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레(John Benjamin Wesley, 1703-1791)에 대한 역사 바로 잡기
(존 웨슬리 회심 기념일이 5월 24일)
1.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 이 표현이 언제 나온 말인가?
1709년 웨슬리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목사에게 불만이 있는 교인이 목사관에 불을 질렀다. 온 가족이 다 대피하고 보니까 한 명이 모자란 것이 발견됨. 웨슬리가 여전히 2층에 있었던 것이다. 지붕 무너지기 직전에 두 명의 마을 주민들이 웨슬리를 구출했다. 그리고 그 직후 지붕이 내려앉았다. 어머니 수산나는 이런 웨슬리를 가리켜 “a brand plucked from (or out of) the burning”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찰스 웨슬레가 자신의 journal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은 있다. 전혀 다른 context에서. 예배 도중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서, 존 웨슬레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thunderstruck,” “wounded by the sword of the Spirit,” “seized with strong pain,” “cut to the heart,” “sunk to the earth”를 경험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가서 그에게 기도를 해주고, 그가 다시 평온을 되찾게 해주게 되는데, 이렇게 평온을 되찾은 사람을 가리켜 찰스는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불에서 막 꺼낸 타다 남은 나무/부지깽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 1753년에 웨슬레는 자신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죽음을 생각할 때 자신의 비석에 새길 글을 미리 만들었다(실제로 죽은 때는 1791년.) “Here lies the body of John Wesley, A brand, not once only, plucked out of the fire.” 아마 스가랴 3:2절을 생각하며 이런 표현을 썼을까? (“Is not this a brand plucked out of the fire?”) 하나님이 온갖 시험환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해주시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웨슬레가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아모스 4:11절에도 같은 표현. “I overthrew some of you as I overthrew Sodom and Gomorrah. You were like a burning stick snatched from the fire, yet you have not returned to me,” declares the Lord.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론은 이것이 웨슬레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화재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사실이다.
2. 신성클럽은 누가 시작했나? 웨슬레는 1724년에 Oxford의 Christ College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목회하는 Epworth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1725년 deacon 안수를 받고, 그 이듬해 1726년 9월에 다시 Oxford도 돌아왔다. 목적은 Lincoln College의 fellow로 임명받아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2년 후 1728년에 priest가 됨) 웨슬레가 이렇게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서 보니 자기 동생 찰스가 신성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찰스는 학교에 이신론(deism)이 퍼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사람들을 모아 경건회를 열고 있었다. 이렇게 신성클럽은 찰스가 시작해서 주도하고 있었는데, 웨슬레는 이 모임에 가담하여, 얼마 후에 이 모임의 리더가 되었다. (당시 웨슬리만 안수받은 목사였고, 교수였고, 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 Holy Club에서 한 일은, 경건 생활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 매주 최소한 한 번의 성만찬, 개인기도, 교도소 전도, 매일 오후에 3시간씩 모여서 그리스어 신약성서 연구와 경건서적 연구하는 것 등). 이들 집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줌: holy club, methodists (methodist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웨슬레가 oxford에 도착하기 전에, 즉 찰스가 신성클럽을 운영하고 있을 때 붙여졌다.)
3. 웨슬레가 조지아 선교를 간 이유? 아버지 때문이었다. 1735년 4월에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사망했다. 사무엘은 조지아 식민지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George Oglethorpe에게 자기가 10년만 젊었다면 자기의 마지막 생을 조지아에서 보내겠다고 편지를 썼다. (조지아는 빚을 갚지 못해서 감옥생활을 하던 “질이 좋은” 죄수들을 위해 만든 곳. 당시 왕이 George II였기 때문에, 이곳이 조지아가 된 것). 아버지는 죽기 몇 년 전부터 웨슬레에게 자기 뒤를 이어서 Epworth에서 목회를 하라고 요청을 했는데, 웨슬레가 계속 거절을 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기 직전에 웨슬레의 손을 꼭 잡고, 자기 뒤를 이어 이곳에서 목회를 하라고 부탁을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그를 돌아오라고 말하고, 결정적으로 감독도 꼭 돌아올 것을 명령해서 웨슬레는 결국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7월에 학교로 돌아왔는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런던에서 전갈이 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욥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이 곧 출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웨슬레가 런던에 와서 끝마무리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런던으로 갔는데, 이때 그에게 조지아에 가 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것. (조지아의 주지사인 James Oglethorpe가 Savannah에 목사가 필요하던 차에, 웨슬레와 찰스가 친구 Dr. John Burton의 권고를 받고 이에 자원하였던 것이다. 이 웨슬레 형제 말고 두 명이 더 자원해서 갔다) 웨슬레는 아버지가 원했던 목회를 못해서 한참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면 그나마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며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어머니는 자기에게 아들이 20명 있다면, 평생 그들을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웨슬레는 10월에 조지아로 떠나게 된 것이다. (웨슬레는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 자격으로 조지아에 파송됨.)
4. 웨슬레가 모라비안들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때가 언제? 조지아에서 영국으로 배를 타고 올 때가 아니라, 처음에 조지아를 향해 배를 타고 갈 때이다. 웨슬레는 1735년 10월에 모라비안들이 조지아의 인디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미국행 배를 타고 갔다. 이 배에 웨슬레도 타고 있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풍랑이 일고, 모두 겁에 질리게 되었다. 그런데 모라비안들은 계속 조용히 찬송을 부르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자 이것을 보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 배의 chaplain인데, 지금 내가 죽을까봐 겁에 질려 있다니!” *사바나에 도착한 후, 모라비안인 Gottlieb Spangenberg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함. 이때 그가 질문: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머뭇거리니까, 다음 질문: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웨슬레 대답: “그가 세상의 구세주이신 것을 압니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즉 당신의 구세주인가를 묻는 것). 웨슬레: “나는 그분이 나를 구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웨슬레: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니었다.)
5. 웨슬레는 성령의 “뜨거운 불”을 체험하고 회심한 것일까? 1738년 5월 24일 8시 45분. 그날 저녁때 Aldersgate 거리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자가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이때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 (strangely warmed). 보통 부흥운동에서 표현 하는대로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때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6. “세계는 나의 교구다”의 뜻은? 세계 선교 (원주민 선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공회에서 설교단을 주지 않으니까 교회 밖에 있는 모든 곳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아직까지는 세계선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윌리암 케리가 처음으로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선교를 주장한 사람이다). 런던으로 돌아온 웨슬레는 교회들에서 계속 설교를 했지만,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 후 웨슬레는 Jonathan Edwards가 미국 Massachusetts의 Northampton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후 몇 주 후에 웨슬레에게서도 그런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신성클럽의 일원이었던 George Whitefield를 (웨슬레보다 9살 아래) 통해서였다. George Whitefield는 유명한 칼빈주의 부흥사이다. (웨슬레가 사바나 선교가기 전날 밤에 신성클럽에 가입함.)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흥운동 주도. 그는 대단한 웅변가이고 그의 설교는 대단히 emotional했다(당시 가장 유명한 actor인 David Garrick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I would give a £100 if I could only say ‘Oh’ like Mr. Whitefield.” 그리고 휘트필드는 Mesopotamia라는 단어를 너무 감동적으로 발음을 해서 사람들을 전율시키고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트필드는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고, 그에게 설교단을 내어주지 앉자, 그는 야외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대표적으로 브리스톨 (1739년 2월). 웨슬레는 그 후 3월에 바통을 이어받아 브리스톨로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당시 위트필드가 영국의 Bristol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미국으로 가야 할 때가 되자, 웨슬리에게 이 일을 넘긴 것이다. 웨슬리는 처음에는 야외에서 설교하기를 거절함. 이유는 자신의 웅변술이 절대 위트필드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성공회에서 감리교를 공격할 때 주요 공격대상이 위트필드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니까 전통적인 질서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교회 안에서 설교를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찰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브리스톨의 야외로 나가서 3000명이 넘는 광부들을 앞에 놓고 설교했는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감리교 부흥운동이 시작이 된다. 웨슬레는 이때를 기점으로 (1739년 봄) 완전히 바뀐 설교자가 되는데, 이전에는 자신 없는 불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불을 뿜는 설교자가 된 것이다. 웨슬레는 그 후 계속 개인적 영성과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기존 성공회에서 점점 웨슬레에게 설교단을 주지 않게 되자 (이때쯤 웨슬레가 브리스톨에 가서 설교를 시작할 무렵), “세계는 나의 교구다”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밖에서 설교를 했다. (웨슬레가 이 말을 한 것은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였다. 친구가 말하기를, 웨슬레도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societies에서 설교하지 말고 다른 성공회 목사처럼 교구 안에서 설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니까, 그의 확고한 신념을 이렇게 표현한 것. 나중에 성공회 감독들이 동일한 논조로 웨슬레와 위트필드를 비판했을 때, 웨슬레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조로 대응을 함). 그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설교하고, 여관에서 나그네들에게 설교하고, 배를 타고 가면서 선상에서 설교를 하고, Cornwall에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3만 명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고, Epworth 교회에서 설교단을 내주지 않자, 교회 뜰에 있는 아버지 무덤 위에서 수백 명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7. 속회와 밴드는 웨슬레가 만들었다? 원래 밴드는 모라비안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들이 Herrnhut를 choir란 이름으로 나누어서 소그룹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전체 조직을 choir로 만들었다. (예, married choir, the youth’s choir, little boys’ choir, single men’s choir, single women’s choir, widows’ choir 등등) 전체를 10개의 choir 조직 단위로 만들었다. 웨슬레는 이것을 배워서 1738년에 감리교회 운동에 적용한 것이다(속회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밴드를 시행하고 있었다). 모라비안 밴드와의 차이점을 보면, 웨슬레의 band의 특징은 구성원이 일반 사람들이라는 점 (아직 완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계속 신앙에 의심이 있고, 때로는 wilderness state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 degrees of faith를 인정하는 개념). 그러나 모라비안의 경우는 구성원들이 spiritual elite였다. 즉 모라비안의 band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계속 거룩한 삶을 지속하도록 관리하는 도구였다. band는 society에 속한 사람들 중,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열심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로 모여서 죄의 문제를 나누고 서로 기도로 도움을 주고 받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회의 경우와는 다른 직접적인 질문을 한다. (“지난주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 모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모임이고, homogeneous한 모임이고 [남자반, 여자반, 소년반, 기혼남반, 처녀반 등등], 5-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 모였다. (1739년 3월에 위트필드가 웨슬레에게 브리스톨의 societies를 넘겨줄 때, 많은 이들이 band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many are ripe for bands)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자기는 대중설교는 잘 하지만, 조직은 잘 못해서, 웨슬레가 이 일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society에는 나오지만 웨슬레의 band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체크해주는 장치가 없었다. 이 gap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채워지게 된다. 그것이 속회이다. 속회(class)가 생긴 배경 (1742):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빚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때 리더중 하나가 제안을 했다. society를 12명씩 나누고 책임자를 한 사람씩 선정하여 그 12명의 집을 다니면서 매주 1페니씩 갹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12페니를 못 걷으면, 차액은 leader가 자기 돈으로 채우자는 것. 이것이 결정되어서 리더들이 돈을 걷으러 집을 방문하는데, 예상치도 않았던 많은 문제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가정 폭력, 술주정 등등. 웨슬레는 이 보고를 받고 이것이 좋은 목회적 기회라고 느끼고 방법을 개선했다. 이제부터는 속장이 집집이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매주 모아서 단체로 성경공부도 시키고 삶을 나누게 시키는 것이다. 즉 속장이 속원들을 영적으로 care하는 목회적 임무를 가지게 한 것이다. *속회는 society에 속한 사람은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 지역별로 안배. 속회에서 하는 주요 임무는 각 회원의 영적 성장을 체크하고 도와주는 것. “How is it with your soul?”이 주요 질문이었다. 그러나 성격상 band에 비하여 아직 기독교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많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장이 그런 목회적 임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웨슬레는 아주 실용적(pragmatic)인 사람이었다.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당시 사람들에게 appeal할 수 있는 방법과 제도를 고안해서 이용했다. 그래서 society, class, band 등의 제도가 처음부터 웨슬레의 지시 하에 한 package로 제시되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필요에 따라 하나씩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웨슬레의 key word는 accessibility!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system을 변형시키는 것이 웨슬레의 특기였다. 8. 웨슬레의 소그룹 운동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나? 1) 간접적으로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 스페너의 collegia pietatis. 비록 웨슬레가 collegia를 explicitly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웨슬레의 작품에 스페너나 collegia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웨슬레는 스페너에게 크게 영향을 준 Johann Arndt의 글을 읽었고, 스페너의 제자인 Franke의 글도 열심히 읽었다. 독일 경건주의의 기본 개념이 그의 속회조직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2) 직접적으로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nonconformist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 둘은 다시 영국 성공회로 회귀하였다. (그들의 아버지들 즉 존 웨슬레의 친조부와 외조부에 반대하여). 그러나 웨슬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들의 puritan적인 신앙은 계속 지속하여서, 경건주의적인 소그룹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670년대부터 영국에는 소그룹을 통한 경건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날 때 영국에서도 비슷한 평행 운동이 일어났다. 아마 독일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영국의 소그룹은 독특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puritan적인 moralism을 강조한다는 점이었다.
(크리스천 위클리 ‘서북부 KUMC 목회자 수양회시, 홍삼열(산타 클라라 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발제, 교회사 전공 P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