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전반부에 보면 성경의 지도자가운데 한 사람인 바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 ‘바나바’라는 뜻은 ‘위로의 사람’ ‘격려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지중해에서 2번째로 크고 아름다운 섬으로 일 년 내내 평균 온도가 섭씨 19정도인 키프러스(Cyprus)섬 출신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레위지파의 유대인으로 사도들이 위로의 은사를 가진 그를 보고 바나바(Son of Encouragement)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난한 자를 위해 헌금했던 형제사랑에 있어 큰 역할을 했던 모범적인 사람이 바나바 요셉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착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착하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늘 악속에 묻혀서 고통을 받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강함입니다. 부드럽지만 꺾이지 않는 승리를 그 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움으로 되받아 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인해 마음이 독해지거나 악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겨냅니다.
특별히 바나바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가 되었지만 과거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다닌 자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전력상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무슨 어려운 일이 일어날지 몰라 대부분 그를 회피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동안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사도들과 화해의 악수를 하도록 합니다. 결국 바울을 초대교회에 잘 정착하게 하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했던 인물은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나바가 눈에 드러나게 이룬 업적은 많지 않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격려자였습니다.
사도행전 초반에는 ‘바나바와 바울’해서 바나바가 먼저 나오다가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없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소리없이 사라집니다. 사라져야할 때를 알고 소리없이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퇴장했던 분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자기가 세워야 될 사람을 세워 격려했을뿐 아니라 스스로 빠져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는 유교전통이 뿌리 깊습니다. 유교전통은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기에 책망과 정죄에는 빠르지만 격려의 전통이 부족합니다. 격려가 10%라면 비판과 분석이 90%입니다. 만일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실수할때마다 징계하고 잘할때만 상주는 분위기에서 자란다면 상당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을 지은 이규태씨는 한국인들을 ‘독속의 게’에 비유합니다. 독속의 게 하나 하나는 모두 독밖으로 기어나올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 하나가 기어 나올려고 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게들의 생존방식은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히거나 격려받지 못한다면 어떤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격려와 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격려받고 위로 받을때 포기하려고 했던 일을 다시 하게되고 본래 역량보다 훨씬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가운데 비판하고 책망하는 모습을 줄이고 상대의 실수를 용납하고 책임지는 모습, ‘난 당신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힘을 내십시요. 괜잖습니다. 그럴수도 있지요”와 같은 격려의 언어들을 키워 나아갈때 우리의 삶속에 행복의 크기도 커져갈 것이고 작은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는 상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냐?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서로를 격려하며 구명정을 챙기며 질서를 지킨 세월호 단원고 학생들과 그들을 살리기위해 목숨을 던진 선생님들, 선박직원이 아닌 헌신적인 승무원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주, 그들을 끝내 지켜내지 못한 오늘 이 시대의 어른들의 모습이 야속하고 안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른이 실종된 시대와 같습니다. 교계와 사회에서도 따르고 존경할만한 어른다운 어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권력, 기득권을 유지, 보존키 위해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자는 많아 보여도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땀흘리고 수고하는 자들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어른들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왕의 힘’이 아니라 ‘양의 힘’입니다. 상대를 살리기위해 허물을 덮어주다가 허물을 덮어쓰고 속죄양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같은 격려와 위로의 리더쉽이 그립습니다. 생명줄 제때 던져 물에 빠진 생명을 살리는 희생적인 리더쉽이 그립습니다. 세상의 죄와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는 깨끗하고 강직한 어른이 그립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어른이 그립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히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