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본고는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 또는 시로-팔레스틴 고고학의 연구에 대한 개요가 목적이다. 따라서 1장에서는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에 대한 개론적인 정리를 하고 2장에서는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권 pp354-367에 실린 William G. Dever의 “Archa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요약하여 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과 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고고학, 성서 고고학
- 고고학의 역사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따라서 고고학을 단순히 사료 수집을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고고학자는 동시에 역사가이어야 한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고고학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양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주변에는 관련 과학이 매우 많다. 자연과학 계통으로는 자연인류학, 자연지리학, 암석학, 광물학, 야금학, 古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기상학 등이 있으며, 인문과학 계통으로는 문화인류학, 민족학, 종교학, 예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이 있다. 또 자연ㆍ인문 양 과학에 걸친 것으로는 선사학, 선사지리학, 농학, 환경학, 통계학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진 촬영ㆍ실층, 도법(圖法)ㆍ복원(復元)ㆍ복제(複製)ㆍ탁본(拓本)ㆍ보존과학(保存科學) 등의 기술이나 석기제작법ㆍ토기제작법ㆍ금공(金工)ㆍ칠공(漆工)ㆍ방적(紡績)ㆍ도량형(度量衡), 나아가 박물관이나 문화재 보호법 등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다. 즉 고고학은 이러한 학문을 산하에 거느린 하나의 거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된 것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과 층위학적 방법(stratigraphy)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는 것과 탄소14법(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연륜연대법 발열분석법(Thermoluminescence),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중성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등이 있다.
-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聖書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서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2000년기부터 신약성서가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성서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서를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서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소련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즉 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성서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서 속의 지명을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을 발굴하였는데(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도표1.노광우121쪽)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Kenyon)이 여리고와 그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성서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동양학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올브라이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팔레스틴의 고고학적 편년을 세운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미르심에서 발굴된 토기를 형식적이고 층위적인 발전 단계로 구분하면서 편년을 세웠다. 편년의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데 유적의 발굴 숫자가 증가되는 것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 등으로 좀 더 정확한 편년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상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정리된 3인의 편년을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도표2.한상인2,252쪽)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못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서의 기록만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 고고학은 미국의 성서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고학의 방법이나 목적은 그것이 성서와 관련이 있건 없건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고고학과 성서” 등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 James I. Packer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성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이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팔레스틴 고고학은 성서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시대와 성서의 주제를 벗어난 다양한 내용을 다룬다. 또한 팔레스틴 고고학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동쪽 부분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서쪽 너머에 있는 이집트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량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화적 변천을 연구한다. 팔레스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 및 조사되었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유적은 28곳에 지나지 않고 발굴된 곳은 20곳이 못되며 발굴 결과가 발표된 곳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에 앞으로 팔레스틴 고고학이 계속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Ⅱ.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도 W.F. Albright, G. Glock, Toombs, Moory 같은 상당수 전문가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⑴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 ⑵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고심(elaboration) ⑶미국 학파의 특색 있는 접근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통용되는 인문과학의 범위(state of art)를 설명함으로써 토론을 새롭게 하려 한다.
field고고학을 구성하는 데에 공감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고학은 단순히 골동품을 추적하고 환상적인 유물을 발견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 경험을 꿰뚫고 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추상적 이론(speculation)이 아니라 고고학을 고고학 그 자체로 보는 기본적 방법으로써의 이론(theory)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 미국인의 지적 지평을 강조하는 변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자체라는 것은 없다.
- 신 고고학의 성숙기
196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연구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신세계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의 개척된 다양한 이론적 방법론적 교리들은 연구 계획(resaerch design), 현장 답사(field work)와 분석 그리고 중요한 출판에 영향을 주었다.
1-1.복합 학문적(Multidisciplinary) 접근은 우리가 전통적 관점이라고 여겼던 건축학적, 요업(ceramic)적 국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는데 식물과 동물의 유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과거 생활양식의 흔적, 환경학적 변화의 증거, 고고학적 기록에 우연히 주어진 모든 물질문명의 자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 층위학자와 도자기 전문가(물론 성서역사 학자도) 원정발굴대가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많은 분야들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시작된 Gezer에서의 첫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의 충격은 신고고학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15년 전 만해도 고고학 분과는 종종 편협하고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었기 때문이다. 복합전공적 접근이 유발한 새로운 현장 방법들(firld methods)은 종종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그것들의 결과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거품을 일으키는 체(sieve)와 식물과 동물의 흔적을 구별해 내는 (꽃가루 분석 방법인)palynology와 고대 기후와 생활 수단과 음식물과 같은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
1-2.생태학적 지향(An Ecological Orientation) 복합전공적인 교수진(Staffs)을 고용한 것은 필연적으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과거 개인적인 고고학적 현장은 그들의 환경이나 다른 현장과의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왔다(몇몇 블레셋 발굴 현장(유적)은 네브라스카처럼 그들이 파고 발표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자들은 현장 사이(intersite)와 환경적 관계는 관심을 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당연히 가정하는데, 아마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전통적, 역사적(즉 성서적) 지향에서 기인했다. 그래서 문화적 변화를 위한 설명을 물질적 요인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곧 고고학이 주로 인류학적, 생태학적 지향을 차용하면서 어떠한 문화의 독특한 양식도 대체로 경제적인 요인들에 기인하고 이런 문화들의 양식(these)은 자연적 환경에 의해 빡빡하게 조건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란 지리학적 상황, 기후, 자연 자원에 대한 접근성, 무역 통로, 재료(raw, material) 경제적 결정론을 대하는 동시에 1970년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은 유적을, 문화/역사적, 자연적 상황이라고 하는 더 큰 틀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조사와 반론을 진화시키고 필요로 하는 주된 연구 전략은 지역적 스케일에서 수행되어졌다. 경제학적 지리학자에 의해 개발된 유용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정착지 유형 변화와 분배 형태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는 고대 기후와 기술적 적응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과 아직까지 우리 분야에서 수행되는 가장 진지한 인구 통계학 계획들을 재구성하려 한다.
진행되고 발표되어 이제 축적되어 있는 환경적 자료(data)는 한 세대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전망을 열어 주고 여러 기간과 문제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줄 것이다. 다양하게 언급된 지표 조사(surface surveys)처럼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의 모든 발굴 계획은 현장 작업에서 더욱 새로운 생태학적 지향의 예가 될 것이다.
1-3.체계 이론(System Theory) 최근의 사례 분석은 체계 이론이 미국 고고학에서 이제 주도적인 이론적 접근 방법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체계적 모형(paradigm)이 고고학에 응용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에 대해 작용해야 할 것이다.
⑴문화란 자연 환경에 대한 인간의 놀랄 만한 적응 반응이다.
⑵문화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정한 조건으로 특징지어지고, 집단적인 것이며, 유형화되고, 축적되고, 전이되는 것이다.
⑶그래서 문화는 “체계적(systemic)”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문화의 진화(문화-과정 설명이 아니라)가 고고학의 주된 목표이고 ‘정치적 역사’같은 편협한 종류의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면,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접근 방법이 체계적이어야만 한다.
현재의 연구 단계에서 우리는 인구 통계학의 역량 성장과 함께 고대 팔레스틴의 정착 유형과 생활 양식 체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복구해 왔다. 몇가지 유용한 증거가 이제 얻어졌지만 아직 사회 조직의 재구성은 시작 단계이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소홀히 취급되어 왔고, 명백히 그것들은 특히 선사 시대의 추측에 대한 가장 만만치 않은 하위 체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발전은 있었고 특히 대중적 제의(cult)를 조명하는데 진전이 있었다.
1960,70년대 미국 신고고학을 특성 짓는 나머지 경향은
⑷민족 고고학(ethnoarchaeology)의 사용 혹은 먼 과거의 고고학적 흔적을 설명하기 위해 아직도 잔존해 있는 원시 문화를 묘사해서 유추하는 것
⑸진화되는 모델에 의존해서 문화적 변화를 설명하려고 다선 궤도, 인간 행위의 독특한 성질, 인간 진화에 대한 강조와 함께 생물학적 진화를 묘사하는 것.
⑹비교 문화 분석과 교차 문화 분석을 통해 식별된 문화적 과정의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과 함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의 모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⑺문화적 과정에서의 보편적 법칙을 테스트하고 정식화하려고 가정된 주된 목표와 함께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아주 과학적이거나 독단적인(nomothetic?) 접근 방법의 선호 등이다.
이들 중 후자의 네 경향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얼마간 영향을 끼쳤지만 처음 세 경향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신세계 고고학’의 신조(원칙)들은 우리 분야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그들의 오랜 역사와 대단히 복잡한 사회계층론과 함께 ANE(Ancient Near East)의 고분에 그들을 적용시키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우직스럽게 차용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발전해 온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같은 경우에다 이론적 틀을 제공해 온 1960년대 미국 신고고학의 주된 경향이었음은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독립된 전공을 향하여?
우리가 1970년대 초 미국,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의해 무언가 논의하고 제안했던 상당수 경향들은 독립된 학문으로의 위상을 향하던 Albright-Wright시기를 특징 짓는 성서 연구의 지배 아래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성서 고고학 운동의 지배는 신고고학의 도전이라는 형태의 외적 발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신학적 형태 모두의 내적 약화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특히 족장 시대, 정복 시대 같은 성서적 전승의 에피소드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되는 고고학의 목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Albright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하나이며 성서 고고학의 훌륭한 변호사인 D. N. Freedman은 최근 존경받을 만한 공평성으로 인정받았다:
성서를 고고학의 토대에 확고히 정초시키려는 Albright의 원대한 계획과 기대는 실패한 듯이 보이고, 적어도 허덕이는 듯이 보였던 실증할 수 있는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결국 모든 발굴은 행해졌었고, 행해진 것 그리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얼마나 많이 수행되어져 왔나? 성서에 대한 고고학의 관련성에 관한 격심한 토론과 논쟁 그리고 그 역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많은 이슈들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이 족장과 족장 시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회의적인 목소리가 이제 그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올부라이트주의자의 종합(synthesis)이 벗겨졌고 지금까지보다 해결로 좀 더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고고학은 가장 자주 질문되어 왔던 물음을 대답하는 데 아주 유용하거나 결정적인 증명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특별히 초기 시대의 성서적 인물과 성서적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2-1.성서 고고학 운동의 붕괴 회상해보면, 고고학적 ‘혁명’이 Albright와 그의 추종자들이 단지 구체화하지 못함으로써 이리저리 상상되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성서 고고학’의 사망(demise)은 성서 신학의 죽음에 대한 많은 토론과 일치한다는 것은 논의해 볼 만하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 고고학이 좀 더 특징적이고 전문적인 세속 학문 용어인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으로 대치되어 불려져 왔다. 의미론적 혼돈의 결과 혹은 위협적인 아마추어와 성서학자의 감정적인 과민 반응의 많은 부분에 대해 처음으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두 고고학의 투쟁’(Glock의 용어)에서 시리아-팔레스틴이 승리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양상은 어느 곳에서나 명백하다. 성서 고고학의 오래된 옛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꽤 남아 있지만 사실상 미국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러한 고고학을 할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조차도 말이다. 그 분야를 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특징 지워진다. ⑴특수화(specialized) ⑵전문화(professional) ⑶세속화(secular)
2-2.추정되고 있는 전공(과목)으로서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연구 분야는 이것을 포함할 때 전공과목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⑴연구되어진 독특한 현상의 분류와 과업에 적절한 자료. ⑵특정 방법과 표준이 파생되어진 타당한 이론에 부합하는 체계(body). ⑶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가적 학문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 그룹. ⑷직원을 교체할 만큼 충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 ⑸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인수해야 할 필수적인 재정 지원. ⑹단결된 정체성의 장려, 합작 계획의 촉진, 표준의 보증, 전공의 관심을 촉진시키는 전문적인 기구. ⑺결과의 유포와 발표를 위한 적절한 기구. ⑻자의식적으로 연결된 다른 전공들에 잘 훈련되어진 관계, 그리고 ⑼사상의 시장과 연구 기관에 겨룰 수 있는 전공이 되도록 해주는 적절한 대중 지원.
자세한 기록 없이도 현재 발전 단계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겸손함으로 이들 모든 표준을 만날 것이라고 강조된다. 사실상 이들 테스트 중 몇몇은 오래 전 ‘성서 고고학’때부터 있었고 나머지는 전공을 창조하려는 현재 세대의 성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 만나 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신출내기이지만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전공 분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측은하게도 조그맣게 남게 되고, 미래는 결코 세속적이지 않다고 하는 반면에 성서 고고학은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성서학 분과 혹은 특별히 성서 고고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크로스,1973). 다른 학자들은 두 유형의 고고학이 전적으로 전공 학과의 지위를 획득해 왔거나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3.전공 학문 사이의 대화 가능성
최근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근본적인 물음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분리된 전공과목이 되거나 되어야 하는지 혹은 아직도 그것의 부모 전공인 ANE와 성서학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오늘날 고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드러내고 빈곤한 논쟁을 영속화시킬 뿐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몇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가장 단순한 것으로 성서 고고학의 이론과 목적이 성서나 성서의 땅을 단순히 설명하려는 것이다(고고학은 단순히 역사의 보완이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에 숙달됨으로써 인문과학과는 떨어져 있는 단순한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혹은 전문가주의는 전공 학과에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등).
다른 학문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ANE나 성서학에 대한 배타적 의존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것의 내적 역동성에 따라 일반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늘날 모든 고고학의 학문 상호간의 관련이라는 특성을 강조해 왔다. 물론 이 대화의 파트너로 아직 ANE와 성서학이라는 부모 학문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과학의 많은 분야도 역시 포함한다(특히 인류학과 점증적으로 자연과학 분야도).
그 의도는 학문을 편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넓히려는 것이다; 성서학과의 대화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려하려는 것이다. 새롭고 건실한 기초에서 고고학과 함께 이것은 이제 동등한 파트너가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격차가 허용되는 특수화의 정도와 신선한 관점과 함께 독립선언이 과거 10여년간 고고학에서 일어난 반면 새로운 대화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다른 학문이 발전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적절하다. 즉 어떻게 그들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재형성하고 연결된 다른 학문과 새로운 제휴 형태를 재형성했는지 관찰하는 것. 여기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고전적 작품은 가장 교훈적이다. 쿤은 시대별로 혁명이 내적, 외적 변화에 기인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지향이 뒤집어진 결과로서 전공 학문에서 유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실용적인 관심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다. 규범 과학의 시기 이후 소장 전문가들의 주류가 과학을 수행하는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는 동안 성립되어 있는 관점이 도전 받는 과정으로 경쟁하는 범주, 패러다임 사이에서 투쟁이 연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코 전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주류의 공감대가 추구될 때 규범 과학의 새로운 단계는 머지않아 성취되어져 왔다고 이야기되어지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반복되어질 것이다.
쿤의 유추(analogy)에 대하여 우리는 1970-1985년 시기에 증언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서의 참된 혁명을 논할 수 있다. 더군다나 포괄적인 지적 기반 작업(즉 이론)의 정초는 아니다. 아직 뛰어난 결과를 가져 올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들이 아직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세대의 투쟁에 의해서 뒤따르는 쿤의 ‘패러다임의 이동’이란 것이 일어났다. 이 발전은 1950년대-1960년대의 층위학(stratigraphic)의 혁명에 뒤이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4번째 혁명’을 구성한다고 다른 곳에서 논쟁되었다(데버 1988).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연구 과정으로 산출된 새로운 자료로 논쟁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길 원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규범 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혁명 이후’고고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위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이슈들은 종종 이런 양식으로 제기되어졌다. 아직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ANE, 성서 역사나 인류학의 한 분과로 남아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오늘날 고고학의 어떠한 학문의 분과도 아니다. 고고학은 어떤 학문의 보조 과목이 아니라 전공 학문 그 자체이다. 제시된 2개의 학문 중 선택하라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최근, 인류학 쪽에 좀 더 밀접해져 왔다. 이것은 많은 이로움 때문에 관련되어진 것이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성취한 가장 인상적이고 유익한 것은 오늘날의 그 학문이 근동 혹은 중동에서 종교학, 역사, 고전, 인류학 분야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북미 고고학의 몇몇 학과에서도 후자의 발전(nonareal(비지역)의 확립 모두를 포함하는 고고학, 독립적인 인류학, 근동학 혹은 고전적인 학과)은 고고학이 오늘날 생존에 적합한 학문적인 전공 과목이 되었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아직도 많은 지엽적 문제(context) 때문에 즉 부차적 문제 때문에 ANE와 성서학을 끌어들이지만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점점 더 분석 과정을 위해 자연과학을 추구하고 그것의 이론적 지향을 위해 인류학과 다른 사회과학을 추구한다. 역사, 인류학 혹은 과학이라는 꼬리표로 고고학을 한정시키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고고학의 여러 국면의 다양성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은(인류학처럼) 많은 다른 학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공헌도 한다.
- 미래의 모습(shape)
우리는 이미 비유를 사용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그의 시대가 도래한 위엄 있는 부모의 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젊은 성인의(adult) 미래는 어떨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전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먼저 외적 환경, 즉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자.
3-1.외국 현장 작업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서, 원래 연구와 혁신된 가르침에 공헌하는)중동에서 가능한 틀(framework)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과거 중동의 모든 고고학 발전을 선도해 왔다면 오늘날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많은 나라로부터 배척까지 받고 있다. 단지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에서만 미국인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할 뿐이다. 그러나 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의 역할은 그 분야를 주도하려는 그 국가들의 학자들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학자들은 강력한 우선권(발굴현장의 지속적인 접근과 선택, 국가적 규모의 작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자유, 정부 부처, 대학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의 장기적인 지원, 다양한 연구 장려책, 거의 발표되지 않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종교 고고학을 통해 국가 의식과 정체성을 초래하는 점점 계몽되는 대중들, 수백의 안전하고 전문적인 지위 등)을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의 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가장 훌륭한 외국의 방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것을 더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며 부족한 기금과 인력은 외국(특히 미국)과의 합작 사업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이 발전 지역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조건(급격한 현대화와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 폭력적인 반미 감정과 함께 종교적 열광주의와 함께 결합된 이 지역의 국가주의와 극단주의의 태동)이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 더 불길한 것은 고고학의 몇 가지 극단적인 요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이다. 일부 아랍에서의 이슬람 형제애와 이스라엘의 초정통주의는 현장에서 고고학자를 애먹이고 기념물을 파괴하고 발굴을 금지하도록 공작한다.
미래에 미국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권이 우리로부터 토착의 국가주의 학자들에게로 넘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미국 고고학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비이익적 학자’로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다. 둘째,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우리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 국가의 학자들의 노력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보완적인 연구를 발전시켜야 한다(특별히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히 대하는 유적, 시기, 문제에). 셋째, 비문자적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보여지는 협력과 연합 계획에 좀 더 참여하는 것이다.
3-2.고국에서의 학문(The Discipline at Home)
a.몇 가지 실제적인 고려들
우리가 과거 20년 혹은 풋내기 학문으로서 그것을 확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성서적 고고학이 미국에서 누려 왔던 상당한 대중적 지원을 유지하고 획득하려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위상으로 마지막 변형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 현장 작업의 전업(full-time)전문가들의 연구와 가르침을 위한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타임 직업을 고용(유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둘째, 우리 연구의 기본 형태인 현장 작업과 출판을 위한 기금을 필요로 한다. 셋째, 더 긴급한 것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참된 학문적인 과목이 되기를 열망하느냐의 여부이다. 넷째,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필요, 학습된 단체들의 강화와 전문적인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1900년 이래로 성서학의 많은 측면과 함께 고대 근동 언어학,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봉사해 온 동양연구미국연구소(ASOR)가 이제 아주 중대한 다른 영역에서, 즉 더 넓은 차원에서 고고학의 장려와 미국 대중교육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미국만이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과 지원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새롭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연구 기관으로 사상의 혼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주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모토는 ‘수도원 밖으로, 학문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시장에서조차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b.이론적 고려들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항상 이론과 방법의 중요성을 각성하는데 불충분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엔 미국 고고학자들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헌과 비교되어, 놀랍게도 우리 분야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도서 목록이 실제로 없으며 지금도 비평적 토론도 거의 없다.
연구를 위해 선택되어진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조사 양식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방법이 이론이다’라는 사실이 분명히 간과되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고발은 이론적 틀이 부족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정들(⑴고고학이 아니라 성서 역사와 신학에서 이슈를 끌어낸다. ⑵거의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비평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닌 가정)이다.
우리는 해석적인 이슈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거의 모든 발견에 대한 해석이 많은 지성들 사이에서 이들 과목을 특징지어 온 생생하고 격렬한 논쟁으로 끝없이 논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가장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대체로 학문이 참된 고고학적 인식론을 개발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즉 기본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역사적 고고학’조차도 이 접근 방법엔 불충분했다.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어졌고 결론은 끄집어내어지고 논쟁되었다. 또 해석은 발전했다(역사를 언급하는 모든 기초에 대해). 그러나 역사라는 것과 현대 사료 편찬 방법은 거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인 고고학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가 의미하는 것을 거의 명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고학은 최소한의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적절한 고고학적 인식론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들 같이 명백한 질문들에 직면할 것이다(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유적 형성 과정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상황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가? 고고학적 자료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유비(analogy)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특한 고고학적 논리는 있는가? 우리는 문화 유물로부터의 반응(behavior)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나? 무엇이 문화와 문화 변화를 결정하는가? 등). 인식론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자료의 질을 결정한다. 유물들은, 그것들이 상황(context)속에서 적절히 발굴되어지고 적절한 질문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질 때, 그리고 출판되어질 때에야 자료(data)가 될 수 있다. 고고학은 엄격하게 조직적이고 축적된 이론을 세우고,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인간적이거나 과학적인 학습의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우수한 이스라엘 역사가와 고고학자 베냐민 마자르에 의해 쓰려진 팔레스틴의 중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초기 논문은 이제 아주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역사로 구분되었던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지향점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본질적인 것으로 연구하는 것, 즉 정주 형태, 기술, 사회, 경제적 역사와 인구 통계학에 관련된 언급은 없다. 미학적이고 종교적인 것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문화라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Kenyon에 의해 쓰여진 유명한 CAH에서도 중기 청동기 시대 연구는 강조점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 Kenyon과 Mazar는, 이들 이슈가 196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잘못된 질문을 물어 왔기 때문에 혹은 아주 유용한 자료의 전체 범위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부적절한 질문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에 그 자료는 쓸모가 없다.
wheeler-kenyon의 층위학 방법은 정확한 위치를 분리할 만큼 경험적으로 지표층(soil layers)의 관찰, 기록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팔레스틴의 평범한 도자기는 도자기 연대를 꽤 정확하게 집어내도록 하는 도자기의 유형화 된 발전 단계를 챠트화 할만큼 거의 분석되고(장식과 모양이) 분류되어졌다. 그러나 극히 작은 예를 제외하고서는 도자기는 우리의 역사, 기술, 미학, 국제 관계, 무역, 즉 문화와 문화 변화에 대한 지식에 공헌한다는 관점으로 연구되진 않았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문화 변화 자체의 모델들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도자기 집합’이란 말과 항상 마찬가지 의미이다. 주요 민족운동과 외국 침입은(즉 역사적 사건) 고대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용되어졌다. 토착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들, 기술적 혁신, 혹은 다른 의미로 일반적인 지역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층위학과 도자기 연대측정학의 숙달에 의해서 혹은 완벽한 현장 기술에 의해서는 그리 많이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식론이 좀 더 정교해짐으로써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 ‘정치적 역사’의 대체 모델은 거대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밑으로 거대한 우연적인 대중적 사건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휘두름을 넘어, 셀 수 없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역사를 쓰는 아날(annales)학파로부터 유래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고고학은 아날학파의 역사가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광범위 한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잘 가공된 개인적인 역사로 써서도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생태학적이고 환경(setting)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 변화에 대한 민감함 때문에 모든 학문 사이에서 독특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초점의 범위를 우리가 넓히는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고고학 일반 분야와 인류학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통합시키는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중추적인 지정학적 상황, 위대한 문명 발상지, 급격히 성장하는 데이터 베이스와 함께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그 지역에 훨씬 강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연구의 오랜 역사, 성서의 땅으로서 엄청난 대중적 호소력(appeal) 등의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류학자와 사회역사학자들은 사례 연구로서,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리아와 비교하는 사례 연구로서만 전형적으로 팔레스틴을 무시하는 교차-문화적 비교를 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소홀한 부분은 단순히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서적 경향을 지닌 세속주의자가 원인이다. 그 부분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 자료의 질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최근의 더 나은 작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과거의 불충분한 발굴에 기인한다. 그들은 주요 잡지를 읽거나 출판하지 않았고 전문가 모임이나, 다른 고고학적 인류학적 조직의 연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근동 선사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신세계와 유럽 고고학이 수행해 왔던 대학 인류학과의 프로그램을 가르치거나 나누지도 않았다.
세계 고고학의 최근-현재의 이슈는 다음과 같다. ⑴복합적인 사회의 흥망성쇠 ⑵문화적 변화의 재구성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균형 ⑶고고학/인류학의 사회학적 역사 ⑷공간-시간 체계론, 인공물의 다양성, 문화적 유형, 행위의 구체적인 상호 관련 ⑸유적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기록의 성질 ⑹민족성에 있어서 고고학적 정체성. 덧붙이자면 신고고학의 몇 가지 이론적 공격은, 정착 유형, 생활 양식, 사회 구조, 인구 성장 같은 특정 질문들을 반성하게 한다. 시리아-팔레스틴의 냉정한(공평한) 조사 방법이나 일반적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문학에서의 비교 인용 분석은 우리가 이를 핵심 이슈의 토론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소장 고고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만드는 과업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지향점을 발생시킬 것이다.
3-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해야 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 2장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나오는 말
1장에서는 일반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의 태동 과정을, 2장에서는 Dever의 논문 요약을 통해 고고학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를 하였다.
고고학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장의 바른 보전과 각종 기술이 발달해야 하고, 또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서 고고학에 대한 일반학자들의 오해와 편견에 따라 기독교의 지원이나 참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고고학의 가치와 제한성이다.
고고학이 우리에게 과거 성서 시대의 사안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성서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도 W.F. Albright, G. Glock, Toombs, Moory 같은 상당수 전문가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현재 논문(present essay)은 ⑴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 ⑵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고심(elaboration) ⑶미국 학파의 특색 있는 접근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통용되는 인문과학의 범위(state of art)를 설명함으로써 토론을 새롭게 하려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일반적인 오리엔테이션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보다 쉽게 특정 유적, 연대, 주제 등의 목록에 대한 고고학의 최근 결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느 곳에서나 적절히 행해지고 있는 발굴 기술 같은 고고학 분야의 방법론에 대한 미세한 최근의 발전을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좋은 field고고학을 구성하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몇몇 설명의 말들은 제한적이고 과도하게 이론적인 접근으로 간주될 것이다.
1.이론적 경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신중하고 실용적이다. 그것이 자주 그럴지라도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개념적 틀을 바꿈으로써 시리아-팔레스틴 그리고 성서 고고학을 정초할 뿐이다.
고고학은 단순히 골동품을 추적하고 환상적인 유물을 발견해 내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인간 경험을 꿰뚫고 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이론(speculation)이 아니라 고고학을 고고학 그 자체로 보는 기본적 방법으로써의 이론(theory)은 분명히 근본적인 것이다.
2.미국인의 지적 지평을 강조하는 변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의 공헌이 추측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논문이 대다수 미국인인 청중을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더욱이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자체라는 것은 없다. 미국, 유럽, 중동의 다양한 학파들은 (항상 변화되는 독특한 방법 안에서) 제각각 구별되는 문화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고고학이 미국에서 최근 발전해 온 특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것이다.
- 신 고고학의 성숙기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첫 번째 경향은 우리 분야에서 근본적으로 변혁되었다. 과거 10여년 동안 상당수 방법들은 우리의 고고학 분과에 대한 미국 학자 군의 1960년대 신 고고학의 뒤늦은 충격을 분석해 왔다(데버, 글록, 툼브). 그런 류의 경향은 이제 잘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연구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신세계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의 개척된 다양한 이론적 방법론적 교리들은 연구 계획(resaerch design), 현장 답사(field work)와 분석 그리고 중요한 출판에 영향을 주었다.
1.복합 학문적(Multidisciplinary) 접근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 관점이라고 여겼던 단순히 건축학적, 요업(ceramic)적 국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유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과거 생활양식의 흔적, 환경학적 변화의 증거, 고고학적 기록에 우연히 주어진 모든 물질문명의 자료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 층위 학자와 도자기 전문가(물론 성서 역사 학자도) 원정발굴대가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많은 분야들을 동료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지리학자, 지형 학자, 기상 학자, 고식물학자, 고동물학자, 물리 학자, 문화 인류학자, 기술 역사 학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전엔 고고학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던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Gezer에서의 첫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은 이론적 재형성을 얼마만큼 나타내느냐 보다는 순전히 실용적인 차원이었다. 그 새로운 모습은 많은 햇수동안 불확실한 가설과 숨김없는 실험으로 남았고 명백하게 뛰어난 결과로, 완전히 요약되거나 통합된 마지막 보고서에 쓰일 정도는 아직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의 충격은 신고고학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 강하다. 이것은 아주 현학적인 연구 계획에서 특별히 찾아볼 수 있다. 동양 연구소의 미국 학파 위원회, 휴매니티를 위한 국립기금, 국립 지리 학회에서 연구하기 위한 시리아-팔레스틴(그리고 근동) 고고학자의 제안은 이제 근본적으로 복합전공적이다. 이들 제안 중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곳에서나 현대 고고학의 이론적 표준이 된다. 이런 것들은 아주 인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15년 전 만해도 고고학 분과는 종종 편협하고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차원에서조차 승인과 재정적인 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우리 시대가 온다는 징조이다. 그것은 다른 단순한 변화보다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편입시키는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의 채용 때문일 것이다. 복합전공적 접근이 유행을 일으킨 새로운 현장 방법들(firld methods)은 종종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그것들의 결과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거품을 일으키는 체(sieve)와 식물과 동물의 흔적을 구별해 내는 (꽃가루 분석 방법인)palynology와 고대 기후와 생활 수단과 음식물과 같은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 1970-80년대에 있었던 높은 수준의 미국의 복합 전공 계획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W. G, 데버와 R. 코헨의 중앙 네겝 고지 계획과 M. Meyers, C. Meyers, J. F. Strange의 Shema – Meiron – Nabratein계획과 J. D. Seger의 라합(Lahav)발굴; T. E. Levy의 Shiqmin 발굴; 그리고 텔 미크네에서 S. Gitin과 T. Dothan의 연합 계획을 선발해야 했다. 요르단에서 우리는 R. T. Schaub의 W. E. Rast의 Bäb edh-Dhrả-fson 발굴과; L. T. Geraty의 Madeba평지계획; G. Rolle Khirbet Iskander발굴; 그리고 S. Falcomer와 B. Boraas의 ness-Gardiner의 Tellel-hayyāt 발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2.생태학적 지향(An Ecological Orientation)
복합전공적인 교수진(Staffs)을 고용한 것은 필연적으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첫째로, 이것은 전문가 스텝들의 다양한 이론적 관심에 대체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대부분의 질문들은 고고학적 작업 자체에 의해 대답이 주어졌다. 이것들 중 대부분과 특히 고고학적 조사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들은 환경에 대한 발굴 현장(즉 그 문화)와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물음의 중심에 놓여졌다. 우선, 개인적인 고고학적 현장은 그들의 환경이나 다른 현장과의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왔다(몇몇 블레셋 발굴 현장-유적-은 네브라스카처럼 그들이 파고 발표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자들은 현장 사이(intersite)와 환경적 관계는 관심을 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당연히 가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실패는 아마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전통적, 역사적(즉 성서적) 지향에 더 기인했다. 그래서 문화적 변화를 위한 설명을 물질적 요인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곧 고고학이 주로 인류학적, 생태학적 지향을 차용하면서 어떠한 문화의 독특한 양식도 대체로 경제적인 요인들에 기인하고 이런 문화들의 양식(these)은 자연적 환경에 의해 빡빡하게 조건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란 지리학적 상황, 기후, 자연 자원에 대한 접근성, 무역 통로, 재료(raw, material) 경제적 결정론을 대하는 동시에 1970년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은 유적을, 문화/역사적, 자연적 상황이라고 하는 더 큰 틀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조사와 반론을 진화시키고 필요로 하는 주된 연구 전략은 지역적 스케일에서 수행되어졌다. 경제학적 지리학자에 의해 개발된 유용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정착지 유형 변화와 분배 형태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는 고대 기후와 기술적 적응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과 아직까지 우리 분야에서 수행되는 가장 진지한 인구 통계학 계획들을 재구성하려 한다.
이들 모든 질문들이 모든 계획과 전 기간 속에서 똑같은 긴급성을 가지고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 지향은 충만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그것의 개요에 앞서 그 분야를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전부 진행되고 발표되어 이제 축적되어 있는 환경적 자료(data)는 한 세대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전망을 열어 주고 여러 기간과 문제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줄 것이다. 다양하게 언급된 지표 조사(surface surveys)처럼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의 모든 발굴 계획은 현장 작업에서 더욱 새로운 생태학적 지향의 예가 될 것이다. 해석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미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일련의 논문들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서 로마 시대를 지나는 기간동안의 인구 통계학적 이슈를 다루어 왔다.
3.체계 이론(System Theory)
일반 체계 이론의 주의 사항 아래 평범하게 그룹 지어진 몇몇 전공학문들의 범주와 기본 원리의 채용은 복합 전공과 생태학적 접근 방법 모두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근본적인 원리는(postulate) 유기체적 상태(organized state)는 몇 개의 순응적인 하위 체계를 구성하고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전체라는 것이다. 이들 하위 체계는 모두 유기체적으로 미묘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역동적이고 상시적으로 변화하는 균형(equilibrium) 때문에 체계의 어떤 부분의 변화는 체계의 축소하는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s)와 일탈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정보와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의 균형에 의존함으로써 체계들은 높은 차원의 통합을 포함하는 항상성(homeotasis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혹은 전부를 약화시키든지.
원래적으로 생물학적 현상 연구에 적용되는 동안 체계 이론은 경제학, 통계 관리, 사회 계획 등을 포함하는 인문주의적 연구의 많은 측면에 점차 더 적응해 왔다. 최근의 사례 분석은 체계 이론이 미국 고고학에서 이제 주도적인 이론적 접근 방법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체계적 모형(paradigm)이 고고학에 응용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에 대해 작용해야 할 것이다.
⑴문화란 자연 환경에 대한 인간의 놀랄 만한 적응 반응이다.
⑵문화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정한 조건으로 특징지어지고, 집단적인 것이며, 유형화되고, 축적되고, 전이되는 것이다.
⑶그래서 문화는 “체계적(systemic)”인 것이다. 즉 문화란 이데올로기와 같은(예술 철학 종교를 포함하는) 정치적 조직, 자연적 거주지, 기술, 경제적 전략, 혈족 관계, 사회 구조와 관련된 지역 정착 같은 많은 하위 체계들의 작용(operation)이 고고학적 기록에 동등한 흔적을 남겨 놓지는 않았다(텍스트가 없는 철학과 종교의 재구성같이). 물질적 유물(remains)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유형화 된 인간 사상과 행동의 반성인 한, 고고학적 기록은 관습의 물질적 상호 관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고고학자들은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 흔적을 남겨 놓은 모든 다양한 하위 체계들의 성질, 효과, 상호작용을 식별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복합전공적, 생태학적 접근 방법은 더 나은 고고학적 기록을 개척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했다. 요약하자면, 문화의 진화(문화-과정 설명이 아니라)가 고고학의 주된 목표이고 ‘정치적 역사’같은 편협한 종류의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면,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접근 방법이 체계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론과 이론적 해석은 나무랄 데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어려움들이란 전형적인 중동 고분에서 보존되어 온 고고학적 기록이 불완전한 성질이라는 것이다; 무언의 가공물로부터 문화적 유형을 추론하는 위압적인 전망, 그리고 과거나 현재의 인간사회 체계의 완전한 고집스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 접근 방법은 충분히 실제적이고 여기 머무를 것 같은 발견을 돕는 이득이 있다. 위에서 기록 한대로, 하위 체계에 대한 관심이 더 나은 연구를 조직하는데 효과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라면 더 편리한 범주에 따라 더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사회 경제와 관련된 특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 현재의 연구 단계에서 우리는 인구 통계학의 역량 성장과 함께 고대 팔레스틴의 정착 유형과 생활 양식 체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복구해 왔다. 몇가지 유용한 증거가 이제 얻어졌지만 아직 사회 조직의 재구성은 시작 단계이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소홀히 취급되어 왔고, 명백히 그것들은 특히 선사 시대의 추측에 대한 가장 만만치 않은 하위 체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발전은 있었고 특히 대중적 제의(cult)를 조명하는데 진전이 있었다.
복합 전공과 체계적 접근 방법에 의해 이제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자료들은 쉽게 관리될 수 없고, 존재하는 시스템들과 아주 적게 발표된다는 장애가 있다. 고고학의 컴퓨터화(전산화)는 정보의 기본적인 기록과 다양하게 변하는 통계분석 모두에 명백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년전 고고학 분과에서 ‘컴퓨터 혁명’이라고 불렸던 예측은(데버에 의해 1976년에)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1960,70년대 미국 신고고학을 특성 짓는 나머지 경향은 ⑷민족 고고학(ethnoarchaeology)의 사용 혹은 먼 과거의 고고학적 흔적을 설명하기 위해 아직도 잔존해 있는 원시 문화를 묘사해서 유추하는 것 ⑸진화되는 모델에 의존해서 문화적 변화를 설명하려고 다선 궤도, 인간 행위의 독특한 성질, 인간 진화에 대한 강조와 함께 생물학적 진화를 묘사하는 것. ⑹비교 문화 분석과 교차 문화 분석을 통해 식별된 문화적 과정의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과 함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의 모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그리고 ⑺문화적 과정에서의 보편적 법칙을 테스트하고 정식화하려고 가정된 주된 목표와 함께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아주 과학적이거나 독단적인(nomothetic?) 접근 방법의 선호
이들 중 후자의 네 경향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얼마간 영향을 끼쳤지만 처음 세 경향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민족 고고학(ethnoarchaeology)은 자신의 명백한 역량과 초기부터 작은 스케일로 보통 수준의 적용을 했음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우리 분야의 숙련자 부분에서 인류학적 민족지학적 훈련의 부족으로 설명될 수 있고, 또 부분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아주 원시적이어서 고대 수준 높은 문명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 원주민 관습을 무시 한데서 설명될 수 있다. 혹은 성서적 배경으로 주어진 어떤 양식의 ‘진화’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에겐 저주(anathema)였다(비록 그 경향이 의식적인 거부보다는 경직되거나 게으르다는 문제였지만).
행동주의 심리학자-과정 주의자와 nomothetic학파들은 단지, 너무 난해하다는 이유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대부분은 생물학적 영역과는 달리 인간 본성의 영역은 예언에 의한 증명이라는 그들 주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법칙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거부해야 했다. 역시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문화가 설명이 아니라 적절히 기술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고고학적 기록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든 없든 의심의 공간은 있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 문화적 과정에 대해 충분히 우리를 깨우치는 전적인 탐구가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 많은 경우, 고고학이 참된 ‘과학적 방법’을 갈망할 수 있느냐가 기본적 물음이 되어 왔다. 반면에 고고학에서 현재 통용되는 논의는 lan Hodder의 신랄한 비판과 그가 후기 과정주의 접근 방법이라고 부른 역사학적 고고학과 밀접히 관련된 방법에 의해 행동심리주의자와 nomothetic학파로부터 얼마간 비껴 나가게 되었다.
보다 급진적인 것은 포스트 모던과 사회적으로 자작된 고고학을 논쟁한 Shanks와 Tilly의 신 마르크스주의 작품인데 – 그것의 관점은 평론가가 ‘순수의 상실’이라고 작품의 충격을 말할 정도로 아주 혁신적이다. 이런 식으로 1970-80년대 신고고학은 우리가 그것을 따라잡기도 전에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우리 분야의 아주 모호한 회의주의는 성서 시대에 고대 팔레스틴 특히 이스라엘은 독특하다는 가정-문화적 진화라는 기본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뭔가 초역사적이라는-에 있다. 보다 노골적인 그것의 형태는 세속적 역사의 거부라는 단순히 종교적 근본주의이다. 그러나 말을 좀 더 현학적으로 바꾸더라도 특별한 변명(pleading)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신고고학의 이들 후기의 측면들에 대해 진실되고(꽤 그럴싸한) 의혹들이 배타주의자 혹은 의심 없는 믿음으로 충족되어지는 역사적 진술에 찬성하여 무시되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신세계 고고학’의 신조(원칙)들은 우리 분야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그들의 오랜 역사와 대단히 복잡한 사회계층론과 함께 ANE의 고분에 그들을 적용시키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우직스럽게 차용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발전해 온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같은 경우에다 이론적 틀을 제공해 온 1960년대 미국 신고고학의 주된 경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전공이 성숙했기에 내적인 지적 자극으로 ‘혁명’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은 그 경우가 아니다.
B.독립된 전공을 향하여?
우리가 1970년대 초 미국,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의해 무언가 논의하고 제안했던 상당수 경향들은 독립된 학문으로의 위상을 향하던 Albright-Wright시기를 특징 짓는 성서 연구의 지배 아래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성서 고고학 운동의 지배는 신고고학의 도전이라는 형태의 외적 발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신학적 형태 모두의 내적 약화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특히 족장 시대, 정복 시대 같은 성서적 전승의 에피소드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되는 고고학의 목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Albright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하나이며 성서고고학의 훌륭한 변호사인 D. N. Freedman은 최근 존경받을 만한 공평성으로 인정받았다:
성서를 고고학의 토대에 확고히 정초시키려는 Albright의 원대한 계획과 기대는 실패한 듯이 보이고, 적어도 허덕이는 듯이 보였던 실증할 수 있는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결국 모든 발굴은 행해졌었고, 행해진 것 그리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얼마나 많이 수행되어져 왔나? 성서에 대한 고고학의 관련성에 관한 격심한 토론과 논쟁 그리고 그 역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많은 이슈들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이 족장과 족장 시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회의적인 목소리가 이제 그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올부라이트주의자의 종합(synthesis)이 벗겨졌고 지금까지보다 해결로 좀 더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고고학은 가장 자주 질문되어 왔던 물음을 대답하는 데 아주 유용하거나 결정적인 증명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특별히 초기 시대의 성서적 인물과 성서적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1.성서고고학 운동의 붕괴
회상해보면, 고고학적 ‘혁명’이 Albright와 그의 추종자들이 단지 구체화하지 못함으로써 이리저리 상상되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 세대 후 미국 성서학자의 주류는 Albright 같은, 더 나아가 대륙학자의 경향, 특별히 처음부터 미국스타일의 ‘성서고고학’이라는 의심스러움이 남아 있던 독일학파같은 복고(반동)적이고 실증적인 경향으로부터 탈피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성서고고학’의 사망(demise)은 성서 신학의 죽음에 대한 많은 토론과 일치한다는 것은 논의해 볼 만하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 고고학이 좀 더 특징적이고 전문적인 세속 학문 용어인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으로 대치되어 불려져 왔다.
의미론적 혼돈의 결과 혹은 위협적인 아마추어와 성서학자의 감정적인 과민 반응의 많은 부분에 대해 처음으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은 특별히 더 젊은 세대이다. 또한 열광적으로 ‘신고고학’을 주장해 온 가장 초기의 성서 고고학자도 포함해서 말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이행이 놀라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지적, 이론적 혁명이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는 데 기인한다; 신고고학은 자유로운 연구와 보다 짜릿한 결과를 약속했기 때문에 유쾌할 수 있었다. 항상 실용적이었던 미국,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위기와 변화의 시기에 자신의 안정성의 많은 부분을 이 곳에 남겨 두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두 고고학의 투쟁’(Glock의 용어)에서 시리아-팔레스틴이 승리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양상은 어느 곳에서나 명백하다; 유형적 제안에서, 중동의 거의 모든 계획에서도; 잘 나가는 잡지의 논문에서도; 국가적인 전문가 모임에서도, 그리고 연구의 끊겨진 가장자리가 보이는 몇몇 대학원 프로그램에서도 성서고고학의 오래된 옛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꽤 남아 있지만 사실상 미국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러한 고고학을 할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조차도 말이다. 무엇이 발생했는지는 지난 10년간을 주의함으로써 잘 요약할 수 있다. 혹은 아직 아버지 시대의 의식이 남아 있더라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시대가 온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잘 정리될 수 있다. 그 분야를 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특징 지워진다. ⑴특수화(specialized) ⑵전문화(professional) ⑶세속화(secular)
2.추정되고 있는 전공(과목)으로서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성서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성서적 고고학에 대한 논쟁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전공 학문이 되었다는 증거로 다루어질 수는 있다.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전공 학문이 규범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아래의 기준을 제안할 것이다. 연구 분야는 이것을 포함할 때 전공과목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⑴연구되어진 독특한 현상의 분류와 과업에 적절한 자료. ⑵특정 방법과 표준이 파생되어진 타당한 이론에 부합하는 체계(body). ⑶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가적 학문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 그룹. ⑷직원을 교체할 만큼 충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 ⑸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인수해야 할 필수적인 재정 지원. ⑹단결된 정체성의 장려, 합작 계획의 촉진, 표준의 보증, 전공의 관심을 촉진시키는 전문적인 기구. ⑺결과의 유포와 발표를 위한 적절한 기구. ⑻자의식적으로 연결된 다른 전공들에 잘 훈련되어진 관계, 그리고 ⑼사상의 시장과 연구 기관에 겨룰 수 있는 전공이 되도록 해주는 적절한 대중 지원.
자세한 기록 없이도 현재 발전 단계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겸손함으로 이들 모든 표준을 만날 것이라고 강조된다. 사실상 이들 테스트 중 몇몇은 오래 전 ‘성서 고고학’때부터 있었고 나머지는 전공을 창조하려는 현재 세대의 성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 만나 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신출내기이지만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전공 분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측은하게도 조그맣게 남게 되고, 미래는 결코 세속적이지 않다고 하는 반면에 성서 고고학은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후자는 대중적이거나 진지하거나 전공 상호간의 연구 즉 상당수 전공들 사이의 대화로서 더 잘 상상되어진다. 그러나 전공 분야의 문제는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몇몇 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성서학 분과 혹은 특별히 성서 고고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크로스,1973). 다른 학자들은 두 유형의 고고학이 전적으로 전공 학과의 지위를 획득해 왔거나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전공 학문 사이의 대화 가능성
최근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근본적인 물음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분리된 전공과목이 되거나 되어야 하는지 혹은 아직도 그것의 부모 전공인 ANE와 성서학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오늘날 고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빈곤한 논쟁을 영속화시킬 뿐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몇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은 성서 고고학의 이론과 목적이 성서나 성서의 땅을 단순히 설명하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의 논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이렇다; 고고학은 단순히 역사의 보완이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에 숙달됨으로써 인문과학과는 떨어져 있는 단순한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혹은 전문가주의는 전공 학과에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등.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에 대한 심각한 반대가 성서 역사가들로부터 배척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북서 셈족 히브리어 금석 학자(ephigrapher), 앗시리아 연구가, 텍스트 연구생, 그들은 그들 자신을 고도로 특화 시켰지만 주로 문화적 유물을 산출하는 고고학에 가치를 두었다. 이들 학자들은 동등하게 타당한 역사적 자료가 물질 문명의 유물에서 거의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날 고고학이 인문과학에 가치 있고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지점이다.
실제로 이들 모두와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에 대한 다른 반대들은 1970년대초 신고고학의 원초적 혹평을 상기함으로써 쉽게 제거된다. 아른 학문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ANE나 성서학에 대한 배타적 의존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것의 내적 역동성에 따라 일반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늘날 모든 고고학의 학문 상호간의 관련이라는 특성을 강조해 왔다. 물론 이 대화의 파트너로 아직 ANE와 성서학이라는 부모 학문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과학의 많은 분야도 역시 포함한다. 특히 인류학과 점증적으로 자연과학 분야도.
그 의도는 학문을 편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넓히려는 것이다; 성서학과의 대화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려하려는 것이다. 새롭고 건실한 기초에서 고고학과 함께 이것은 이제 동등한 파트너가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격차가 허용되는 특수화의 정도와 신선한 관점과 함께 독립선언이 과거 10여년간 고고학에서 일어난 반면 새로운 대화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다른 학문이 발전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적절하다. 즉 어떻게 그들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재형성하고 연결된 다른 학문과 새로운 제휴 형태를 재형성했는지 관찰하는 것. 여기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고전적 작품은 가장 교훈적이다. 물론 쿤이 언급하는 점은 자연과학이지만 그의 논쟁은 사회과학에 적용할 때도 꽤 그럴싸하다. 쿤은 시대별로 혁명이 내적, 외적 변화에 기인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지향이 뒤집어진 결과로서 전공 학문에서 유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실용적인 관심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다. 규범 과학의 시기 이후 소장 전문가들의 주류가 과학을 수행하는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는 동안 성립되어 있는 관점이 도전 받는 과정으로 경쟁하는 범주, 패러다임 사이에서 투쟁이 연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코 전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주류의 공감대가 추구될 때 규범 과학의 새로운 단계는 머지않아 성취되어져 왔다고 이야기되어지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반복되어질 것이다.
쿤의 유추(analogy)에 대하여 우리는 1970-1985년 시기에 증언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서의 참된 혁명을 논할 수 있다. 더군다나 포괄적인 지적 기반 작업(즉 이론)의 정초는 아니다. 아직 뛰어난 결과를 가져 올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들이 아직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신고고학이 고고학을 수행하는 옳은 방법, 어떤 고고학적 해석에 대한 최종적인 진실을 처음부터 밝혀 내지는 않았다. 세대의 투쟁에 의해서 뒤따르는 쿤의 ‘패러다임의 이동’이란 것이 일어났다. 이 발전은 1950년대-1960년대의 층위학(stratigraphic)의 혁명에 뒤이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4번째 혁명’을 구성한다고 다른 곳에서 논쟁되었다(데버 1988).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연구 과정으로 산출된 새로운 자료로 논쟁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길 원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규범 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항상 ‘혁명’에 뒤이은 이론적 정식(formulation)들 때문에 그것은 역시 여기서 시도하고자 했던 반성과 비평적 평가를 위한 시간이 된다.
우리는 이제 ‘혁명 이후’고고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위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이슈들로 되돌라 갈 것이다. 그 이슈는 종종 이런 양식으로 제기되어졌다; 아직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ANE, 성서 역사나 인류학의 한 분과로 남아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오늘날 고고학의 어떠한 학문의 분과도 아니다. 고고학은 어떤 학문의 보조 과목이 아니라 전공 학문 그 자체이다. 제시된 2개의 학문 중 선택하라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최근, 인류학 쪽에 좀 더 밀접해져 왔다. 이것은 많은 이로움 때문에 관련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미국 고고학은 인류학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학문적인 분야(scene)에 대해서보다 자주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고고학은 우리가 주목한대로 그 성격에 있어서 상호 학문적이다. 그리고 고고학은 그런 사실에서부터 자신의 설득력과 타당성을 끌어내어야 한다. 이것은 지적인 이슈보다는 학문적인 편의성의 문제로 좀 더 다루어져야 한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성취한 가장 인상적이고 유익한 것은 오늘날의 그 학문이 근동 혹은 중동에서 종교학, 역사, 고전, 인류학 분야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북미 고고학의 몇몇 학과에서도 후자의 발전-nonareal(비지역)의 확립 모두를 포함하는 고고학, 독립적인 인류학, 근동학 혹은 고전적인 학과-은 고고학이 오늘날 생존에 적합한 학문적인 전공 과목이 되었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아직도 많은 지엽적 문제(context) 때문에 즉 부차적 문제 때문에 ANE와 성서학을 끌어들이지만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점점 더 분석 과정을 위해 자연과학을 추구하고 그것의 이론적 지향을 위해 인류학과 다른 사회과학을 추구한다. 역사, 인류학 혹은 과학이라는 꼬리표로 고고학을 한정시키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고고학의 여러 국면의 다양성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은(인류학처럼) 많은 다른 학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공헌도 한다.
C.미래의 모습(shape)
우리는 이미 비유를 사용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그의 시대가 도래한 위엄 있는 부모의 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젊은 성인의(adult) 미래는 어떨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전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먼저 외적 환경, 즉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자.
1.외국 현장 작업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서, 원래 연구와 혁신된 가르침에 공헌하는-중동에서 가능한 틀(framework)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많은 상황이 있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할 상황이 있음도 똑같이 명백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과거 중동의 모든 고고학 발전을 선도해 왔다면 오늘날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많은 나라로부터 배척까지 받고 있다. 그래서 터키, 시리아, 이라크에서 미국인 현장 조사는 거의 없고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걸프 국가, 이란에는 하나도 없고 단지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에서만 미국인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할 뿐이다. 이들 후자의 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의 역할은 그 분야를 주도하려는 그 국가들의 학자들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학자들은 강력한 우선권을 누리고 있다:발굴현장의 지속적인 접근과 선택; 국가적 규모의 작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자유, 정부 부처, 대학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의 장기적인 지원, 다양한 연구 장려책, 거의 발표되지 않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종교 고고학을 통해 국가 의식과 정체성을 초래하는 점점 계몽되는 대중들, 수백의 안전하고 전문적인 지위, 그 국가들의 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가장 훌륭하고 외국의 방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것을 더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데, 그들은 단지 적절한 기금과 인력이 부족해 보인다. 물론 이런 느슨함의 많은 부분이 외국과의 합작 사업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예를 들어 소위 합작 계획이라는 명목의 대부분의 예산이 미국에서 나온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일꾼들은 미국 학생 자원 봉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협정은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들은 고고학의 탐험에 아마추어를 제공하지만 독립된 학파로서 미국 고고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수의 전문가를 찾아내는데 도움이 되거나 훈련되지는 않은 것 같다. 식민지 이후시기에 외국 발굴자의 축소된 역할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학문의 미래에 나쁜 징조이다. 우리가 고안한 게임에 구경꾼으로 머물러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더 심각한 것은 실제로 원초적(즉 현장)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다. 게다가 국수주의의 위험에서 우리는 중동의 고고학에 유일하고 합법적인 미국의 이익이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우리의 지적, 정신적 뿌리 역시 거기에 있다. 미국 학자가 우리 최고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귀찮은 국가주의 학자들과의 점증하는 경쟁이 우선적이지는 않지만 결국 그럴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의 고고학 발전에도 성원을 보내야 하고 경쟁을 즐겨야 한다. 보다 더 큰 관심은 중동이 발전 지역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조건이다. 첫째는, 급격한 현대화와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이다. 이것은 지도로 그려지기 전에 수천년 된 고고학적 현장이 파괴된다는 것 뿐 아니라 인양과 발굴 작업에 천문학적 비용을 들게 할 것이다. 둘째는, 폭력적인 반미 감정과 함께 종교적 열광주의와 함께 결합된 이 지역의 국가주의와 극단주의의 태동이다. 아직도 장기적인 계획이 수행되고 계획되어지는 곳에서도 고고학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주의의 발전의 부정적인 측면 중 하나는 민족적 라이벌을 조장하거나 단순히 국가 정책에 봉사하게 하도록 고고학을 오용시키는 불행한 분위기를 쉽게 만든다는 것이다(이런 경향은 이미 아랍 세계에서 ‘범-회교 고고학’에 높은 관심을 보일 때 인지되었고 웨스트뱅크, 유대, 사마리아 같은 현대 이스라엘 거주 지역에서 고대 이스라엘 정착 흔적을 찾는데 높은 관심을 갖는 것에서 인식되었다). 더욱 더 불길한 것은 고고학의 몇 가지 극단적인 요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이다. 일부 아랍에서의 이슬람 형제애와 이스라엘의 초정통주의는 현장에서 고고학자를 애먹이고 기념물을 파괴하고 발굴을 금지하도록 공작한다. 만약 지역 고고학자가 전통적, 종교적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분노를 초래했다면 외국 고고학자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문명화 된 지도자들이 득세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중동을 쉽게 낙관할 수는 없다. 가까운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적어도 중동은 보다 더 정치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미국 고고학의 전적인 황폐화는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 같은 몇몇 국가에서 필요로 하고 환영받고 있다.
동양 연구의 미국 학자들은 넘쳐 나고 있고, 그래서 40개 이상의 미국인 현장 프로젝트를 제휴하듯이 이들 세 나라에는 고고학적 연구 기관들이 확장되고 있다. 이들 세 나라는 위에서 언급한 위협적인 발전을 반대하는 개화된 고고학과와 아주 유능한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미래에 미국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권이 우리로부터 토착의 국가주의 학자들에게로 넘어가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이국 고고학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개인적으로 따뜻하고 감정적으로 연결됨을 느끼는 환영받아야 할 우리의 포위되어 있는 지역의 친구들을 실망시키더라도. 우리는 ‘비이익적 학자’로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다. 최근 미국 고고학에서 보다 세속적인 학자의 출현은 고고학을 위험하게 했던 감정적이고 종교적인 동기들을 거부하도록 도울 것이다(초기 많은 고고학자들의 전형적인 개신교 정신은 이스라엘에서의 연구를 어렵게 하고 아랍 세계에서 어떤 형태의 성경도 금지하게 했다. cf. Dever). 둘째로,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우리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 국가의 학자들의 노력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보완적인 연구를 발전시켜야 한다.-특별히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히 대하는 유적, 시기, 문제에. 이것은 주로 이야기되는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발굴이 줄어들고 경험적인 방법, 지역 조사, 작은 한 시기의 유적 연구와 특정 문제 해결의 고고학은 늘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마지막 전략은 거의 없는 비문자적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보여지는 협력과 연합 계획에 좀 더 참여하는 것이다. 이들 계획들은 조직이 많은 문제가 있고 미국인 파트너에게 제한된 기회만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필요하고 매력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미국인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이 분야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연구비 지원이 상대적으로 더 큰 주제들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재형성을 요구한다.-자료의 창조적인 종합과 통합; 과거와 현재 계속되는 현장 작업의 출판, 학문적, 대중적 지원이라는 미국 고고학을 건강하게 하려는 점증되는 시도.
2.고국에서의 학문(The Discipline at Home)
미래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영향을 끼칠 내적 요인들은 다루기가 덜 어려워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것들은 더 강력해질 것이다. 우선 실제적인 면을 본 뒤 이론적 면들을 살펴보자.
a.몇 가지 실제적인 고려들
먼저 우리가 과거 20년 혹은 풋내기 학문으로서 그것을 확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즉 성서적 고고학이 미국에서 누려 왔던 상당한 대중적 지원을 유지하고 획득하려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위상으로 마지막 변형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전체 사업은 붕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은 이제 너무 복잡하고 현학적이며 아마추어의 기반에서 살아남기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원은 없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현장 작업의 전업(full-time)전문가들의 연구와 가르침에서 역시 본질적인 것이다.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작은 교회와 관련된 학교들, 종교학과 대학이나 세미너리에 많은 파트타임 직업을 고용(유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의 고대근동학과, 인류학과 등에서 우리가 이미 해 왔던 조그만 성과들을 보충하기 위한 새로운 직업(국면)의 창출을 의미한다. 이미 상대적으로 작지만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으로 특화된 번영하는 대학원 프로그램은 토론토, 시카고, 하버드, 펜실바니아, 듀크, 아리조나 대학에 있다. 상당한 현장 경험과 높은 수준의 최소한 40명의 Ph. D학생들이 이들 프로그램에서 훈련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뿐이다. 명백히 고고학의 미래는 모든 혁명적인 사상을 표방하는 이들 떠오르는 세대의 운명에 거의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도 묘사했지만 그들의 직업(경력)은 위기에 처해 있다.
고용(참여)에 대해 덧붙이자면 우리가 우리 연구의 기본 형태인 현장 작업과 출판을 위한 기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의 신용에 대해 ‘더 새로운 고고학’은 최근, 상당수 공적, 사적 기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위한 국립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Humanities)같은 세속적인 원천으로부터 지속적인 보조를 얻고 있다. 고고학이 종교와 신학적 관심에 덜 직접적으로 관련됨으로써 그러한 기금을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더 값비싼 것이다. 예비 현장 보고를 장려하는 출판의 필요성은 기금뿐 아니라 다른 기본적인 문제에도 관련되어 있다. 전체 규모, 통합된 최종 보고서: 다양한 기간과 문제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 그리고 특별히 성서학과 고대 근동 연구(ANE studies), 일반적 고고학, 인류학 그 밖의 다른 학문에 대한 최근 발견과 관련된 해석학적 방법. 여기서 우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우리의 고고학 분과에서 진보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과 우리가 결정적이라고 간주하는 자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의 흠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소홀했고 미숙했다.
물론 현대 고고학의 복합성(complexity)과 비용은 출판을 아주 더 어렵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지금껏 보다 더 긴급한 것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참된 학문적인 과목이 되기를 열망하느냐의 여부이다.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필요, 학습된 단체들의 강화와 전문적인 조직들에 대해 근본적인 것일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이것은 우선, 1900년 이래로 성서학의 많은 측면과 함께 고대 근동 언어학,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평범한 사람과 학자들의 흥미에 효과적으로 봉사해 온 동양연구미국연구소(ASOR)이다. ASOR의 국내 연구소와 중동에서의 많은 현장 계획은 이미 언급했었다. 고고학의 전적인 발전에 대한 강력한 장애물과 그것의 전통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ASOR이 단지 신고고학의 강요에 적응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촉진해 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ASOR은 아직도, 쇠퇴한 성서적 연결을 유지하고 있지만 떠오르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학문을 위한 기본적인 학문적 대변인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중동에서의 대다수 미국 현장 계획들의 보증이 되었고, 그것의(ASOR) 연례 회의와 많은 출판물은 결과 제공을 위한 주된 토론(비판,forum)으로 공헌했다. 게다가 ASOR의 해외연구소는 오랫동안 의미 있는 연구 센터로서 뿐만 아니라 장기 이사(director)였던 소장 고고학자들의 경력에 디딤돌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ASOR은 이제 아주 중대한 다른 영역에서, 즉 더 넓은 차원에서 고고학의 장려와 미국 대중교육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ASOR은 최근에야 자신의 청중을 위해 성서적 범위를 넘어서는 곳에 도달했다. 또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연합된 지원을 위한 효과적인 로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ASOR은 아마도 미국만이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과 지원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새롭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견해를 창조해야 하는 도전에 이미 직면해 있다. 만약 우리가 민주 사회에서 연구 기관으로 사상의 혼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주류를 긴급히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모토는: 수도원 밖으로, 학문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시장에서조차도 가 되어야 할 것이다.
b.이론적 고려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론이 학문 연마를 우선적으로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우선이 아닌 반면 한 번 시작된 성장과 자극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항상 이론과 방법의 중요성을 각성하는데 불충분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엔 미국 고고학자들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헌과 비교되어, 놀랍게도 우리 분야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도서 목록이 실제로 없었으며 이제서도 비평적 토론은 거의 없다. 이러한 부족은 변화의 힘이 대체로 고고학의 다른 분과에서 유래되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최근까지 우리 과목의 쫀쫀하고(parochial) 뒤떨어진 성질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실용주의의 특징(pragmatism)은 방법(method)이 최종적으로 문헌을 조사하기 시작할 때, 주로 토론이 현장 기술(technique) 즉 어떻게 반론할 것인가에 한정된다는 사실에서 잘 보여진다. 그래서 다양한 층위학적 방법과 기록 방법이 1970년대에 뜨겁게 논의되어졌다. 아직도 우리들은 고고학에서 근본적인 지적이슈, 즉 이론이 우리 분과에서 아직 진지하게 제기되지 않았음을 논쟁할 것이다.
연구를 위해 선택되어진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조사 양식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방법이 이론이다’라는 사실이 분명히 간과되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고발은 이론적 틀이 부족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정들이다: ⑴고고학이 아니라 성서 역사와 신학에서 이슈를 끌어낸다. ⑵거의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비평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닌 가정.
예를 들어, 족장들의 역사성을 논평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성서 연구에서는 실속 있는 조사가 되겠지만 적절한 고고학 이론을 거의 규정할 수 없을 것이고 더구나 연구 전략은 택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신학적 해석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같은 성서 고고학자 중 몇몇-G. E. Wright같은 이는 결코 고고학적 해석학을 양식화(formulate)하려 하지 않는다. Albright는 그의 성숙한 통합적 연구와 특히 다양한 역사철학에 대한 인생 말년의 편견 없는 몇몇 논문(Essay)들과 그의 사고에 대한 그들의 충격에서 closest했다.
우리는 해석적인 이슈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거의 모든 발견에 대한 해석이 많은 지성들 사이에서 이들 과목을 특징지어 온 생생하고 격렬한 논쟁으로 끝없이 논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가장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대체로 학문이 참된 고고학적 인식론을 개발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즉 기본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역사적 고고학’조차도 이 접근 방법엔 불충분했다.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어졌고 결론은 끄집어내어지고 논쟁되었다. 또 해석은 발전했다-역사를 언급하는 모든 기초에 대해. 그러나 역사라는 것과 현대 사료 편찬 방법은 거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인 고고학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가 의미하는 것을 거의 명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고학은 최소한의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의미하는 인식론에 의하면 학문이란 단어가 없는 그것들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지식의 이론-은 연구 분야의 비극적인 오기(誤記)이다. 적절한 고고학적 인식론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들 같이 명백한 질문들에 직면할 것이다.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유적 형성 과정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상황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가? 고고학적 자료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유비(analogy)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특한 고고학적 논리는 있는가? 우리는 문화 유물로부터의 반응(behavior)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나? 무엇이 문화와 문화 변화를 결정하는가? 목록은 확장될 수 있지만 요점은 명확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진지하게 그러한 기본적 질문과 씨름해 오는 동안 고고학은 보물 사냥보다 조금 더 남아 있는 것 같다. 우연한 발굴의 선별, 일관성 없는 목적. 의미 있어야 할 지적인 틀에 대한 언급이 없는 난잡한 사실들. 그러나 인식론은 해석적인 수준에서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수준에서 작용한다. 인식론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자료의 질을 결정한다. 거의 모든 연구에서 특별히 고고학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항상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잇고 생각하고 있던, 그리고 우리가 더 찾아내려 했던 것, 또 우리가 연구를 수행하려고 제안한 방법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것을 다른 방법에 적용시키면, 고고학에서의 사실(fact)들이란 거의 없다. 유물들은, 그것들이 상황(context)속에서 적절히 발굴되어지고 적절한 질문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질 때, 그리고 출판되어질 때에야 자료(data)가 될 수 있다. 고고학자가 백지 상태의 마음으로 발굴 유적에 접근하는 객관적인 과학자라는 생각은 아주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는 보려고 신경 쓰는 것만 먼지 속에서 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땅바깥으로 끄집어낸 증거들을 파괴한다. 결국 현장 고고학은 반복적일 수 없는 경험이다. 예를 들어, 초기 세대들은 항상 동물 뼈를 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옛날 사람들이 먹었던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래서 생활양식을 연구할 유일한 기회가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어졌다, 필수적인 테이타가 수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료(data)의 새로운 질문에 대해 묻기를 좋아하는 현재 세대는 더 나은 자료 세트를 얻을 때까지 적절한 가설을 형성할 수 없었다. 고고학은 엄격하게 조직적이고 축적된 이론을 세우고,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인간적이거나 과학적인 학습의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점은 국내에서 한 두 가지 예에 의해 활발하게 되었다. 우수한 이스라엘 역사가와 고고학자 베냐민 마자르에 의해 쓰려진 팔레스틴의 중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초기 논문은 이제 아주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 당신 알려 졌던 것의 찬란한 종합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역사로 구분되었던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지향점으로 주어졌다. 조사되어진 주요 자료들은 유적 현장의 층위학, 축성법, 금석학적 유물, 동부 지중해 연안의 국제 관계들과 민족운동과 관계가 있다. 이 초점은 당시의 위대한 사상과 개인, 기관에 대한 것 즉, 공적 사건과 정치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 역사적 조사로서 이것의 많은 부분은 아직도 타당하고 그래서 더 나은 연구를 위한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본질적인 것으로 연구하는 것; 정주 형태, 기술, 사회, 경제적 역사와 인구 통계학에 관련된 언급은 실제적으로 없다. 미학적이고 종교적인 것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문화라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Kenyon에 의해 쓰여진 유명한 CAH에서도 중기 청동기 시대 연구는 강조점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 Kenyon과 Mazar는, 이들 이슈가 196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 자료가 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잘못된 질문을 물어 왔기 때문에 혹은 아주 유용한 자료의 전체 범위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부적절한 질문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에 그 자료는 쓸모가 없다. 물론, 정치적 역사를 향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아주 배타적인 지향이 명백히 진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용된 전형적인 방법들과 얻어진 결과들로부터 추정될 수는 있다. 그 두 가지 초점들은 ⑴층위학 혹은 주요 건축학적 단계와 분리되어 올바르게 발굴하는 방법에 대한 학습, 그리고 ⑵정치적 역사의 주요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성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를 그것들과 연관시키기 위한 도자기 연대, 지층의 절대 고정된 자료, 거의 파괴된 지층(layer) 현장 계획은 큰 이야기들(tells)에 집중하는데 특히, 성서 유적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명확한 확증이 목표이다. 즉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도자기와 물건들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는 주요 건축물이 그것이다. 발표는 종종, 모든 층에서 추출된 깊은 sondage의 선호로 편협해지곤 한다. 비록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이러한 종류의 고고학의 주된 목표는 다음과 같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⑴주요 유적에서의 정치적 역사의 개요와 ⑵올바로 측정된 지역 도자기 연대,
발굴 현장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가사 지역에 노출되어 있다. 즉 개인 주거지, 창고, 산업 설비, 혹은 계단식(테라스) 단지, 정원, 그리고 다른 개방된 지역에 노출되어 있다. 물, 땅, 그 밖의 자연 자원의 사용을 밝혀 줄(무덤을 제외하고) 특징을 묘사하는데 실제로 관심이 없다. 작은 위성 마을, 야영지, 그리고 시골 오지는 거기에 대한 환경에 대한 관심과 종교적 조사 작업이 거의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시리아-팔레스틴과 성서 고고학자들의 초기 세대는 비교 층위 학과 도자기 연대 측정이라는 도구로 중동 지역 어디서나 대적할 수 없는 예리한 날을 갈아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제한된 목적들은 과거를 소급함으로 명확해진다. wheeler-kenyon의 층위학 방법은 정확한 위치를 분리할 만큼 경험적으로 지표층(soil layers)의 관찰, 기록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그러나 거기엔 우리가 이제 유적 형성 과정이라 부르는 것, 우선 이들 퇴적층에서 형성된 자연적, 문화적 활동, 그래서 더 큰 맥락에서 그것들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이 있었다. 혹은 다시 말해, 팔레스틴의 평범한 도자기는 도자기 연대를 꽤 정확하게 집어내도록 하는 도자기의 유형화 된 발전 단계를 챠트화 할만큼 거의 분석되고(장식과 모양이) 분류되어졌다. 그러나 극히 작은 예를 제외하고서는 도자기는 우리의 역사, 기술, 미학, 국제 관계, 무역, 즉 문화와 문화 변화에 대한 지식에 공헌한다는 관점으로 연구되진 않았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문화 변화 자체의 모델들이다. 대부분은 환원주의자들이고 확산주의자들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도자기 집합’이란 말과 항상 마찬가지 의미이다; 그리고 새로운 도자기 문화는 새로운 사람, 아마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주요 민족운동과 외국 침입은(즉 역사적 사건) 고대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용되어졌다.
토착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들, 기술적 혁신, 혹은 다른 의미로 일반적인 지역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이전 세대의 이들 특징적인 강조에서 우리는 직업에 대한 명확한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정치적 역사가 목적이지 사회경제적, 기술적, 참된 문화적 역사가 목적은 아니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층위학과 도자기 연대측정학의 숙달에 의해서 혹은 완벽한 현장 기술에 의해서는 그리 많이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식론이 좀 더 정교해짐으로써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작이 이론을 우리가 해 왔던 것처럼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고학적 연구를 발전시키고 좌우할 수 있는 ‘발견 원칙’으로서 긍정적으로 보게 한다. 그러한 이론은 이해되어져야 하고 체계화되어야 하고, 명확히 집중되어야 하고 가능한 한 경험적으로 실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연구 계획이라고 자주 말함으로써 정말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다.
미래에 ‘정치적 역사’의 대체 모델은 거대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밑으로 거대한 우연적인 대중적 사건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휘두름을 넘어, 셀 수 없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역사를 쓰는 아날(annales)학파로부터 유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필립 2세 시대의 지중해안과 지중해 세계’로 알려진 Fenand Braudel은 3단계 시스템을 제창했다. 위의 레벨은 ‘사건의 역사’이다. 급격하게 움직이는 역사는 피상적이다. 바로 밑 두 번째 단계는 ‘사회적 모임의 역사’와 훨씬 더 천천히 움직이는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절충시킨다. 가장 밑의 단계는 모든 놓인 단계의 역사가 뿌리 내리고 있는 자연적 환경에 있는 하류층의 작은 그룹과 개인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수천년 동안 한결같을 수 있다. 아날학파의 도움이 되는 다른 작품은 E. LeRoy Ladurie의 ‘예스의 소작인’이다.
물론 고고학은 아날학파의 역사가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광범위 한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잘 가공된 개인적인 역사로 써서도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생태학적이고 환경(setting)에 집중한다; 그것은 평범한 개인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애매하고 인공적인 자료 투성이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 변화에 대한 민감함 때문에 모든 학문 사이에서 독특하다. 그래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다고 믿는 좋은 이유가 된다. 도구는 손에 있다. 왜냐하면 아주 다양한 학문적, 생태학적, 체계적인 접근 방법이 올바른 지향에 있어서 유망한 점을 이미 위에서 지적했기 때문에.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초점의 범위를 우리가 넓히는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아주 바람직한 오늘날의 다른 목표, 즉 고고학 일반 분야와 인류학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통합시키는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목표가 아직 성취되지 않고, 또 진지하게 시도되지 않는 것은 고통스럽게도 명백하다. 고대 팔레스틴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중추적인 지정학적 상황, 위대한 문명 발상지, 급격히 성장하는 데이터 베이스와 함께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그 지역에 훨씬 강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연구의 오랜 역사, 성서의 땅으로서 엄청난 대중적 호소력(appeal), 아직도 인류학자와 사회역사학자들은 사례 연구로서,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리아와 비교하는 사례 연구로서만 전형적으로 팔레스틴을 무시하는 교차-문화적 비교를 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부주의한(소홀한) 부분은 단순히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서적 경향을 지닌 세속주의자가 원인이다. 그 부분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 자료의 질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최근의 더 나은 작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과거의 불충분한 발굴에 기인한다. 그러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고립이 대체로 우리의 잘못 때문임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지적, 학문적 사업으로써 미국 고고학과 인류학의 발전 역사에서 떨어뜨려 놓은 채, 성서학의 분과로서만 그 분야를 인식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마추어적 위상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껴 왔고 또 전문화에 저항해 왔다. 이것은 우리 분야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이 묻는 질문을 똑같이 묻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주요 잡지를 읽거나 출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문가 모임이나, 다른 고고학적 인류학적 조직의 연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근동 선사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신세계와 유럽 고고학이 수행해 왔던 대학 인류학과의 프로그램을 가르치거나 나누지도 않았다.
세계 고고학의 최근-현재의 이슈는 다음과 같다. ⑴복합적인 사회의 흥망성쇠 ⑵문화적 변화의 재구성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균형 ⑶고고학/인류학의 사회학적 역사 ⑷공간-시간 체계론, 인공물의 다양성, 문화적 유형, 행위의 구체적인 상호 관련 ⑸유적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기록의 성질 ⑹민족성에 있어서 고고학적 정체성. 덧붙이자면 신고고학의 몇 가지 이론적 공격은, 정착 유형, 생활 양식, 사회 구조, 인구 성장 같은 특정 질문들을 반성하게 한다. 시리아-팔레스틴의 냉정한(공평한) 조사 방법이나 일반적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문학에서의 비교 인용 분석은 우리가 이를 핵심 이슈의 토론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소장 고고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만드는 과업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지향점을 발생시킬 것이다. 아직까지도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위에서 언급된 발전은 적절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것이 위압적으로 발견된다는 관점을 야기한다; 새로운 세속적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더 이상 성서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다, 즉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화의 방식에는 강력한 장애물이 잇다. 많은 관찰자들은 두 학문이 더 멀어질 것이고, 그런 증거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고학자의 잘못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몇몇 비평이 그것을, 과도하게 전문화 된, 편협한 전문가적인, 인문과학자이기 보다는 기술자 같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명료한 사실은 성서 고고학의 변호자들이 고고학을 통해 타당성 있는 성서적 역사와 믿음이라는 그들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과 그리고 포기했음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는 성서학자들이 원래적인 역사-비평적 관심에서 점점 더 문학적 관심, 구조적 언어학, 언어의 원역사적 이해, 정경적 비평 등의 관심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고고학은 단순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역사 뒤의 역사-성서 텍스트의 가선과 그것의 원래적인 맥락을 회복하려고 한다. 역사는 단순히 해석학이 된다. 우리는 Albright와 Wright가 그랬던 것처럼 고고학의 축적, 외연적 자료의 저장, 문학에서 전통의 뒤를 꿰뚫어 보는 그것의 독특한 능력이 없이는, 보다 객관적인 세속적 역사에 대해서 성서 연구는 항상 주관적 사색으로 퇴보할 위험이 있고 신학적, 역사적 확신도 수행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성서 텍스트가 역사적이거나 적어도 역사성을 갖고 있다면, 단순히 종교공동체가 그들의 시대와 환경에서 그들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정말 일어났던 것이라는 문제가 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그러한 대화는 아주 적절하다. 왜냐하면 양쪽 학문은 이제 긍정적인 알브라이트주의자의 논제로부터 떨어져서 비록 똑똑히 말할 수 없고 비자기의식적이지만 공감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서문학협회에서 20년전에 행한 Moton Smith의 연설을 언급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축적된 역사 때문에 우리는 능력 있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꽤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결정된 고고학적 사실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능력 있는 문헌학자에 의해서 성서 텍스트도 또한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우리는 그 둘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잇다. 그러나 고고학이 특별히 대화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그것들의 최종 연구에서 성서 고고학에서 가장 뛰어난 대표자 2명에 의해 전환된 국면을 사용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언급되었던 ‘고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텍스트에 대한 인공물(artifacts)와의 관계, 문화에 대한 물질 문화와의 관계, 역사에 대한 고고학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이것들은 후기-알브라이트주의자후기-긍정주의자, 낙관주의자(positivist) 시대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들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문학 해석의 과업이 전문가들에게 잘 남아 있는 반면 고고학자들은 우리에게 고대와 현대라는 해석의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역사의 출처로서 텍스트가 제안되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는 아주 후기에 편집된 문서로서 역사가들에 의해 간주된다; 그것은 그 재료 안에서 고도로 선택되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엘리트적인 관점을 지향해서 편집되었다. 성서는 신정(神政)의 역사이다. 뻔뻔스러운 선전이 때로 있지만, 역사(history)가 아니라 성역사(Heilsgeshichte)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거의 혹은 전혀 객관적인 역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구약 히브리 성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물론 조직신학은 더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각 계층의 자료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과거의 실재들을 중재시키는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조심스럽게 그 자료들이 해석되는가? 인간 사상과 행위의 상징적인 표현보다는 실제로 제시되어 있는 쓰여진 이적(sign)에 의해서 성서 텍스트는 어떤 다른 것에서보다 자신이 품고 있는 증언에서 더 이상 객관적이 아니라 고고학적 표본만큼 더 이해될 수 없다. 유물보다 더 명백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증거의 유형 사이에서 우리는 다른 시간과 환경, 장소에서의 ‘의미’를 ‘해독’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것들을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번역’해야 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해석의 역할과 유물 사이의 유비는 더 잘 수행될 것이다. 인간의 용어로 적어도 성서 자체는 과거의 유물이다.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독특한 면이 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성서의 원래 맥락과 관습이라는 것’을 ‘회당과 교회에서 항상 재해석되어져 그 시대에 경전이 되어져 온 것’과 합친 것임은 명백하다. 세속적 역사가들에게는, 문학 자료로서 성서와 고고학에 의해 조명 받아 온 다른 텍스트 사이의 우선적인 차이점은 성경이 결코 버림받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계속 아직도 살아 있는 공동체에 의해 간수되고 번역되어 왔다는 사실에 잇다. 그래서 고고학적 용어로 성서는 ‘보호받는 유물’로 우리가 부르는 것이다. 해석의 문제는 비슷하다. 그러나 약간 다르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위에서 신고고학이 옛고고학보다 얼마나 더 잘 조명하는지 보여주려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고고학 혼자서 고대 근동 상황, 이웃 나라와 민족, 문화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신빙성 있게 묘사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다-직접적이고, 생생한 실재로-우리가 경전으로만 읽었을 땐 가질 수 없는, 혹은 원래 기원으로부터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던 문학으로 읽었을 땐 가질 수 없는 신빙성으로,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어떤 시대에서도 고고학은 이들 변화가 자연 환경과 팔레스틴의 긴 정착 역사의 맥락에 맡겨져 있던 것처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팔레스틴의 지역 상황을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고고학은 고대 성서 기자에 대한 역사적 종교적 긍정에 대한 반대 뿐 아니라 무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고학은 환경, 문화, 기술, 사회경제적 변화를 평가하는 것을 우리 현대인이 유용하게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요인을 이해시키는 부분적인 설명을 할 수 잇고 해야 한다. 이들 강력한 변화의 동인들과 관련해, 성서는 우리에게 거의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고대 팔레스틴의 대등하고 보완되는 ‘자연적 역사’와 ‘세속적 역사’는 오직 고고학을 통해서만 복구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제안에 대해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이제 시작이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즉(아날학파의 시도처럼) 몇몇 경우에 대중 문화, 민족 종교, 가능하면 개인의 역사조차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려 했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Source: 기독아카데미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