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물을 따라 자취 없이 흘러간다는 말은 거짓이다. 볕 좋은 날 세월은 흐르지만, 흐린 날 세월은 한 곳에 머물러 차마 흐르지 못한다. 세밑을 앞둔 지금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기억 때문에 피울음을 삼키는 이들이 있다.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세월호, 침몰한 원양어선 오룡호는 아직 망각의 강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2014년과 작별할 수 없다. 이 나라의 국민 노릇 하기가 정말 힘겨운 한 해였다. 도처에서 발생한 싱크홀은 우리 사회가 매우 부실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까?
대형 사고가 나도 책임지는 이들이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지도자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짜증스럽게 여겼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상징 조작을 통해 사안을 정쟁으로 몰아갔고, 일부 종편 방송은 희생자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얼마인지 계산해 보여주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토대가 생명이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긴 싸움에 지친 대중들은 그 생생한 상처를 재빨리 툭탁쳐 버리고 싶어 한다. 이것이 2014년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어서야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언제나 숫자로 환원될 뿐이다. 연봉과 사는 집 평수,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배기량이 그 사람의 존재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줄어들었고,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윤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은 우리 사회 현실의 축약판이다. 약자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약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인 복종의 자세를 취한다. 인간의 존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강자와 자신을 합일화하는 사람들은 약자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타자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일을 통해 병적인 쾌감을 누리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위험해진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고, 또 생각하지도 않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면서 그때가 되면 ‘말인(末人)’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인은 ‘영혼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자’를 일컫는다.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통해 구현된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신의 질문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반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말없음표 속에 담긴 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너를 동생을 지키는 자로 만들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 ‘너’는 ‘나’를 참 사람의 길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이다. 특히 ‘상처 입은 너’가 그러하다.
‘너’는 ‘나’를 참사람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우리는 자기애에 빠져 요정의 사랑 고백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나르시스의 비극을 알고 있다. 그는 물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나르시스의 물가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사회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다 외롭다.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처럼 우리는 작은 풍파에도 진저리를 치곤 한다. 마음을 붙들어 맬 기둥 하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우리나라를 찾아왔던 프란치스코 교종에게서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을 보았길래 그리 좋아했던 것일까? 참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진리 안에 서 있는 사람 말이다. 어떤 권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지만, 약자들의 자리에는 서슴없이 다가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겸손함과 따뜻함. 사람들은 그에게서 참다운 권위를 보았다.
라틴어로 권위를 뜻하는 단어는 ‘아욱토르(auctor)’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는 유언장이나 법적 서류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의 척도이다. 진실한 사람을 볼 때 우리 속에 있는 진실함이 깨어난다. 진정한 권위와 만날 때 우리 속에 있는 성실과 신뢰가 깨어난다. 지배하고 강압하는 권위 말고 말없이 본이 되는 권위가 세워져야 할 때이다.
* 국민일보 Mission life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