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 경기도 성남의 개척 교회인 샬롬 교회를 섬기는 김정하 목사님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린이 일대일 돕기후원회인 컴패션(Compassion)의 회원이 되어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척박한 땅의 어린 생명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목사님이 섬기는 개척 교회는 당장 내일의 삶이 버거워 보일정도로 힘들게 하루 하루 유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본인은 손수 교회를 앞에 터를 잡고 구두 한 켤레 닦는데 2천원을 받아 모은 돈으로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 후원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루게릭 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을 앓게 되었고 사모님이 병을 앓는 목사님을 대신하여 3개월간 구두를 닦아 후원금 모금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목사님은 더듬 더듬 입술을 떼며 말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데 있습니다. 부자도 나누지 못하면 거지가 되고, 가난한 자도 나누면 부자가 됩니다”(가정예배서 ‘하늘양식’중)
유대인들이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키소(돈), 코소(잔), 카소(분노)’입니다. 그 중에 ‘키소(돈)’라는 단어는 ‘전대, 돈주머니’를 뜻하는 말로 그 사람의 돈주머니가 어떻게 열리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돈주머니가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돈 주머니를 지닌 사람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속에서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통해 대규모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던 종교개혁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때를 찾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선을 행하라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인들은 계속적으로 선을 베풀고 서로 돕고 살아야함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영국 감리교회를 향해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 즉 감리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단지, 그 교회가 능력이 없이 종교의 형태만 지닌채 한낱 죽은 단체로 전락할까 봐 염려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 산다고 하는 것과 부자는 다른 것입니다. ‘부유함’과 ‘부요함’은 다른 것입니다. 돈은 부유함은 주어도 부요함은 주지 못합니다. 부요함은 관계의 문제이지 재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이지만 부요한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What he has)으로 규정되지만 부요한 사람은 그가 누구인가(Who he is)로 규정됩니다. 부유함은 물질을 가진 것이지만 부요함은 ‘이 름’을 가진 자입니다. 금와 은은 없어도 ‘그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진 자입니다.
오늘 우리의 위기는 부유함을 추구하며 부요함 즉 복음의 능력,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가는데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부요함의 회복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예수님의 마음(빌2:5)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취사선택의 대조적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청년과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하기보다는 재물을 선택함으로 영혼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세리장(Tax Collector)으로서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이웃을 위한 변화의 삶을 선택함으로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눅19:1-10)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의 평생의 좌우명은 ‘코람데오'(Coram Deo,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았습니다. 야심이 크고 소유욕이 크고 매우 강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요한도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할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되고 겸손한 인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포기하고 결국 사랑의 사도가 되게 됩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3:18)‘라고 강권할 정도로 삶으로 사랑의 본을 보이며 평생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앙한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선명한 인생의 획을 긋는 변화가 일어남을 말합니다. 특별히 신앙인의 복은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부요함’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횡재나 대박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앞에서의 순종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면 누구나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서 아름답게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삶이 힘겹고 고달프지만 오늘도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눔과 섬김, 사랑의 길을 선택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살며 베푸며 돌아보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이요, 이 시대의 희망의 씨앗입니다.
(장재웅목사, 뉴욕 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 목회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