찍한 경험과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고백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Other refuge have I none, Hangs my helpless soul on Thee;
Leave, ah! leave me not alone, Still support and comfort me.
구주의지 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All my trust on Thee is stayed, All my help from Thee I bring;
Cover my defenseless head with the shadow of Thy wing.

이 풍랑사건이 두 신앙의 거장이었던 찰스 웨슬리와 요한 웨슬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저들에게 “제2의 회심의 사건”이라 불리어졌고, 곧 이어서 그것은 영국의 대부흥운동의 촉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이 영국의 대부흥운동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선구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후일 먼 태평양 건너 ‘숨은 은자의 나라, 조선 땅’에 최초로 선교사를 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인간적으로 참 볼품없어 보였던 체코출신/독일출신의 모라비안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자랑하던 대영제국(United Kingdom)이 국제적인 존재감이 상당히 떨어진 체코/독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지에 대해 충분히 상상을 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더욱 놀라울 따름입니다. 모라비안 선교에 대해 말할 때, 이 두 사람을 놓쳐저는 안될 것입니다.
데이비드 니취만과 요한 레온하드 도버
토기장이 출신 요한 레온하드 도버(Johan Leonhard Dober:1706-1766)와 목수 출신 데이비드 니취만(David Nitschman:1695-1772)이 바로 그들입니다. 모라비안 형제들 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을 서인도제도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위해 스스로 노예로 팔려, 독일의 함부르그 항구에서 배를 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땅을 향해 떠나는 그들을 위해, 가족들과 신앙의 동지들은 함부르그 항구에서 손에 손을 잡고 눈물의 작별을 합니다. 그렇다고 대성통곡의 작별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에게 그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있으라! May the Lamb that was slain receive the reward of His suffering! 이라는 찬송을 합창하면서 슬픔 속에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저들을 전송합니다.

지금은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카리비안 휴양지가 바로 St. Croix,와 St. Thomas이지만, 400여년 전 그 당시에는 이 두 섬이 덴마크의 식민지로 오지 중 오지였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도착한 이들 섬에는 영국 노예상들, 덴마크 농장주들이 흑인노예를 잔혹하게 다루던, 백인들에게는 죽음의 섬과도 같았습니다. 이 섬에 도착한 백인 노예를 처음 대한 덴마크 농장주는 적잖게 놀랐을 겁니다.
저들은 최소한의 허름한 거처를 제공받고, 노예들과 함께 농장에서 힘든 노역을 감당하면서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틈틈이 자신들의 손재주(토기를 굽는 일, 목공일 등)를 통해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말입니다. 후일 저들의 뒤를 이어 더 많은 모라비안 젊은이들이 카리브해 여러 섬들에서 비슷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St. Croix, St. Thomas, St. John, Jamaica, Antigua, Barbados, St. Kitts 같은 섬나라에는 무려 13,000여명의 현지인들이 모라비안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섬들의 이름이 왠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 섬들은 바로 현재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크루즈 휴양지로 유명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현재 그런 휴양지에도 모라비안 교회들이 건재하며
지난 400여년 동안 복음을 간직하면서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제가 지난 5월 메모리얼데이에 미국에서 제일 큰 모라비안 교회(Bethlehem, Pennsylvania)를 방문했을 때, 가벼운 충격을 받은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Bethlehem시 중심부에 있는 그 교회는 좌석수 1500석에 웅장한 석조건물이었습니다. 교회의 수석 장로의 설명에 의하면, 그 교회가 지어졌을 당시 베들레헴시의 전체 인구가 1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놀라움에 제가 거듭 확인한 결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의 전체 인구 1000명에 1500석의 교회를 지었던 사람들이 바로 미국의 모라비안 후예들이었습니다. 앞으로 도시가 팽창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지었다는 것이 그 수석 장로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제가 그 교회를 방문했던 주일아침 예배에 약 250명 정도의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고 대부분 백인 장년, 노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흑인 목사님 이었습니다. 매우 열정적으로 설교했고, 회중석에 앉아있던 백인 중산층으로 보이는 성도들은 많은 은혜를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모라비안 교회를 대표하는 그 백인 교회에서 흑인은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 뿐이었습니다.

예배 후, 친교시간에 그 설교자와 담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은 자마이카 출신이며, 가족이 5대째 자마이카에 있는 모라비안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전에 현재 교회 당회로부터 정식으로 청빙을 받아 자마이카 출신 흑인 목사로서 미국의 백인 모라비안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상황으로 바꾸어 말해볼까요?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자신들이 파푸아 뉴기니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금은 그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파푸아뉴기니 출신 흑인 목사를 강남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장로교 미션스쿨을 6년 다녔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학교와 교회가 저의 생활의 대부분인 저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경건’은 주일성수, 공예배 출석, 십일조, 새벽기도, 전도, 혹은 선교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세상에서 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물론 구약에서의 경건(미6:8)과 신약에서의 경건(약1:27)을 모르는 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체코의 존 후스의 후예들인 모라비안들의 삶과 신앙을 보면서, 경건의 출발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상황에 따라 휩쓸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나오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 성공이나 유익보다는 복음이 보여주는 삶이 우선시되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 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대로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신앙의 근간이 경건주의라고 한다면, 지금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끈으로 400여년 전의 독일 경건주의 신앙의 전형이었던 독일의 모라비안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불신자들로 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모라비안들의 경건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글: 박시경박사(그레이스 신학대학원 한국인 디렉터)-크리스천 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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