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들은 서해안을 통해서 해양 탐사라는 이유를 가지고 조선에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서해를 통해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인천, 목포, 군산 등 여러 항만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런 해안을 통하여 조선을 향한 선교사들의 발걸음 역시 서해를 통해 이어졌다.
오늘 소개되는 마량진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 사람들로부터 성경이 전수되었다는 기록을 가진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1816년 9월 4일 충청남도 서천군 마량진에 영국 알세스트(Alceste)호와 리라(Lyra)호가 들어왔다. 이 두 척의 군함은 영국으로부터 명을 받고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며 해도(海圖)를 작성하기 위해 중국을 떠나 마량진 앞 갑곶에 일시 정박하게 되었다. 이 때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이승렬에게 함장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은 그들에게 조선 조정에 전달하라고 영어로 된 성경책을 전수했다. 이것이 문헌상(조선왕조 순조실록)의 기록으로 남아있어, 한국 최초의 성경전수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이곳에 ‘한국 최초성경전래기념비’와 아펜젤러순직기념비를 세웠다.
한편 아펜젤러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공식적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 정동제일교회 등 조선의 첫 감리교회들을 세웠고, 성경 번역사업과 선교활동에 나섰을 뿐 아니라 배재학당 등을 설립하여 조선 근대교육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일본 선박 구마가와마루호[웅천환(熊川丸)]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마량 진으로부터 약 40Km 떨어진 어청도 앞바다에서 같은 일본 선박회사 배와의 충돌로 순직하였다.
당시 살아남은 미국광산업자 보울비의 증언에 따르면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아펜젤러는 배 위로 올라와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배 밑으로 내려가서는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목포까지 데리고 가던 여학생과 조사 조성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침몰하는 배 밑으로 내려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끝까지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순직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량진에 그가 탔던 침몰한 배 모양을 상징하는 건축으로 순직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은 그의 순직 110주년을 맞으며 문을 열고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건물면적 350㎡)로 주 전시실인 지하 1층(뱃머리 부분)에는 감리교 선교의 과거ㆍ현재ㆍ미래 전시관이, 2층과 3층에는 선교역사 자료실과 전망대 등으로 꾸며져 있다. 즉,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애와 사역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감리교회의 선교사역을 잘 정리한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특별히 이를 주도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충청연회는 아펜젤러가 나고 자란 고향을 직접 방문하여 그가 처음 조선선교사로 출발했던 러블리레인교회를 비롯, 든든한 후원자였던 존 프랭클린 가우처 목사의 흔적을 찾아 제대로 고증해 내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문명에서 소외된 어두운 조선의 역사를 바꾼 ‘복음’이 최초로 전래된 땅이 바로 충청남도 서천 마량진이다. 그리고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복음을 번역하다가 종내 조선인을 구하려다 순직한 아펜젤러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멈춘 곳도 역시 이곳 마량진이다.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기독교 역사의 시작은 작은 마량진에서 일어난 이 두 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한국 교회의 세계 선교사역도 이곳에서 불을 집혀야 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소: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251-1번지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출처: 한국 감리교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