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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종교와 새 진리(종교개혁주일 설교)

낡은 종교와 새 진리 본문 : 마태복음 9 : 9~17

by 이필재 목사(종교개혁주일 설교)

오늘은 온 전 세계 개신 교회들이 종교개혁주일로 지내는 날이 되었는데, 마태 사건을 통해서 이 날의 의미를 새롭게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마태는 본래 직업이 국세청 직원이었습니다. 세금을 수집해서 국가에 바치는 국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삭개오도 직업이 세리장이라고 같은 직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에 선진국에서는 제일 힘이 있는 직업이 이 국세청 직원들이 됩니다. 대통령일지라도 이 사람들이 오면 긴장하는, 세금 포탈이라는 죄목이 현대 사회에서는 아주 큰 죄로 평가되는 문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그 직업에 있는 사람들이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도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그렇게 말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삭개오의 집에 그들은 들어가지도 않은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직업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11절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선생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잡수시느냐?”이렇게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 직업, 즉 “국세청 직원하고 죄인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문화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는 지금 식민지 백성입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니까, 그리고 로마 정부가 주는 월급을 받아먹고 사니까 ‘너희는 매국노 직업이다!’ 아마 이렇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이 그 사회에서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마태를 12제자 중의 하나로 삼으시기 위해서 마태를 만나시고 또, “너 이것 그만두고 나를 따르라!” 그를 데리고 나와서 제자를 삼으시는가 하면 그 집에 가셔서 적지 아니한 규모의 잔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가 이 직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니까 아마 동료들이 송별 모임에 많이 온 듯 합니다. 또 세리들이 그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리들은 자연히 친구들이 주변에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끼리라서 그런 사람들이 다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라고 지금 소문이 나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따라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라면 저런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먹거나 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하는 것인데,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왜 저렇게 하고 있느냐? 그래서 이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에 마태는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 11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말할 때 쓴 단어가 “어찌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저런 일을 하느냐?” 그러면 우리가 이 사건에서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자연히 생겨지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고 계시는 일은 그 나라 전통 사회에서는 절대로 못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곧 개혁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개혁자입니다. 얼마나 개혁을 했느냐? 죽기까지! 그 과거 전통을 무시하고 개혁을 하셨기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전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이 혈통을 따지는 민족은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모두다 똑같이 유일신,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입니까? 예수님의 개혁의 성격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두 가지 주제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금식 기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금식 기도는 얼마나 훌륭한 기도인지 성경에 응답을 빨리 받고 싶으면 금식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응답이 빠른 기도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문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이렇게 귀중한 금식기도를 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책임 추궁했습니다. 전통 유대교 신자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을 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문에도 나옵니다. 틀림없이 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이 된 것은 모세를 기념하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올라갈 때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 두 날을 기념해서 이레에 두 번이다! 그런데 유대 나라 사람들이 다하는 금식기도를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했단 말입니다. “왜 안하느냐?” 책임추궁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식기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금식기도는 해가 떠있는 시간만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이슬람의 라마단 금식 기간은 한 달입니다. 어떤 때는 40일을 합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 달씩 금식하고 살 수 있느냐? 해 뜨기 전에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해가 떠 있을 동안에 밥을 안 먹습니다. 금식합니다. 그리고 해 넘어가자마자 밥 먹습니다. 실제적으로 따지면 점심 한끼를 먹는 겁니다. 우리도 그거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달씩 금식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다 하는 것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런 금식기도는 안 해도 괜찮다!” 그겁니다. 이 “안 해도 괜찮다.” 이게 종교개혁입니다. 전통적으로 지금까지 하던 일을, 또 누구나 다 하는 일을 안 해도 괜찮다! 그렇게 하는 금식기도는 안 해도 괜찮다!

우리가 이 진리를 생각할 때 이 진리는 두가지 길을 항상 생각하셔야 됩니다. 하나는 변하지 아니하는 진리! 이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는 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변해야 될 것이 변하지 아니할 때 그 종교는 썩은 물같이 되어버립니다.

갈보리교회도 와서 보니까 주일 저녁 예배는 안 드리시는군요. 왜 안 드리십니까? 한국 100년 전통을! 저도 미국에서 목회할 때 저녁 예배는 드리지않았어요. 그 사회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365일, 일주일 내내 가족들끼리 보내는 중요한 시간은 믿음 생활에 큰 영향력이 있는데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 주일 오후 밖에 없어요. 저마다 학생들도 얼마나 바쁩니까? 그런데 이 가족이 만나는 귀중한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서 가정 예배를 드리고, 그 날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라는 판단을 해서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다 그것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저녁 예배를 안 드리면 타락했다!” “예배 싫어하는 교회도 있느냐?” “세속화되었다! 말세다!” 뭐, 별 비판이 막 쏟아져 나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우리는 이렇게 하자!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목사님들이 저한테 막 오셔서 물어요. “목사님, 그거 어떻게 해서 없앴어? 그거, 없애긴 없애야 되는데 나오지도 않아! 그런데 이거, 과거 전통이 모여 있는데 큰일났어! 없애긴 없애야 되는데 없앨 수 없잖아! 또 비판하는 교인들 많잖아!” “그러면 내가 가서 없애줄게!” 그러니까 예배 마치고 12시에 교회에서 점심밥을 해먹고 저녁에 또 나올 수 없으니까 오후 2시, 3시에 예배를 드리고 헤어지더라고요.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면 금방 예배를 드리고 나서 은혜를 받았으면 점심 먹고 나서 시간 때우기!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시지도 않고, 또 그거 안 드렸다고 벌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좋지만 과거 전통 때문에 형식만 살리는, 마음에도 없는 예배는 안 드려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십계명대로 한다면 지금 우리 모든 세상의 개신 교회들은 다 틀렸어요.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변해야 되는 진리는 변해야지, 변해야 되는 것이 변하지 않을 때 썩은 종교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날 예배드리자!” 그것이 진리가 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주일을 안식일화 했잖아요? 이제 보십시오. 앞으로 주5일 근무제가 되면 대한민국에도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지고, 벌써 생겼습니다. 미국에 많이 있어요. 우리 갈보리 교회도 때가 되면 그렇게 할 겁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교회들은 수요예배 다 없애버리고 금요일 날 모이는 게 더 좋다고 해서 금요일 저녁에 모입니다. 어떤 형식이 시간이 흘러가면 고정화되고 고정된 관념이 계속되면 그것이 진리화 됩니다.

지금 제자들은 고정화된 이레 두 번씩의 금식을 안 한 것이 죄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왜 안하느냐?” 저는 미국 가서 깜짝 놀란 충격이 있었어요. 목사들이 축도를 할 때 눈뜨고 서로 쳐다보면서 해요. 그걸 처음 보니까 이상하더라고요. “아니, 축도를 왜 이렇게 해?” 미국 목사한테 물었더니 “그렇게 하면 어때?” 그러더라고요. “아니, 눈감고 해야지 왜 그렇게 해?” 눈감고 하나 눈뜨고 하나 피차 바라보면서 웃으면서 축도를 해요. 그래서 저도 배웠어요. “일년에 몇 번 특별한 날은 우리 마주보며 축도 하겠습니다.” 교인들이 훨씬 더 좋아하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두 가지 생활편 예화 설교를 하십니다. 추궁을 당하시니까 낡은 옷과 생베 조각을 예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화를 들어보신 걸 보면 경험입니다. 가난하게 사셨거든요. 형제 많았어요. 옛날 어머니들은 저녁상을 치운 후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었어요.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옷을 기웠어요. 구멍난 양말, 구멍난 옷에 다른 옷자락 갖다 대고 기우는 일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는 뭐,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거의 다 기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옷을 기우는 것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색깔, 천의 내용을 그리 천하지 않게 기워나야 입을만 하지, 하얀 옷에다가 새빨간 천을 갖다 붙인다면 흉해서 못 입고 다닙니다.

요즘에는 멀쩡한 바지를 그냥 문질러서 뚫어놓고서 입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생베 조각, 낡은 옷 이것은 배합이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게 뭐냐? “낡은 종교는 너희들이 지금 말하는 전통과 형식의 고정화된 그 종교는 새로운 시대에 조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차라리 낡은 것은 버려라! 새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다!” 종교 개혁! 중세기의 종교 개혁 운동이 뭡니까? 전통과 관심의 고정 관념에 대해 생명을 잃고 형식만 남은, 고여있는 저 썩은 냄새의 종교를 버리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 있는 종교를 만들자는 작업!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오늘과 같은 날을 기념하는 거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생활의 도움 가운데 양가죽으로 된 양가죽부대를 사용했습니다. 이 가죽 부대는 물통으로도 사용이 되고 포도주 보관용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이 가죽부대를 오래 사용하면 낡은 부대가 됩니다. 포도주는 발효 음식이 됩니다. 이 포도주라는 강력한 발효 음식물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그 발효의 힘을 견디지 못한고 낡은 가죽 부대가 그만 “팡~!” 하고 폭발을 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김치 같은 것도 발효 음식물이라서 어떨 때는 김치 병이 깨져나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포도주는 위험합니다. 율법주의, 형식화된 종교, 고정 관념적 사고, 전통 위주의 교리, 고행 종교… 그 낡고 낡은 가죽 부대에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라고 하는 새 포도주는 넣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너희들의 것은 다 버리라!” 종교개혁을 주님이 지금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개혁이 하도 심해서 전통 종교에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세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로마에 다녀오신 분들은 라테 성당 다녀오셨을 겁니다. 그 계단이 끝없이 높이 되어 있잖아요? 그 계단을 무릎으로 아프게 기어오르면서, 한 계단 한계단 오를 때마다 입을 맞추는, 그 고행의 의가 나를 구원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자리를 바로 올라가다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저도 거기 가서 ‘루터를 생각하면서 나도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그런데 그곳은 완전 무릎으로 올라가야지 엉거주춤 슬쩍슬쩍 올라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주 그냥, 마음을 단단히 먹고 ‘끝까지 한번 그때 사람들을 생각하며 무릎으로 올라가야겠다!’ 올라갔는데 다섯 계단 올라가고 그만 뒀어요. 어떻게 아픈지 견딜 수가 없어요. 루터가 그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래, 내 무릎이 이렇게 아픈 고행을 내가 이 계단에서 견딤으로 인하여 나에게 구원의 의가 이루어진다면 십자가는 무슨 의미이냐?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냐? 이건 아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귀한 하나님의 복음을 어찌 고행 종교에 가두었느냐?” 그래서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겁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사람은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의가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는 0.1%도 개입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선물이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 의가 되어 구원이 된다면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는 무슨 의가 있어서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믿음 하나로 영생이 약속되어지는 진리! 이것이 복음이다! “이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유대교의 낡은 가죽 부대에 가두어두면 터질 것이다.” 바울의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고백!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오직 믿음으로!

두 번째는 “오직 성경으로!” 여러분은 신앙생활 가운데서 간혹 신비적 계시를 좀 받았으면 좋겠다는 충동을 받으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계시가 뭡니까? 여기, 하나님의 말씀 속에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계시가 내 손에 들려져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확실성 있는 계시는 무시하고 신비적 체험을 더 중요시하며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종교 개혁! “오직 말씀 속에!” 중세기 때 왜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이 계시된 말씀을 평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했어요.

일반 예배 때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라틴어 몇 마디로 신부들이 설교를 하는 것으로 예배를 대신 했기 때문에 말씀의 계시의 능력이 사람들의 영혼 가운데 역사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성경도 못 읽게 하고, 설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는 어떻게 생활 가운데 적용합니까? 모스크바 박물관에 가보세요. 성경책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성경책 겉장에는 전부 콩알만한 다이아가 수십개 박혀있고… 그런데 그 아름답고 화려한 성경책을 주먹만한 자물쇠로 잠가놨어요. 무슨 뜻입니까?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보지 말라고 잠겨놓은 성경을 종교개혁이 팍 열어서 “보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왜 못 보게 하느냐?” 이게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그 다음에는 만인제사론! 구약 시대의 속죄의 방법은 내가 회개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제사장이 중보 역할을 해주어야만 회개도 할 수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일년 일차씩 대제사장만이 들어가고 그가 모든 백성의 죄를 중보기도해서 속죄 선포를 함으로 제가 사해지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이냐? 이 복음의 능력이란 그럴 필요가 없는 진리! 나와 하나님과 직접 말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이게 종교개혁입니다. 십자가 사건 때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그랬습니다. 그 의미는 “누구든지 직접, 대제사장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 자리에 누구든지 들어오라!” 우리 개신 교회는 고해성사라는 순서를 하지 않습니다. 내 죄 사함의 중간 기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왜 필요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 직접 만나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 주신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도 교회 오셔서 아마 어떤 분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만이 아는 죄를 회개하셨을 겁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세요. 중간 기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만인제사론! 회개란 뭐예요? 내 마음의 신앙 개혁 운동을 말합니다. 어제까지 잘못된 것을 오늘부터 새롭게 한다는 뜻이죠.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의학적으로 인간은 수백 억 개의 세포로 신체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뇌만도 240억 개의 세포라고 하는 것들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뇌세포들은 세포 분열이라고 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세포의 건강을 유지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겁니다. 낡은 세포들은 소멸되어서 땀으로 분비되어 없어지는가 하면 새로운 세포의 재구성이 되기 때문에 일년에 몇 번씩 전체 세포의 갱신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데, 이것이 정지되거나 둔화될 때 기능이 마비되고 심하면 죽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누구도 할 수 없는 세리 직업을 가진 마태를 뽑아서 12사도의 자리에 앉히고 이것을 기념해서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낡은 종교에, 썩은 물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 와서 불필요한 비판과 추궁을 했을 때 예수님은 답변하셨습니다. 역사에 보면 이 교회가 잘못 갈 때 괴팍스럽고 고집스러운 종교들을 대량 생산해내는 문제 기구의 역할을 했던 겁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느냐?” “먹으면 어떠냐? 너희들은 왜 안 먹느냐? 안 먹는 그 자체가 죄인 줄 모르느냐?”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느냐?” “그런 금식기도 하지 마라! 생명 하나도 없다.” 그 사회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종교 개혁으로 예수님이 뒤집어 버린 겁니다. “오늘부터 이렇게 살아라. 이런 죄인들을 내가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노라.” 낡은 종교인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진리 선포!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개혁자로 사셨습니다. 낡은 율법주의 형식 종교, 고정 관념에 대한 종교를 다 깨뜨려버리고 살아있는 진리의 빛을 발하셨어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신앙도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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