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과 서독의 장벽이 무너진
독일 베를린 브란덴 부르그에서”
(At Germany Berlin Brandenbruger Tor)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앙유럽의 나라들은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었기에 독일의 통일은 먼 희망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개방적인 고르바초프가 1985년 소련의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중앙유럽의 나라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것을 계기로 동독과 서독을 가르고 있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이미 한달 전부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발상지인 동독의 비텐베르그에서 한시간 떨어진 라이프치히시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월요일의 데모’로 불리우는 이 모임은 1982년부터 지역 4개의 교회가 연합하여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함께 기도회를 갖기 시작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기도회를 마친 성도들은 작은 촛불을 들고 어두운 거리를 조용히 행진하였습니다. 이 일은 무려 7년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동독의 국민들은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권력은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9일 독일 정부 창립 40주년 기념일에도 라이프치히시의 성도들이 기도회를 예정하자 동독의 호네커 수상은 행진하는 군중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군중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면서 이 일을 염려한 교회 지도자들은 병원마다 응급실을 마련했고 경찰의 제압을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모든 교회와 극장 문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000명이나 되는 독일 사회주의 당원들이 기도회로 모일 예배당에 들어와 천여명의 성도들은 대부분 건물 밖에 서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진정으로 평화로운 변화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기도회 후 행진에는 무려 7만 명이 참여하더니 10만명, 50만명으로 늘어나더니 11월 9일에는 무려 100만명에 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베를린을 가로지르는 행진대열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항쟁에 굴복하여 사임하게 되고 국경제한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해 서베를린에 가게되고 동.서베를린을 가로막던 검문소 또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장벽을 감시하는 군인들로 물러나 결국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먼 희망처럼 보였던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희망의 싸움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그 무엇보다 희망의 싸움은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아픔과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평화의 꽃을 피어가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은 ‘암병동’이란 시에서 희망이 있는 싸움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때도 우리들은 온 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인간들이지만 오늘도 나와 함께 하셔서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으면 그 어떤 절망속에서도 설사 그것이 죽음과의 싸움이라 할지라도 그 싸움은 희망이 있는 싸움입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외롭고 버겨워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 분의 때에 그 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