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년)는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1703년 6월 17일 요한 웨슬레는
사무엘(Samuel) 웨슬리 목사님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1703년에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웨슬레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조부였던 바돌로메 웨슬레는 그의 집안에서 최초로 옥스포드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는 1720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재학 중에 동생 챨스 웨슬리와 몇 명의 학우와 더불어 홀리 클럽 (Holy Club)을 만들고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엄수했기 때문에 메더디스트(규율가(規律家))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혼탁하고 도덕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퇴폐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일행은 매주 2일 간은 금식하고 성찬에 참례하며 믿음의 정진과 형제애의 실천 그리고 사회봉사 활동에 힘썼습니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됩니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739∼1791에 있었던 ‘대각성 부흥 운동’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웨슬리가 자신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더불어 신앙운동을 벌이던 시절에는
그의 사역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온갖 좋지 못한 소문들이 떠돌았고 온갖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물론 사회와 교회의 지도층에서는 그를 반대하는 책과 전단들을 뿌리며
그의 선교활동을 방해했습니다. 폭도들 때문에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긴 여러 차례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러한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 존 웨슬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문득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이 아무런 핍박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사흘 동안 아무도 그에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핍박을 받지 않은 것이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이 아닌지 기도로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면 알게 해 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마침 길 건너편에 있는 울타리 한쪽 끝에 서있던 어느 사내가 그 기도 소리를 듣고서 존 웨슬리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잘 됐어. 저 감리교 목사를 이번 기회에 단단히 손을 봐주고 말겠어.”
그리고는 벽돌 하나를 집어 들고서 웨슬리를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고약한 사내가
던진 벽돌은 다행히 웨슬리를 살짝 비켜서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웨슬리는
그 사내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 가운데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는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라며 1753년 직접 발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 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빛은 (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