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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박해정교수, 기독교 사상)

한국 개신교회는 역사적으로 성찬에 익숙한 전통이 아니다. 오늘의 개신교 현실 속에서 성찬이 차지하는 신앙적 위치는 다른 신앙적 구성 요소들에 비하여 미약하다. 단순히 행해지는 성찬의 횟수로 그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분기에 한 번 성찬을 행하는 교회가 보편적인 것만을 보더라도 성찬의 성서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가 온전히 한국 개신교회에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성찬
한국교회에서 성찬이 온전히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한국 개신교 성찬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그 시작으로부터 복음주의적 열정으로 가득한 비예전적 개신교 전통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서구의 신학교에서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교육을 접한 사람도 있지만,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였던 집회 중심의 변방 예배에 익숙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더욱이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상황은 성례전적인 요소가 자리 잡기에는 많은 제약들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예문을 읽는 것도 높은 문맹률로 인해서 어려움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성찬을 행하기 위해 성찬을 위한 빵과 포도주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성찬을 집례할 수 있는 목회자의 수가 넉넉하였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성찬에 대한 이해를 경험할 수 없었다.
한국 개신교 초기 보고 문서에 따르면, 초대교인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 부족은 성찬의 실행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로 피력되었다.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한국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던 스크랜턴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도시와 시골 교회 모두는 성찬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행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 ‘너무 오래 걸린다.’ 혹은 ‘다른 것들도 해야 된다.’ ‘사람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라는 이유를 사람들이 말하지만, 이는 논란거리나 이유가 되지 못한다. 비정기적으로 성찬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오해나 무지를 낳을 수 있다.

심지어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성찬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이러한 행위 자체가 전통적인 제사행위와 유사함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죽은 예수님을 기념하여 제사를 하도록 하면서 유사한 제의적 행위인 조상을 위한 제사 행위를 금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예전적인 요소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 한국교회 내에 정착하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였다. 비록 초기의 선교사들 가운데는 성찬을 정착시키고자 교육을 통하여 회중들의 이해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초기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성찬이라는 예식이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하나의 낯선 예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1903년 이후의 부흥운동을 통한 신앙의 체험은 초기 신앙인들의 성찬에 대한 낯설음을 더욱 가중시켰다.
한국교회사학자 이덕주에 의하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회개 → 중생 → 성결에 이르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통하여 서구의 선교사들이 전해 주었던 기독교의 신앙적 정수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기독교인 됨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회 중심의 부흥운동은 기도, 찬양, 설교, 간증이 중심이 되는 전형적인 집회 중심의 비예전적 예배였다. 부흥집회는 한국 개신교인들이 은혜를 경험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은혜의 수단으로 이와 같은 집회 중심의 예배가 한국교회 예배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례전적 요소는 자연스럽게 은혜의 수단으로써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한국 개신교 예배 상황에서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형식적인 예식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찬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반적인 개신교회에서의 성찬이 행해지는 빈도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성찬은 교회의 특별한 절기에 행해지는 특별한 예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적게는 일 년에 한 차례 행하기도 하였으며, 절기에 한 번, 성례전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목회자가 있는 경우에는 한 달에 한 차례 시행하는 교회도 있었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교회사를 가르쳤던 박대인(Edward Poitras)은 한국교회가 기본적으로 조상 제사는 일 년에 한 차례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예수의 죽음 또한 일 년에 한 차례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성찬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에 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성찬에 대한 편향적인 이해가 성찬의 빈도수를 늘리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수단으로 성찬을 이해하는 것은 성찬의 여러 신학적 이해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지나치게 이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성찬 중에 부르는 찬송을 보면 한국 개신교에서 행하는 성찬의 성격을 잘 볼 수 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혹은 <아무 흠도 없고>와 같은 예수의 죽음을 기술하는 찬송이 선호된다. 한국 개신교회의 성찬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일반적으로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만찬의 전승에 따라서 성찬과 예수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비록 전형적인 성찬의 예전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부활 사건 이후에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의 재회를 통하여 새로운 부활 이후의 성찬을 허락하셨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며, 이후 그들의 눈이 열리는 경험은 부활의 기쁨을 통한 새로운 식탁 공동체의 형성을 의미하였다. 이를 통해서 주님은 마지막 만찬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주님의 만찬을 제자들이 기쁨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이에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시편을 찬송하며 주님의 식탁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세례, 성찬, 그리고 목회에 대한 세계교회협의서의 공식문서인 BEM문서를 통해서 세계의 교회들이 선언하였듯, 실제 성찬의 신학적,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의미는 하나님께 감사, 그리스도를 기념, 성령의 역사, 성도들의 교제, 그리고 천국의 만찬이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은혜의 수단이기에, 성찬에 참여하는 수찬자들의 자세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정형화할 수 없다. 오히려 성찬에 참여하는 수찬자들은 기쁨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에 보다 부합된 모습이다. 필자가 부담임자로 사역할 때 한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부활주일에 성찬을 거행하였더니, 장로님 왈 “아니 목사님. 이제 금방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성찬을 하면서 또 주님의 죽음을 기념합니까?” 부활주일에 이루어진 성찬의 기도문과 찬송은 부활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고, 고백되었고, 선포되었지만, 성찬에 대한 고정적 선이해로 인해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한 이러한 고백들이 이 장로님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 년에 한 차례 성찬을 시행한다면 언제일까? 세계 성찬주일이 될 수도 있고, 고난주간 중에 행해지는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의 성찬도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찬의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부활주일이다.
기성 교회에서 시행하는 현재 성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난주간 중에 행할 수 있는 성찬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집례하는 목회자의 모습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고난이 풍겨 나오고, 부르는 찬송의 가사도 예수님의 고난을 고백하고, 수찬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으러 나오는 모습도 흡사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나오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필자가 조금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이와 같은 성찬의 모습은 일 년에 딱 한 차례, 즉 고난주간 중에 드리는 한 차례의 성찬으로 충분하며, 교회에서 행해지는 그 외의 모든 성찬의 분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찬이어야 한다. 성찬의 기본적인 이해를 되짚어 보면 성찬의 성격이 이러해야 함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성찬을 얼마나 자주 해야 할까?
성찬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교회가 행해온 성례이다. 루터교 감독이었던 유그브 브릴리오스(Yngve Brilioth)가 발전시킨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성찬의 다섯 가지의 중심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 예전으로의 성찬’, ‘회상의 사건으로서의 성찬’, ‘하나 됨을 위한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 ‘그리스도의 희생으로서의 성찬’, ‘성령의 임재로서의 성찬’ 이러한 다섯 가지에 제임스 화이트는 다음의 두 가지를 추가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서의 성찬’, 그리고 ‘모든 것들의 최종적 성취로서의 성찬’.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이미지에서 장례식과 같은 이미지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일곱 가지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심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 그리고 신비로움과 생명의 거듭남과 구원의 축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성찬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성찬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선행되면 성찬의 빈도수에 관한 이해에서도 오늘의 성찬 시행 빈도수와는 조금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겠다.
오늘의 개신교회에서 실행되는 성찬의 빈도수는, 비록 교단에 따라 차이가 있고, 동일 교단이라고 할지라도 담임목회자의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견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분기에 한 차례이거나, 조금 많은 경우에는 매월 한 차례 행해지고 있다. 매주 성찬을 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일 년에 한 두 차례 행하는 교회도 있는 것을 보면 교회와 교단의 신학적 이해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학자인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성찬의 빈도수는 지난 십여 년 전에 비해서 상당히 높아졌다. 성찬의 빈도수를 높이는 것은 매우 성서적이며, 분기별 성찬은 매달 성찬으로, 매달 성찬은 매주 성찬으로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는 주장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성찬을 자주 행하다 보면 그 의미가 희석되고, 형식화 되며, 반복하다보면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찬을 행함에 있어 수반되는 번거로움에 대한 핑계이거나, 제한된 예배 시간에 설교 시간을 할애하여 성찬을 실행해야 한다는 불편함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그의 설교, 좪성찬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할 의무좫(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를 통해서 성찬의 실행 빈도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여러분은 지금은 행할 수 있고, 앞으로는 행하지 않겠다 하면서 변명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무 자주 행하면, 성찬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릴까봐 안 합니다.”라고 할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제 당신에게 너무 내 말을 자주 순종하면 경외심이 사라지니까 순종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하나님의 법은 분명합니다. 그 법률을 만든 이가 이것을 예외로 만드시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그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기수여의 사건 앞에 교회와 목회자들은 보다 신실한 모습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거룩한 기쁨의 식탁 앞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쁨의 식탁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누릴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성찬을 통해서 성찬의 성서적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의 형식화와 객관화로부터의 탈출이다.

형식화로부터의 탈출
성찬의 형식화로부터의 탈출은 성찬 예문을 착실히 읽고 준비된 빵과 포도주를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이 성찬의 방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찬이 생활화된 정교회와 가톨릭의 경우, 예식서에 따라 기도문을 읽고 찬양을 드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것이 외인들에게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성찬은 주일에 설교를 들어야 예배에 참여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의 설교에 대한 이해와 유사하다. 이들은 마땅히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로 생각하기에 이들에게는 이미 성찬은 형식화되어 있지만 신앙과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개신교의 상황에서는 형식적인 면에서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겠다.
첫째, 상징적 요소를 활용하라. 이를 위해서 성찬 환경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절기에 따라서 성찬 환경에 변화를 줌으로 절기에 맞는 상징적 요소들을 부각 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성찬의 의미를 더욱 깊게 경험할 수 있다. 예컨대, 오늘과 같은 사순절 성찬의 환경과 다가올 부활절 성찬의 자리가 동일한 환경이 되지 않도록 주변 환경을 새롭게 한다. 이러한 노력은 성찬에 사용되는 성찬 용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별잔을 사용하였다면, 공동잔(Chalice)을 사용함으로 한 잔을 통한 공동체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덩어리 빵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회중들에게 보여주고, 회중들이 보는 가운데 이를 찢음으로 그리스도의 찢기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강조할 수 있다. 또한 집례자는 적절한 몸짓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둘째, 예전 음악의 선택을 다양하게 한다. 이는 성찬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죄고백의 찬송 일변도에서 탈출하여 절기, 즉 그날 선포된 말씀의 성격에 맞는 찬송을 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CCM을 사용하여 성찬을 집례하였는데, 참여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보다 밝은 모습의 참여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성찬 찬송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성찬의 이미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광의적 개념의 예배음악을 활용하여 음악적으로도 풍성한 성찬이 되게 할 수 있다.
셋째, 수찬의 방법을 새롭게 한다. 이 방법은 이미 서구교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찬의 분급을 위하여 받으러 성찬상 앞으로 나올 때, 혹은 빵과 포도주의 분급을 앉아서 기다릴 때, 성찬 찬송을 부르며 참여하는 방식이다. 분급 시 부르는 찬송의 성격에 따라서 성찬의 성격이 유사하게 진행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넷째, 형식적인 면의 변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찬제정사는 암기하여 행함으로 회중들이 집례자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많은 경우 성찬제정사를 하면서도 집례자의 시선이 예식서에 머물러 있기에 성찬의 극적인 부분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성찬제정사는 주님의 말씀으로, 개신교 성찬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가급적 집례자들은 성찬 참여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암기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다.
객관화로부터의 탈출
형식적인 면에서 탈출하는 것보다 성찬의 객관화에서부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효과적인 성찬을 실행하기 위해 보다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 집례자는 수찬자들이 보다 성찬이 자신을 위한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인 예식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을 더욱 깊게 경험할 수 있다. 더욱이 신앙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체험이 함께 이루어진다. 이를 위한 성찬 예식의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참여자의 이름을 부름으로 성찬의 경험을 개인화하라. 수찬자들이 성찬상으로 나와 분병에 참여할 경우, 일반적으로 성찬에 참여한 성도는 집례자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집례자의 손에 들려 있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가기 바쁜 모습이다. 하지만, 집례자가 빵을 바로 수찬자에게 건네주지 않고, 빵을 눈높이로 올리면, 자연스럽게 수찬자의 시선이 집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집례자는 수찬자의 이름을 부르며, “이는 아무개를 위한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분병하면, 성찬에 참여하는 수찬자는 객관적 참여자에서 매우 개인적이며 주관적 참여자로 변화한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성찬 참여 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많은 교회들에서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이 글을 읽는 목회자들에게 이와같은 성찬분병 방식에 변화를 시도할 것을 강하게 권면한다.
둘째, 치유 및 안수 기도의 시간으로 안내하라. 초대교회에서는 시행되었던 치유 사역과 성찬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성찬은 치유의 능력이 있는 성례이다. 성찬에 나와 분병에 참여한 성도들 가운데 목회자에게 치유의 기도를 받기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분병 후에 재단에 무릎을 꿇고 치유의 안수기도를 받도록 한다. 이를 통하여 성찬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셋째, 개인 기도시간을 통하여 결단의 시간을 마련하라. 필자는 미국 유학시절 성찬을 통하여 큰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 경험은 종국에 필자가 박사과정에서 성찬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 필자는 재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초청받았고, 비록 짧은 시간의 기도였지만, 실로 깊은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유학시절의 아픈 상처를 치유받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개인 기도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재단으로 나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와 시간을 배려할 수도 있으며, 모든 성도들이 수찬 후에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수찬이 다 이루어진 후 절대 침묵의 기도시간을 갖는 것도 새로운 형태의 기도 시간이 될 것이다.
넷째, 공동체성의 고양을 위해서 함께 고백하라. 이는 성찬 이전과 이후에 모두 행할 수 있는 순서이다. 성찬분병례가 이루어지기 전에 회중들이 함께 평화의 인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한다. 모두 자리에서 기립하여 적당한 범위 내에서 이동하며 주변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사할 수 있다. 또한 분병례가 모두 이루어지고 나서, 회중들은 기립하여 성찬 후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서로를 축복하며 인정하는 축복의 찬양을 할 수 있다. 공간이 허락되고 성도의 숫자가 가능하다면 큰 원을 이루고 서로 손을 잡고 찬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후 집례자는 연이어 축복의 기도를 드림으로 성찬과 예배를 마무리한다.

닫는 글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우리 사회로부터 듣고 있는 가장 큰 질타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섬기고, 나누고, 돌보며, 사랑하는 모습,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실한 오늘 교회의 자아상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에 우리 사회는 우리를 향하여 개신교회의 변화와 거듭남을 요구하며,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신, 우리에게 선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우리의 것은 희생하지 못하고 내어주지 못하는 속된 인간의 모습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가 보다 성찬의 성서적 이미지를 우리 삶에서 더욱 드러낼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인의 모습이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전적 삶을 통하여, 또한 성례전적 신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고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박해정 l 교수는 미국 드류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으며,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예배와 예전을 가르치고 있다.
글쓴이 / 박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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