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 14:27/개역개정
지난 금요일 코네티컷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미국 전역이 깊은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2013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이 때, 성탄과 새해를 소망하고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그 날들을 희망과 기쁨으로만 맞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대부분이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어린이들이 대부분인 것에 대해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희생당한 어린이들은 전적으로 부모 세대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분쟁지역으로 들어갔던 미국이 오히려 지켜주고 보호해야 할 약자인 어린이들의 희생을 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철저히 기성세대를 비롯한 현재 미국의 책임입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고 다시 예전처럼 ‘늘 그랬듯이’ 이번 사건을 망각의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린다면,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끊임없이 부메랑이 되어 미국 사회를 또다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이런 총기 난사를 막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촉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슬픔에 함께 동참하면서 동시에 책임 있고 의미 있는 행동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살얼음 같아 보이는 거짓 평화에 대해 일갈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소위 세상이 주는 평화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순식간에 박살이 나기 마련이며, 천문학적인 숫자와 예산이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실수와 행동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분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단 한 번도 적극적인 폭력을 행사하셨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포악하고 맹렬한 폭력에 맨 몸으로 부딪쳤습니다. 또한 그분이 주신 평화를 누렸던 이들 역시 무지막지한 폭력의 희생양이 될지언정 그 폭력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 마 26:52-54/개역개정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쓸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이루셨던 평화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어서’ 이루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증오와 미움이 낳은 폭력으로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신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폭력과 증오의 순환을 끊어버리고 용서와 사랑이라는 전혀 새로운 평화를 일구어 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미국이 지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을 비롯한 모든 힘으로도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악한 흉탄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었던 평화라면 그것은 결코 진짜가 아닐 것입니다. 평화는 결코 인간의 속성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며 평화가 없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평화를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