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해방 이후 첫 선교사 파송과 선교50년사 스케치
-1958년부터,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에서 “국제선교“ 착수
-1960년 보르네오 사라왁 이반족 지도자양성 착수
-1965년 “한국감리교선교80주년 기념”으로 첫 선교사 파송
-감리교 “말레이시아선교50년 기념행사와 MOU체결(2015. 10.7-9)
노 종 해 목사 (말레이시아 선교사)
한국 기독교는 2015년으로 “말레이시아 선교 50주년”을 맞는다.(1965-2015) 말레이시아 연방국이 건립된 1965년, 한국 기독교의 선교 착수도 시작되었다. 아직 정치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말레이시아 연방국가(말련)의 혼돈기에 복음의 발걸음을 내 딛었던 것이다.
1. 보르네오 시라왁 선교 태동기
▲ 여선교회 연합회-볼리비아 선교(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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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말레이시아 선교는 “여 선교회”에서 태동되었다. 감리교 여선교회에서는 1958년부터 국제선교로 “볼리비아”(1958)와 “보르네오 사라왁“(1960) 이반족(Iban) 선교를 착수하여 국제선교를 추진하였다.(여선교회66년사, 1966. p213). 당시는 말레이시아가 형성되지 않은 때로, 세계감리교 여선교회를 통해 “사라왁 이반족”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김활란박사의 주선과 노력으로 전국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매월 해외선교비를 후원하면서 세계선교를 착수한 것이다.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에서는 원주민 이반족(Iban)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역에 전념하였고, 전 여선교회가 참여하였다.
2. 보르네오 사라왁 선교착수 준비기
아시아 각국은 식민지에서 독립하며 국가를 설립하여 국제교류를 역어 나갈 때 자국기독교를 형성하고 복음의 발걸음도 재촉되었다. 미 감리교회(UMC)는 선교정책변화로 선교사파송을 지양하고, “Global Ministry”를 두고, 아시아교회들과의 협력을 모색하였다. 즉, 미 선교사활동 지역에 아시아인을 파송케한 것이었다.
한국감리교회의 말레이시아 선교착수는 미 감리교회가 동남아시아 감리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감리교 아시아 협의회”를 1963년부터 개최하면서 이다. “감리교 아시아 협의회”(1963.11.22-12.3.)는 말레이시아 포딕슨(Port Dickson), 감리교수양관(Methodist Centre)에서 개최하였고, 한국, 일본, 중국(대만),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라야, 사라왁, 싱가폴, 파키스탄 등 12개국 94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한국감리교회 대표는 이환신(감독), 홍현설, 이호운, 김옥길, 윤창덕, 김광우, 마경일, 강석봉, 박신오, 주한 미선교사 등 12명이며, 나원용, 강병훈, 김관련 등이 아시아 선교사명과 책임을 일깨우고, 김광우 목사는 사라왁을 방문하여 “비나땅”을 선교 후보지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선교 착수를 준비하였다.(김광우회고록, 1984. p283)
이호운 목사는 “감리교 아시아 협의회”(1963)의 성과를 5가지로 정리하였다.
1. 기독교 안에 한 형제임을 새롭게 경험, 2. 의존교회에서 자립자치 교회 되어야, 3. 교회마다 새생명과 능력, 멧세지, 복음 확신 필요, 4.교회 간 협력, 5.선교 열이 높아져 선교사업에 깊은 관심이 일어난 것이, “가장 높은 관심이었다.”고 하였다.
3. 해방 후 첫 선교사로 김성욱.이동숙 파송(1965.3.21.)
▲ 보르네오 사라왁 “비나땅”(Binangtang, 현 Bintangor)/* 사라왁 이반족 롱하우스(1960년대) |
한국 감리교회는 1964년 총회에서 “해외선교위원회”를 설치하고, “사라왁선교 결의”하였으며, 중부연회(연회장:김광우 목사)는 “한국감리교선교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를 결의하고, 김성욱목사 이동숙을 “사라왁 선교사”로 선발하여(1964년), 파송(1965.3.21.)함으로 선교착수 되었다. 주택은 미감리교 선교부에서 제공하고, 선교비는 한국에서 미감리교 선교부를 통해 송금토록 협력하였다.(참고-김성욱선교사 선발: “사라왁 선교의 꿈” ,기감;기독교생활 1964.7.16. p2./ “사라왁 선교현황과 전략”,기감: 기독교세계, 1972.6.10., p12.)
중부연회(현, 서울, 서울남, 중부, 경기, 중앙연회)는 정동제일교회(담임; 김광우목사)에서 김성욱목사를 “말레이시아 사라왁 선교사로 파송(1965.3.21.)하였고, 김선교사는 6월 19일에 도착하여, 이슬람권에 복음선교의 깃발을 꽂았다. 김성욱 선교사는 보르네오 사라왁 “바나땅(Binatang, 현 Bintangor) 지방”에 파송되어 원주민인 이반족(Iban) 선교를 중심으로 중국계(화인) 감리교회와 협력하며 착수하였다.
선교사 김성욱목사는 경북태생으로, 만주 북쪽 끝 흥룡강성의 러시아와 접경지역인 가목사(佳木斯, 자무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목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증을 소유한 의사로 해방 후 귀국하여, 중앙신학교를 졸업(1955년)하였고, 이어서 감신대학과 국제대학 영문과도 마쳤다. 또한 서강교회(8년), 석교(1년), 성광(1년) 목회하며 “서대문 보건소장“으로 근무하였고 중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로 사라왁 선교에 절대 필요한 요건을 가진 의사요 목사이니 더욱 최상의 적임자“라 평 받았다.
또한 부인 이동숙(李東淑) 선교사는 이천출생으로,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1952년), 서울YWCA 총무로 근무하는 활동적인 여성 지도자요, 시민운동가였다. 이들 부부는 선교지에서 굳건한 초석을 놓을 수 있는 적임자들이였다.(감리교생활, 제13권, 1964.7.15.)
선교지 사라왁에 도착 후 약 6개월간 이반어(Iban) 공부 하였고, 비나땅(Binatang)지방 책임선교사로 지방 감리사에게 임명받아, 지방감리사와 계속 순회전도 하였다. 사라왁 중.고등학교(Mission School) 교목으로 매주예배인도와 성경공부 가르쳤다.
▲ 김성욱 선교사 파송(1965) |
김성욱선교사는 사라왁 비나당 지방교회 11개, 기도처 3, 유치원 2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2곳을 관할하며 진료소도 설립하여, 전도, 교육, 의료봉사 등의 선교 사역하였다. 또한 眞理堂교회를 신축, 카핏(Kapit)에 유치원 설립하여 예배실도 겸해 신축하였고, 비나땅 감리교 중고등학교 2층, 10개 교실을 증설키도 하였다.
김성욱선교사는 “당시 사라왁 이반족(Iban) 인구는 약 40,000명으로 이반교회 교인은 6개 처와 롱하우스(50-60세대 사는집)에 12,000명이었다. 사라왁 감리교회는 72곳으로(기도처 포함) 중국인 화인교회이며, 중국인 목사42명, 선교사12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이반족 선교상황을 보고했다.
▲ 사라왁 이반족 목사 방문 기념(김광우, 김창희목사 등) |
김성욱선교사는 1차 안식년(1969.12.14)으로 귀국하였으며, 동양선교의 꿈을 가지고 미국 유학하여 석사학위 받았고, 즉시 제2차 선교사 4년 임기로 1971년 6월에 사라왁 비나땅(Binatang)에 다시 도착했다.
선교지에 도착하니 중국인 원로목사들의 별세로 교역자가 부족하여 중국인교회 12곳, 3개 기도처를 돌보며 사역에 분주하였다. 비나땅 지방 15교회 중 목사안수 받은이 3명(감리사 포함), 서리전도사 4명, 성경통신과 22명이었다. 김선교사는 감리사와 비나땅교회들을 순회하며 예배인도, 성만찬, 세례식 등 “무거운 책임을 지고, 무더운 나라에서 쉴 사이 없이 1년 동안 선교활동”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졌다. 의사는 “약 2년 동안 찬바람 나는 곳에 휴양 하라”는 권고하여 잠시 귀국하였으나, 사역지의 행사 때문에 곧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明光堂교회 건축비4,500불(弗)을 모금하여 귀임하여 선교사역에 임하였다.
김성욱 선교사는 <기독교세계>와의 인터뷰에서(1972년) 선교사의 활동과 계획을 밝혔다.
“처음 원주민을 위하여 어학 훈련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15개 이상 교회와 3개의 학교(국,중,고) 유치원, 진료소 등 30여 개 처의 교회와 기관들을 동시에 관할하였다. 그 외에 수10Km의 길도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면서 원주민에 대한 전도 및 교회예배 인도, 학교의 교목 및 성경교사와 각종 강습회 및 수련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학교 이사로써 또는 진료소의 고문으로써 여러 분야에 불철주야로 선교 사역하였다. 특히 교회확장 사업을 보면, 1) 비나탕 교회의 건축, 2) 폐쇄직전의 비나땅 중고등학교 증축, 3) 케사기도처의 유치원 설립, 4) 신전당교회의 개축공사 안공, 5) 현재 明光堂교회 건축위해 애써 선교사업을 하고 있다.(”해외선교 현황과 전략“-기독교세계 1972.6.10. 제17권. p12)
김성욱 선교사의 사라왁 선교 예산소요는 다음과 같다.
1) 1972년도 수입예산
지방부담금-1,954,000원.
개체교회부담금-1,378,400원.
선교주일 헌금 및 회비-200,000원. 계 3,532,400원.
2) 지출예산-
선교사봉급-1,965,600원.(360불x14)
연 구 비-280,000원(60불x12)
사 무 비-140,000원(30불x12)
선교지 집세-273,600원(60불x12)
선교지 공과금-78,800원(200불)
선교사 퇴직금-100,000원
선교사 자녀교육비-300,000원
김선교사는 “앞으로의 계획으로 말레이시아 국법에 의하여 75년도 귀국하여야 되게끔 되어 있어 현재 만광교회의 건축을 끝내고 동양선교사를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교사로써 자격을 갖춘 좋은 후계자를 길러야할 것이라고 하는데 교단에서도 이를 위해 주선을 아끼지 말고 토의해야할 것이다.“고 보고하였다.
김서욱 이동숙 선교사의 임기는 1974년도에 만료되었다. 말레이시아 이민법에 10년 이상 있을 수 없도록 사라왁정부에서 법령 정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앞으로 자치교회를 추구하여, 사라왁 본토목사들이 일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며 “선교사 출구전략”을 제시했다. 즉, 사라왁교회와 중부연회가 선교정책 체결된 만큼, 후임 선교사를 파송하든지, 선교지를 옮기든지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욱 선교사는 “종신선교사로 임명받았으니, 임기가 끝나고 안식년까지 중국대륙에 선교의 문이 열리면 중국 8억 인구를 상대로 선교사로 가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선교의 열정과 계획을 표명하였다.(기독교세계 1974.11. 제556호. p16)
김성욱선교사는 1차 안식년(1969.12.14.)을 거쳐 1974년 까지 2차 임기동안 8년을 사라왁 선교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해 충실 하였다. 김선교사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슬람 강화정책에 의해 추방당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감리교회는 잊었고, 기억이 희미해도, 이반교회의 지도자들, 인사들은 김성욱, 이동숙 선교사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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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르네오 섬 임흥빈 선교사 파송(1971-1976)
▲ 임흥빈 선교사-파송(1971)/ 선교사 김용만 장로(우) |
임흥빈 선교사는 한국 첫 선교단체인 KIM(국제선교협력기구, 원장:조동진목사)에서 1969년부터 2년간 선교훈련 과정을 마치고, KIM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후암장로교회에서, 설교:조동진목사, 기도:최종철, 축도:윤창덕 감독으로 파송예배(1971.7.7.)를 드렸고, 홍콩-방콕-싱가폴-KL-사라왁 시부(Sibu)를 거쳐 브루나이에 도착하였다.(1971.7.24.) 감리교와 협력하여 연합선교사로, 사라왁을 경계로 하는 ‘브루나이”에 도착한 것이다.
브루나이(Brunei) 선교는 김용만 장로(대신감리교회)의 농업이민(1968년)에서 한인기도회를 모이며 가정교회 이루고 학교설립 준비로 복음선교의 터를 닥아 놓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임선교사는 선교지에 도착하여(7월), 즉시 “브루나이 한인연합교회”를 창립(1971.9.28)하였고, 3개 지역으로 속회를 편성하고 집회하며 교민선교 착수하였다. 이듬해, “브르나이 한인학교”도 개교(1972.3.)하여 교민 2세들을 위한 교육선교도 착수하였다. (선교활동 보고-<기독교세계> 1972.10.)
부르나이 선교 1주년을 맞으며, 7월에는 중국인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인근 사라왁, 사바(Sarawak, Sabah)를 다니며 보르네오 섬 원주민 선교를 추진하였다. 한국에서는 임선교사를 보르네오선교사로 부르고 있다.(브루나이, 사바, 사라왁도 보르네오 섬에 있음).
임흥빈 선교사는 “브루나이 왕국은 선교전망이 좋다. 다른 모슬렘 국가와 달리 비교적 영국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지 않으므로 우선 교포 1,000명(대성목재 직원 700명, 교민 280명)을 일차적인 면에서 상대로 선교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면 가능할 것이다.”고 선교에 밝은 전망을 피력하였다.
또한 브루나이를 동남아선교의 중요한 요지로 보았다. 브루나이는 30여만 인구의 영국 보호령인 이슬람국 브루나이 왕국이요, 기독교선교 자유롭지 못한 이슬람 지역이지만, 무슬림 인구 7억의 선교연구와 8억의 중국선교의 거점지역으로 중요한 요지로 본 것이다.
브루나이선교 임원진들은 회장 고명균 목사, 총무 최홍석 목사, 협동총무 허상길 목사, 서기 한양희 목사들로 조직되어 있다.
임흥빈 선교사는 오인애 선교사와 자녀 1남1녀가 있다. “현재 월200불 생활비로 선교사업 활동비용 없다”고 토로할 정도로 선교비 후원의 열악한 조건에서도 1976년 5년임기를 마치고, 김용만 장로에게 선교처 맡기고 독일 유학을 떠났다.(선교학 전공).-(해외선교 현황과 전략-기독교세계(제553호), 1972.10.p13.)
5. 첫 평신도 선교사 김용만 장로(감리교)-전문인 자비량 선교사(1976)
김용만 선교사는 1968년, “농업이민단”으로 브르나이 도착하였고, 1971년 “브르나이 한인교회“ 창립준비 하고, 임흥빈 목사를 초청하였고, 선교협력 활동하였다. 1976년부터 임흥빈 선교사 이어 원주민선교 착수하여 전문인 선교사로 충실하게 헌신했으며, 브르나이-사바, 사라왁- 인도네시아 정글 원주민 선교에 공헌하였고, 평신도 선교사로 “제1회 언더우드 선교사 상을 수상”(2001.10. 연세대학 선정)하였다.
6. 말라야(서 Malaysia) 선교 착수, “오메가 선교회“(1970-1980년)
동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에서 시작된 선교는 1970년대에 연방정부 수도가 있는 말라야(Malaya), “말레이 반도”, 이슬람 강세 지역인 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착수되었다.
서 말레이시아 “말레이 반도”(Malaya) 선교는 “오메가”(Omega) 선교회“(대표:최홍석 목사)에서 착수하였다. 최홍석 목사는 김용만장로, 임흥빈선교사의 브르나이 선교 후원으로 선교동원가로써 활동하면서, 말레이시아 본토 이슬람 지역에 첫 선교의 문을 열었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첫 선교방문(1973.5.)하고, 복음전도의 열정은 2차 쿠알라룸푸르(KL)를 방문하여, “말레이시아 한인교회 창립준비(1979년)” 하였다.
▲ 최홍석 오메가선교회 회장과 파송선교사 이의성 목사(1982)-Ampang에서 |
최홍석목사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1980년, 세계감리교 대회”에 참석하여, 말레이시아 감리교회 황감독(Bishop Rev, C.N. Fang)과 오경린 감독 연석협의를 통해 “쿠알라룸푸르 한인교회” 창립을 구체화 하였다.
당시 말레이시아 왕실의사(王室醫師)로 봉직하던 최정선박사(정동제일교회 권사)는 황감독과 협력하여 이슬람국에서 이민국으로 부터 “한국목사 비자”까지 받도록 허가받았다. 이에 초청장을 발송(1981.1.12.)하여, 초대 한인교회 목사로 이의성목사(오메가선교회 회원)가 도착하여(1982.4.18.) 쿠알라룸푸르 암방(Ampang)에 “한인교회”를 창립하고, 교포와 원주민 선교를 착수하였다. 이의성목사의 도착은 곧 한인교회 창립일이기도하다.
▲ 페낭교회-페낭 다리 13.5Km 건설현장 교회 |
이의성목사는 디아스포라 선교에 주력하여 뜨렝가누의 ”꺼띠(Kertheh)대림교회“와 페낭다리 건설현장을 순회하며 “페낭 현장교회” 등을 개척하고, 귀국하였다.(1985.5.)
양윤식목사가 이어서 헌신하여, 1986년에는 “쿠알라룸푸르한인교회”를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에 정식허가 받도록 공헌하였다.
7. 말레이사아 전역으로 선교분포와 확장-노종해 선교사
▲ 노종해 선교사-원주민 오랑아슬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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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선교사는 “한국 감리교 선교100주년 기념 연합연회“에서, 서울연회로부터 “일본 선교사로 파송”(1985.4.4.) 받았다. 그러나 선교지 도착을 준비하며 기다리다가, 선교국의 요청으로 말레이시아선교사로 쿠알라루(KL)에 도착하였다.(1988.8.31.) 노선교사는 “쿠아라룸푸르(KL) 한인교회”를 담임하며, <교포 및 원주민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1988.10월에는 “쿠알라라루푸르 동남아(M) 선교센타”를 설립하고, 말레이시아 전국을 선교지 분할하였으며(1989.12.13.), 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선교지를 나누어 주고 선교책임담당자로 파송하였다.(1995년부터). 동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 사바(Saba) 주에도 선교도 선교사를 파송하여 보르네오 선교를 잇도록 하였다.
이로써 말레이시아선교는 선교사역에서도 다양화, 전문화, 협력선교를 이루어 말레이 무슬림(M), 오랑아슬리, 미전도족(동마 원주민 종족), 화교, 인도계 등으로 확장되었다.
노종해선교사는 쿠알라룸푸르(KL)을 중심으로, 조호바루(1988.12.), 페낭(1989), 이뽀(1990), 세렘반(1992), 뜨렝가누(1994), 에 “한인교회”을 개척 창립하였다. 교포선교는 말레이시아 주요도시 곳곳에 “한인교회”를 창립 개척하여, 원주민선교센타가 되도록 하였다.
선교분야에서도 교육선교-문화선교-사회봉사선교(사랑의 선교)-도시선교-문서선교-IT선교로 다양화 되었고, 종족선교로 “동남아 갈릴리교회”(Galilee International Church)를 창립하고, 난민학교(Refugee School, UNHCR협력) 등으로 통전적인 선교를 이루고 있다.
노종해 선교사는 새천년인 2000년부터 “한인교회”를 내려놓고 말레이 이슬람(Malay Islam)선교를 목표로 원주민, 현지인선교에 전념해 왔으며, 선교사파송30년(1985-2015)을 기하여 말레이 이슬람 M선교 자료집 “이슬람, 그들은 철옹성인가?”-말레이 이슬람의 갈등과 쟁점-를 발간(2015.4.)하였다.
또한 “오늘날 세계에 퍼져 있는 말레이(Malay) 인종은 3억5천만이며, 무슬림들입니다. 말레이(Malay) 인들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브르나이, 필리핀 남부, 태국남부 등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세계로 분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우리는 이슬람을 알되 종교적, 사상적 차원을 넘어서서, 이슬람사회의 역사와 현실, 정치, 경제 등 오늘의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실제적인 삶을 이해하고 접근,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슬람선교현장 연구 조사로 말레이 이슬람사회의 갈등과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시아 한인교회”는 4대 이용범 목사(2000-2007), 5대 윤회철 목사(2007-현재)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교민과 현지선교를 펼치고 있다.
8. 디아스포라 선교 및 선교의 전문화 다양화
88올림픽으로 해외여행 자유화는 선교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에는 한국교회들과 선교단체들에서 저마다 말레이시아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단기선교로 복음의 발걸음을 재촉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한인교회들은 다양한 교파들로 말레이시아 전 지역 주요도시마다 개척되어 선교 참여하고 있으며, 쿠알라룸푸르(KL)에만도 20여 한인교회들이 개척 창립되어 교민목회와 선교 참여하고 있다.
오늘날(2015)에는 동.서 말레이시아에 감리교선교사 34가정 64명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선교사들의 비자와 입국제한, 추방으로, 중국선교사들이 말레이시아로 입국하여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9. 감리교회의 “말련선교50년 기념행사와 MOU체결”(10.7-9)
“말레이시아선교사회”(KMFM)는 새천년 들어서며, 창립되었고(2000.2.), 초대 회장은 노종해선교사로 오늘날(2015)까지 이어 오고 있으며, “감리교 말레이시아 선교사회”도 조직되어 있다.
“한국 감리교”(Korean Methodist Church, KMC)는 “말레이시아선교50년”을 기념하며, 선교협력과 체계화를 위해, “말레이시아감리교”(Methodist Church in Malaysia)와 선교 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 선교협약 MOU는 전용재 감독회장(President Bishop, Rev Dr Jun, YongJai)과 옹화텍(Bishop, Rev. Dr. ONG HWAI TEIK) 감독 간에 체결되며(10.7.), 선교국 총무 강천희 목사 등 한국대표들과 말레이시아 지도자들도 배석하여 공포 된다. 이어서 “말레이시아 감리교선교사회” 주최로 “말레이시아한인교회”와 인터콘티낼탈 호텔에서 선교50년 기념행사로 감사와 축제를 개최한다.(10.7-9.)
<한국감리교회 말레이시아 선교 50주년 기념대회 & KMC ∙ MCM 선교협약 체결> -주제: “말레이시아 선교 50주년 감사와 축제”- 1. 일시 : 2015년 10월 7일(수)~9일(금) |
선교에 실패는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한인 선교사들은 세계선교위해 기도하며, 합심하여 어떠한 시련과 고난, 유혹과 박해에도 굽힘없이 전진해 나가고 있다.(rch)
▲ 노종해 선교사(2015.9.)
by DangDang 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