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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인도시 기억할 사항 10가지

 

기도인도시 기억할 사항 10가지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담임목회자나 성도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우선시되는 기도는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둘째로 서론 없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도하러 앞자리로 나와서
“다 같이 기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기도 시간이라는 것은 주보를 통해 알 수 있다.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말을 한 마디라도 덧붙일 이유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충분한 기도 준비가 있어야 한다.
보통 기도 순서는 주보를 통해 미리 공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도 준비 없이 한 주간을 보내다가
당일에 기도인도를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어가면서 준비된 기도와
즉흥적으로 나와서 드리는 기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넷째로 기도인도는 길지 않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도 순서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장 시간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평상시에 길게 기도하는 것은 누구도 나무라지 않을 일이지만
예배 시간에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은 전체 예배에 방해가 된다. 기도인도를 길게 하는 것은 영적으로 수준 있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로 성경 구절은 정확한 인용이 좋다.
기도 가운데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생각은 없다.
꼭 필요한 한두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인용하면서 잘못 인용하곤 한다.
아니면 엉뚱한 구절 두 개를 하나로 합체해서 인용하기도 한다.
부정확한 인용을 할 바에는 차라리 인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여섯째로 기도자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다가도 대표기도 시간이 되면
우렁찬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쓴다.
쇳소리를 내거나 쉰 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다.
본인은 은혜로운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는지 모르나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할 뿐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가장 은혜롭다.

일곱째로 중언부언할 경우 써서 하는 게 낫다.
앞부분에서 기도한 내용을 뒷부분에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너무 절박한 문제라서
기도한 것을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기도인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해서 중언부언 하는 스타일이라면
적어서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덟째로 기도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야 한다.
기도인도 시간에 앞에 나와서
그 동안 자신이 목회자나 교회에 하고 싶었던 내용들을 기도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욕을 위해 기도를 이용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아홉째로 기도내용이 목회기도와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성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기에
그에 맞는 내용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데
목회자가 수고하는 성도들을 축복하며 기도하는
목회 기도와 같은 내용으로 기도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목회자는 같은 기도를 되풀이하기도 민망하고
빼자니 그것이 이상해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열째로 교회의 비전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유용하다.
교회의 비전은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다.
그런 내용을 빠지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중요한 기도 제목을 빠지지 않고 올려드릴 수 있으며
성도들 역시 다시 한 번 교회의 비전을 마음에 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생각보다 교회의 비전이 성도들에게 공유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자료출처 : 기독교용어 연구위원회

교회에서 잘못 사용하는 용어들

당신→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 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 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우리 성도님들이→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대표 기도→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ooo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 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참 좋으신 하나님→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 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대예배→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예배 봐 준다→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준비찬송→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

장례 분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

칠성판(七星板)→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 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

삼우제(三虞祭)→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는것이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가장 큰 용어의 잘못 사용은 축복의 말, 격려의 말이나 사랑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나 조롱하는 말, 비판하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내라고 하는 의미를 기억하고 그 말의 의미를 삶 속에서 잘 실천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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