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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 신학 변천사(Korea Methodist Theology History)

한국 감리교 신학 변천사

제 1 기(1784-1900): 한국의 전통사상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수용, 해석하는 기간이다

조선조 후기 사회에서 서학으로 유입된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통사상과 관계를 맺으며 변용하는 시기로    한국 기독교 초기의 한국 신학 형성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더 때다.

제 2 기(1901-1933): 선교사들에 의해 지배받던 한국 신학의 바빌론 포로기로서, 조선조의 패망말기 한국인들에 의해 시작된 초대교회가 미국으로부터 온 선교사들의 보호 밑에 신학에 대한 주체적인 반성이 전혀 없이 그들의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에 지배를 받던 시기로서, 한국교회가 그 기초적 성격을 형성한 시기이다.

제 3 기(1934-1959): 보수신학과 진보주의 신학의 갈등과 투쟁의 기간으로,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받은 한국교회 제 1 세대 신학도들의 보수신학과 세계로 열린 눈을 갖고 민족 자주적인 학문적 사고를 하였던 신학도들의 진보적 신학 사이에서 대립이 첨예화하였던 시기이다.

제 4 기(1960-1972): 한국 토양에서 주체적 한국신학을 하려는 해산의 고통의 기간으로, 정치적 현실이 급격히 변화하여 사회 구성의 성격과 생산양식이 바뀌는 데에서 오는 이념과 가치의 도전 속에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현실에 책임적으로 대웅할 수 있는 새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진통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토착화신학이 불붙었고 그 외에 서구신학의 새로운 조류들에 대한 이해와 비판 속에서 한국적 신학의 틀을 잡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 기간에 있었다.

제 5 기(1973- ): 한국의 문화, 역사 현실에서 한국신학 전개의 기간으로 제 3 세계의 자유화 움직임과 함께 한국의 역사현실과 문화전통에 교회가 책임적으로 응답하고 대화하려는 시기로써 주체적인 신학방법론을 크게 제시하고 토론하며 전개하였다.

그 기간들의 구분을 통하여 살펴본다.

Ⅰ. 한국의 전통 사상에서 기독교 사상의 수용과 해석(1784-1900)

조선조 사회는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유교이외의 타종교나 민간신앙을 배척하고 유교 이념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아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이러한 조선에 “서학”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자생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조선조 후기 사회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집권 양반간의 갈등과 민중의 다양한 개혁 요구에 직면하였다. 이미 공론화한 성리학으로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서학서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아를 연구하는 \’성호 이익\’과 같은 서학파가 형성이 되어 그들은 서구사회를 형성한 과학과 기술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의 정신적, 사상적 근거가 되는 원리, 즉 이(理)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나 그의 관심은 신앙적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실용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아시아로 진출하는 서구 열강들의 식민주의적 도전 앞에서, 민족의 개화에 관심하던 조정의 일부 개화파 정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서구 문화발전의 근본 요인이라고 생각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 지지하였다. 개화파 지도자들로는 김옥균, 박영호, 홍영식, 서재필 등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개화파 정치인들이 국가 발전과 부강에 대한 민족사적인 관심을 가지며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 민중이 해방 열망 속에서 수용하기도 하였다. 비록 개화파 정치 지도자들이 외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했을 지라도 그들의 주요관심은 서양문물을 통한 조선 왕조의 혁신과 민족의 발전이었다.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이며 청교도적 보수주의인 신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민족이 처한 현실과 상황을 매개로 나름대로 한국적 신학의 방법과 사상을 모색해 갔다.

이러한 한국 신학 형성을 위한 모색은 대체로 두 가지의 흐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을 받아 그 원리와 내용을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전개하는 초기의 사상적 흐름이다. 이 초기 단계에 속하는 대표적인 목회자와 사상가는 길선주, 윤치호, 그리고 최병헌 등이다. 그리고 둘째는 선교사들의 신학은 받아들이되 한국적 상황을 매개로 더 발전시키거나 또는 이에 대한 비판점을 제기하는 후기 단계의 신학적 흐름이다. 이 후기 단계에 속하는 주요한 신학자는 양주삼, 남궁혁, 송창근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 시대에 한국신학의 방법과 주제를 찾아 각기 독자적인 신학적 모색을 한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이다.

▷ 윤치호의 “나라 사랑”의 선교신학

윤치호(1865-1945)는 구한말 조선왕조의 오랜 봉건적 체제와 구습의 모순을 혁파하려 하며 근대적인 정치와 문화를 지향했던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통해 근대화한 강력한 독립 주권국가를 설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그의 저술 등이 없어 그의 선교신학을 체계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의 일기 등으로 그의 선교방법론을 말해 보면, 첫째 윤치호의 신앙적 동기와 신앙유형은 “나라사랑”이다. 그런데 이 신앙적 동기가 그 자신의 회심체험으로 인해 선교적 목표로 바뀌었다. 둘째, 그는 한국교회의 우선적인 선교 과제가 무엇보다도 봉건적 정치체제와 교육체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그는 한국의 피폐하고 암울한 역사현실에서 교회의 선교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교회가 연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한국 선교신학을 구상하였던 윤치호의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선교신학과 그 방법론의 한계는, 그의 신학이 근본논리에서는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보수적 신앙유형과 선교방법론을 크게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 길선주의 말세론적 보수신학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며 한국적 보수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길선주 목사(1869-1935)라고 할수 있는데, 그는 1903년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원산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길선주는 평양에서 이 운동을 일으키고 주도하였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 구령운동과 부흥 사경회를 이끌어 한국 교회이 전도와 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며, 3.1운동 때에는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민족운동에 앞장서 구국의 의지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 보다 더 보수적이었는데, 그는 “성서중심”과 “경건생활 중심”을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로 성격지어 놓은 개척자라고 할수 있다. 길선주의 보수신학은 말세론에 중심이 있었는데, 길선주는 주의 재림을 강조하며, 이 재림 앞에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긴장된 종말론적 신앙자세와 생활지침을 강조하였다. 길선주의 말세론적 보수신학은 단순히 고난의 현실을 떠난 타계지향 일변도의 신학이 아니라, 현세 속에서 현세를 극복하게 하고 영적 힘을 주는 한국적 보수신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최병헌의 종교적 변증신학

초기 한국교회의 척박한 신학적 토양에서나마 최초로 한국적 종교신학을 시도한 이는 최병헌(1858-1927)이다. 그는 선교사들이 전래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사상을 그가 자란 한국의 종교적 전통과 근본교리로써 해석하고, 타종교와 대화하는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밝혔던 목회자이며 신학자였다. 최병헌이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갖는 사상적 특성을 동양의 종교와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한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그가 성장한 유교나 불교, 그리고 선도적 전통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이들의 가르침을 넘어 한민족의 참된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서 나오는 과제였다. 그래서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검증하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사고방식과 전통이 다른 한국의 종교적 상황에 변증하기 위해 추구하였던 것이 그의 종교적 변증신학이었다.

그의 변증신학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세계의 모든 종교는 모두 최고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두 “상대적 절대주의”인 것이다. 둘째, 타종교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연속성이 있다. 예를들어 유교의 상제관은 그리스도교와 연속성이 있을 수 있다. 셋째, 결국 최병헌의 변증신학은 “만물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에 귀착하게 되는데, 다른 종교의 진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몽학선생”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서양 초대교회 변증가들의 변증신학과 같은 것이었다.

Ⅱ. 선교사 신학에 의해 지배받던 한국신학의 바빌론 포로기(1901-1933)

1. 선교사들의 신학

▷ 언더우드의 선교신학

언더우드의 선교신학은 그의 선교적 열정과 신앙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그의 선교신학은 그 자신의 선교적 열정과 신앙의 삶 위에서 실천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그의 선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한 인간들의 구속주로 믿는 청교도적 신앙 위에 있다. 둘째, 그의 선교신학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계속되는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의 실천 위에 서 있다. 셋째, 그의 선교신학은 주어진 선교적 과제들을 교회연합운동이 차원에서 풀어가려는 포용적인 그의 신앙 위에 서 있다.

▷ 아펜젤러의 교육신학

아펜젤러는 외국선교사들에 의한 선교활동의 한계를 의식하고 한국 선교를 한국인이 감당하려는 의도를 가졌는데, 이를 위해 한국인들을 계몽하고 개화시키는데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교육기관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교육기관에 대한 구상을 살펴보면, 첫째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학교를 통한 선교가 병원선교보다 더 확실하다. 둘째, 선교대상을 가난한 민중들보다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젊은이들과 지식인 계층으로 한다. 그러면 이들이 장래의 민족지도자로 성장하여 선교와 사회변혁의 일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아펜젤러의 반봉건적 개화 의지와 개척정신 등 사회참여의 선교와 이념과 실천은 구한말 일제 통치 초기의 민족운동 세력의 민족자주와 반봉건적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헐버트의 정치신학

미국 감리교 소속의 헐버트(1863-1949)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을 보면서 자신의 선교신학을 수립하고, 실천적으로 한국민족의 자주화와 독립을 위해 활약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의 복음선교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위협에 떠는 조선민중을 구원하는 역사 참여의 길이었고 또한 이들의 정치적 억압을 물리쳐 내는 일이었다. 이렇게 그로 하여금 당시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책임적으로 서게 하여 교육과 언론,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한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선교적 행동을 하게 한 신학을 우리는 \’정치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정치신학은 첫째, 그는 신앙과 신학을 인간이 속한 “삶의 현실 전체”즉 정치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은 정치적 현실과 떨어질 수 없는 다양한 연관 속에서 구체화된다. 둘째, 그의 신학은 정치현실에 참여함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권리”라고 생각했다. 셋째, 그의 신학이 정치신학인 이유는 선교 대상지인 한국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 속에서 나온 “상황적 신학”이기 때문이다.

▷ 모페트의 보수주의 신학

모페트는 복음설교에 대한 열정 못지 않게 성장하는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교역자 양성과 신학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세워지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이 학교의 신학교육 이념과 체계를 세우고, 한국에 “보수주의적 선교신학”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의 보수주의 신학을 살펴보면, 첫째, 그의 보수주의 신학은 성서만을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의 표준으로 생각한다. 즉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한다. 둘째, 그의 보수주의 신학은 역사적 캘빈주의의 교리와 신앙고백으로 형성되어 있다. 셋째로, 그의 보수주의 신학은 청교도적 경건의 실천을 지향하였다.

▷ 스코트의 진보주의 신학

선교사들의 신학적 분위기가 모두 보수주의 일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가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를 중심으로 한 서구 진보적 사상을 수용하는 진보주의적 신학사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전통인 회개와 전도활동을 계승하는 감리교회 선교사 하디를 중심으로 하는 영적 부흥운동이었다.

그의 활동과 사상을 보면 첫째, 그가 성서연구 방법으로 \’역사비평적 신학방법\’을 소개하였다. 이 소개가 당시에 보수주의적 신학계에는 위험한 사상으로 비쳤다. 둘째, 그는 보수주의 신학의 지나친 폐쇄성과 교리적 독단성을 비판하며, 비교종교학적 입장에서 타종교와 대화하는 신학을 소개하였다. 셋째, 그는 민족적 삶과 역사적 과제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역사참여신학을 전개하였다.

▷ 하디의 성령부흥주의 신학

하디(1865-1949)는 한국에 와서 선교를 하였으나 선교에 실패를 하였다고 하며 깊은 죄절과 갈등을 하고 있던 중에 1903년 원산에서 사경회를 하던 중에 큰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이 유명한 원산부흥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하디의 신학을 성령부흥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그의 신학은 성서 주석학이었다. 하디는 성서를 하나님의 영감된 권위로 인정하면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것이 후에 사경회를 통해 성서를 교리적 전제와 문자적 의미를 넘어 더욱 깊고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한국교회를 이끄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둘째, 그러나 하디의 신학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와 회개를 통한 체험적 신앙이었다. 셋째, 하디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소명에 따르는 전도적 열정에서 형성된 신학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남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한국 신학적 사고의 근본 유형을 결정지어 주었다는 점이다. 아직 주체적인 신학작업을 할 수 없었던 초대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다양한 신학을 소개받고 이들의 교육과 감화를 통해 교회와 선교의 신학을 형성해 갔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분류를 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모페트와 레이놀즈, 클라크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 시대의 역사적 칼빈주의의 보수신학

(2) 헐버트와 스코트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 시대의 역사참여적 진보주의 신학

(3) 초기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 하디를 중심으로 하 성령부흥주의 신학

그러나 이러한 신학에는 근원적인 한계와 문제점들이 있다. 우선 선교사 신학의 근원적인 한계는, 무엇보다 선교사들의 한국역사와 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의 부족과 한국의 자생교회의 성격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의 결여에서 나타난다. 즉 이 말은 선교사들은 각 신학이 갖는 “역사적 삶의 자리”를 마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성서이해에 있어서 근본주의적인 성서이해도 문제였다. 이 전통이 계속 이어져 한국교회의 성서신학 형성에 거침돌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와 분리된 교회관의 문제도 들수 있다. 즉 교회가 근본적으로 대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여하는 것을 제한하고, 민족운동을 하거나 정치적인 일들에 참여하는 것을 비복음적 타락으로 경계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근거한 선교관의 문제였다. 그들의 선교는 결국 서구문화 이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2.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

▷ 양주삼의 성서비평신학

양주삼은 성서 비평학을 최초로 한국에 소개하여 그것을 교회생활에 적용함으로써, 성서를 기초로 한 건전한 복음주의 사상을 한국교회에 뿌리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양주삼에게도 한계는 있었는데, 그의 성서 비평학은 계속 발전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도 서구신학의 연구 결과들을 단순히 종합하여 소개하는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192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성서의 고등비평과 해석논증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 남궁 혁의 신약주석신학

남궁 혁은 한국인 최초로 신학박사가 되었는데, 남궁 혁은 그의 “신약주석신학”을 통하여 비록 그 당시 한국교회와 평신도의 일반적인 보수적 경향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선진 서구 신학적 노력의 결과들을 학자적 양심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한국신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올바른 주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성서를 폭넓게 이해하는데 기여했다.

▷ 송창근의 윤리신학

송창근의 윤리신학의 배후에는 강한 민족적 의식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결합해 있다. 그리하여 그가 추구하였던 교회적 이상은 한국 민족사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이루어 가는 교회였다. 하지만 그가 살던 당시, 교회가 민족 현실과는 단절된 채 독단적 교리와 교조적 신앙형태 속에서 부패와 안일함에 빠져 잇는 것에 대해 교회들을 비판하고 갱신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갱신의 윤리신학 속에 그 시대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나쳐 볼 수 없다. 그의 윤리신학은 사회의 전체적 변화요소를 함께 수용하는 교회 갱신의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 백낙준의 역사신학

백낙준은 한국민족사의 핵심을 문화사로 보고 이 문화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그리스도교의 역할과 연관을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한국 개신교사’를 저술하였다. 그 책은 방대한 사료의 수집과 사료비평을 거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우리 선교사 연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민경배가 평하듯이 그 책은 순전히 그리스도교 확장의 역사이며 따라서 관심의 테두리나 사료의 대부분을 선교사들을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에게 수집하였다는 일방성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Ⅲ. 보수와 진보주의 신학의 갈등과 투쟁기(1934-1959)

초기 한국 신학자들의 신학적 기여와 공헌은 우선 이들이 서구의 현대사상들과 교류하면서 신학의 지평을 넓힌 점이고 다음으로는 이들이 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을 훈련받아 한국교회에 최초로 “학문적 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 신학의 전체주제와 방법론적인 면에서 제기되는 공통된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이들 신학의 전개 내용과 구성에서 볼 수 있는 신학논리의 이중성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작업에서 신학이 갖는 학문적 진리성은 매우 중요시하지만, 그 결과로 당시 한국교회의 보수적 신앙양태와 교권적 교회이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학문성과 실천성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의 한계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이 갖는 실천성에 관해 엄밀한 분석을 하기 어려웠다.

여러 문제점들을 내포한 한국신학 모색기의 신학들은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적 문제들과 더불어 교회 갱신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학적 혼선과 교권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다른 교단들보다 보수적 성향과 교권적 파벌이 강했던 장로교로부터 나왔다. 1934년에 있었던 김영주 목사의 “모세의 오경 저작설 부인 사건”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 문제 필화 사건” 그리고 1935년의 “아빙돈 주석 사건” 등으로 신학적 갈등이 노골화하여 교권적 파벌과 분열의 조짐들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1930년대 한국교회가 내적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부적 신학의 갈등과 교권적 파벌 등으로 반 역사화하여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에 대한 신앙적 책임의식에서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적 종파운동들이 일어났다. 이 운동들 가운데서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그리고 최태용의 “복음교회 운동” 등은 한국신학사적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운동들이다.

▷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과 신학

1930년대 식민지적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궈넉 제도화와 형식적 교회로 침체해 있었다. 이러한 무기력한 교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영적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부흥운동이 교회 내부로부터 일어났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은 이전의 성령부흥운동과는 달리 당시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의 무교 정서와 연결된 신비주의 종파운동으로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그 해결의 방도를 나름대로 모색하였다는 데 중요한 신학적 의의가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들 가운데서도 그 시대에 가장 영향력을 교계에 미쳤던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과 그 신학만을 제한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교회 최초로 토착적 신비주의 운동을 일으킨 이용도 목사(1901-1933)는 교권과 형식적 교리 속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죽은 한국교회”를 되살리는 운동이 필요했는데, 이용도는 그 방법을 한국교회와 민중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가는 곳곳마다 뜨거운 신앙의 열기와 기도의 불길이 치솟고 지치고 절망한 이들이 수 없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부흥운동으로 인해 커다란 변화의 충격과 갱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게 되었다.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의 신학에 대해 살펴보자. 이용도의 신학은,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일치”의 신학이었다. 그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체험에서 그의 삶과 신학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에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체험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과 신학

1920년대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좌절과 함께 더욱 타계적 신비적으로 흘러갔다. 또한 한국교회는 공산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사회문제에 보수적 입장을 갖고 교권주의화해 갔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교권주의화와 신비적, 타계적 신앙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무교회주의 운동이다.

김교신은 조직된 교회, 역사적 교회는 없다고 보아 교회밖에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단지 교회의 조직과 그 권위를 부정하는데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최고 권위로서 성서와 그 내용인 복음의 진리를 진리되게 하는데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그는 성서만을 신앙생활의 최고 권위로 받아들였다.

▶ 보수-진보신학 논쟁

1930년대 들어 한국장로교회의 일부 신진세력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보수성을 탈피하고 성서고등비평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성서와 신학사상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신학적인 노력들과 이로 인한 일련의 논쟁들도 함께 일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논쟁의 단초를 여는 사건으로1933년과 1934년 사이에 일어난 오경의 모세 저작권, 여권해석, 아빙돈 주석사건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적으로 1920년대부터 일본이 문화정책을 시행해 외국유학을 일부 허용하면서 였다. 그런데 이 시기의 유학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구프린스턴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신학, 다시 말해 교리적 근본주의 신학의 마지막 세대를 경험하고 돌아온 부류가 있었고, 또 하나는 시기적으로 약간 뒤늦게 돌아온 인물들로 자유주의 신학의 만연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주의의 극단화, 그리고 1932년부터 새롭게 일기 시작한 신정통주의가 혼재한 상황 속에서 신학을 공부한 부류들이다. 두 부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서관에서 분명하게 들어 난다. 전자는 박형룡(1897-1978)을 대표로 하는 교리적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성서를 교리적으로 이해하였고, 후자는 김재준과 정경옥을 필두로 해서 성서를 개혁적 진보주의와 실존주의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부류는 이후에 한국의 양대 교파라 할 수 있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두 축을 이루고 또 장로교에서는 보수(박형룡)와 진보(김재준)의 진영으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온다.

▷ 정경옥의 신학과 방법

정경옥(1903-1945)이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발표하던 시기는, 한국교회가 3.1운동 이후 타계적 신앙으로 사회현실문제에 무관심하고 신비주의 운동으로 몰입하던 때이다. 장로교회가 신학적 폐쇄성을 갖고 외국 신학 사조에 배타적이던 때에 비교적 개방적 입장을 갖고 있던 감리교회의 정경옥은 누구보다 앞서 서양신학자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신학이 신학사적으로 갖는 커다란 의의는 신학의 자유를 확보한 점이다. 첫째, 그는 보수적이고 교리적인 한국 신학계에 과학적인 논리와 체계적인 이론으로 신학의 학문성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그는 웨슬리 신학전통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경험과 도덕적 인격성, 그리고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도덕신학을 주장하였다. 셋째로, 그는 그리스도교 만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고 타종교의 존재를 긍정하며 상호 대화의 입장을 취하였다. 정경옥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평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측면의 이유일 것이다.

Ⅳ. 한국 토양에서 주체적인 한국신학을 형성하려는 해산의 고통(1960-1972)

한국의 신학계는 1960년대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그것은 선진 외국에서 본격적으로 전문적으로 신학훈련을 받은 신진 신학자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신학계에 학문적 충격을 줌으로써 동시에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파고가 높아지면서 정치, 경제, 문화계 등세서 콘텍스트 문제가 제기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서구에서 신학 훈련을 받았지만 서구신학은 서구인의 삶의 자리와 전통에서 체계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낯선 외국의 신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국신학자들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구인들을 위한 신학은 될 수 있으나 우리 민족을 위한 신학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결코 초공간적일 수도 초시간적일 수 도 없는 것이다. 결국 신학은 일정한 시, 공간 안에서 그 속의 생명체를 구원하기 위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상황화”라는 세계 신학의 새 흐름을 의식하고 그것에 충격을 받은 한국의 선진 신학자들은 우리의 삶의 터에서 새 신학을 싹 튀우려 하였다. 즉 우리의 삶의 문제에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는 동시에 우리의 사상을 가지고 신학체계를 채우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1960년대 한국신학계의 새 물결이다.

▷ 60년대 토착화 논쟁

1963년 토착화 논쟁은 유동식이 ‘감신학보’에 발표한 글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에 대해 전경연이 “그리스도교 문화는 토착화할 수 있는가”라는 글을 통해 반박함으로써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토착화논의의 길을 열어준 것은 1962년 8월에 인도의 세일론 감리교회 감독인 나일스(Nails)가 한국 교역자들 앞에서 한 “성서연구와 토착화문제”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그의 강연에 도전을 받아 1962년 10월 유동식은 감신학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나일스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였다.(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Ⅴ. 한국의 문화, 역사현실에서 한국신학을 전개(1973- )

1970년대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격동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의 한국교회는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현실 참여, 인권, 사회 정의 등의 문제를 제기 하였다. 70년대의 한국교회는 이 두 차원의 존재 양식을 가지면서 불행하게도 그 두 존재 양식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지속해 왔다.

▷ 민중신학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 신학적으로 성찰한 것은 70년대 후반에 와서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며 이들의 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는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에서 신학의 주제와 주체는 모두 민중인 것이다. 민중 해방의 역사가 곧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같은 점도 있으나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은 다같이 눌린 자, 가난한자의 해방운동, 곧 인권과 정의운동의 신학인 점에서 같다고 하겠으나, 남미의 해방신학은 식민통치하에 있다가 독립이 된 후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저항하는 정치, 경제적 차원이 있을 뿐 민족사의 전통, 뿌리를 갖고 있지 못한 반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 민족사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통일신학

박순경의 통일신학은 민중적인 면과 민족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박순경의 민족성은 통일신학의 주체설정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국 신학으로서 통일신학의 주제와 주체를 민족, 민중, 여성으로 보고 있다. 민족, 민중과 더불어 여성을 통일신학의 주체로 보는 근거는 민족이 민중과 여성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민중이 민족 내에 특수한 사회계급으로서 민족 사회내의 모순을 타파하는 주체라면 피 억압민족의 여성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권리주장을 뛰어넘어 여성 자체가 민족이고 민중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여성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사회변혁이라는 과제를 이중적으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통일신학의 주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종교다원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논쟁의 출발점은 70년대 말 한국 그리스도교 최초의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촉발시킨 변선환이 기고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 대해서 지지와 반대 등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입장들은 무엇보다 교회와 신학의 불 일치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본다. 즉 한국교회의 현실이 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타종교를 그리스도교와 동등하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개방성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었고 또 이러한 경향의 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한국의 신학들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신학 함을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신학은 역사적 상황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신학사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우연히 산출된 것이 아니다. 신학은 그 시대의 삶의 현실과 관련성을 갖고, 그것을 신학의 과제로 삼으면서 체계화하여 가는 것이다. 오늘 한국신학의 형성의 우선적 과제도 우리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성을 수렴하는 일이다.

둘째, 그것에 대한 실천적 제안을 제시해야 한다. 현대신학은 나름대로 그들의 현실 인식 속에서 대응을 보였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심리적 차원으로 내면화하든지 혹은 현실의 고백 공동체로 드러나든지 교회의 실천도 신학을 매개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신학은 앞선 현실 인식에 대한 구체적이고 타당한 해결안을 제시해야만 교회적 대중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러한 실천적 대안은 성서의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학운동은 신학만이 갖는 고유한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현대 신학사 속의 모든 신학들이 나름의 신학사적 위치와 비중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학이 성서와 갖는 상황적 관련성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신학은 그 신학적 내용에 성서적 근거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넷째, 그러한 성서적 검증을 받은 신학은 운동성을 매개로 해야 한다. 신학이 성서에 근거한 전통성과 현실의 도전에 대응하는 적응성을 가졌더라도 그것이 운동성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개인의 영역 안에 사유화하는 신학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신학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운동을 현실 속에서 가동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 운동성으로부터 새로운 실천적 경험과 통찰력을 얻어 그 운동성을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한국신학은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및 민중운동들과 연대해 가야 한다.

다섯째, 신학은 이러한 운동성 선상에서 타종교와 또는 타 운동 단체와 참여적 대화를 유도해 내야 한다. 운동의 현장성을 빼놓은 채 종교간의 대화나 타 운동 단체와 이념적 일치를 갖는 일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현대 신학사에서 반성할 부분이다. 해방실천의 공유적 가치에 대한 참여를 무시한 타종교나 타운동 단체들과 대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그 대화자들의 근본입장과 이론적 동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운동성을 지도하고 또한 이를 매개로 타종교나 일반 운동 단체와 대화하면서 에큐메니칼한 성격을 갖추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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