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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 64주기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 64주기
지난 7월, 외국인 최초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

▲ 헐버트 선교사 64주기 추모식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내 백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열렸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헐버트 선교사, 동대문교회의 2대 담임이기도 했던 헐버트의 64주기 추모식이 광복절을 맞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주최로 지난 8월 12일 오전 11시 그의 묘소가 있는 마포구 합정동 소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내 백주년선교기념관에서 거행됐다.

 

 

64주기가 특별해진 이유는 헐버트 선교사가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지난 7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2013년 7월)’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올해는 그의 탄생 150주년이기도 하다.

 

이번 추모식에는 특별히 헐버트박사의 증손자인 킴벌 헐버트(Kimball A. Hulbert)가 초청되어 국가보훈처로부터 감사패를 받았으며, 헐버트가 감리교 목사였던 점을 배려해 서울연회의 김영헌 감독이 기념사업회로부터 공식 초청되어 이날 행사에서 유일하게 종교색을 띤 ‘기도’순서를 맡았다.

 

서울경찰악대의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가진 이날 추모식에는 서울지방보훈청장, 안철수 의원, 제프리 존스 국제변호사, 박홍섭 마포구청장, 광복회 회장, 기념사업회원, 유족,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하여 헌화 했으며, 청년들로 구성된 ‘헐버트청년모임’이 발족되기도 했다.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의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는 우리 국민들에게 아직도 낯선 이름”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고종 황제께서 무한한 신뢰를 보내셨고, 이승만 대통령이 진심어린 경의와 감사를 표했으며, 안중근 의사는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라고 뤼순감옥에서 일본 경찰에 공술하였다”고 ‘식사’에서 전했다.

 

광복회에서도 이날 추모식에 참석하여 “선교사이면서 한국학자와 역사학자, 언론인이기도 하셨던 박사님께서는 을사늑약 직후,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차례로 만나 을사늑약의 무효와 한국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의 야만적 탄압을 저서와 언론을 통해 폭로한 분”이라고 소개하고 1949년에86세의 고령으로 8.15경축식에 참석차 내한 하셨다가 일주일 만에 안타깝게 서거하셨다고 추모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평소 그가 갈망한 대로 한국 땅에 묻힌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의 김영헌 감독은 기도 순서에서 “한국을 사랑한 헐버트의 심장을 가지고 모든 억압받는 이들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돕는 헐버트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헐버트의 증손자인 킴벌 헐버트(Kimball Alston Hulbert)씨는 “할아버지께서 교육과 평화를 위해 보여주신 헌신을 기리고 전해 내려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기념사업회측과 참석한 내빈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지가 받들어져 통일한국의 초석이 되길 바란다는 기원을 남기기도 했다.

킴벌 헐버트는 13일 경북 문경에서 제막되는 ‘문경새재아리랑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14일에는 서울시 마포구(박홍섭 구청장)로부터 마포구 명예구민증을 수여 받을 예정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1886년 23세의 나이에 육영공원 영어교사 자격으로 조선을 찾아 목사, 교육자,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복음전도사, 황제의 밀사 그리고 항일독립운동가로 오직 한국만을 위해 외롭게 활동하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서 한국근대식 교육제도를 도입하였으며, 1891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간했고 1897년에는 서재필을 도와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발굴하였으며 한글의 띄어쓰기와 마침표 찍기 등 교과서 시스템을 정비했다.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1905)”, “대한제국 멸망사(1906)” 등을 저술했다.

 

이 외에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채보하여 한국의 문화를 서방에 알렸고 YMCA를 창립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임명되어 일제의 부당성을 성토한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문명화의 선구자였다.                                                                                        [당당뉴스 제공]

 

▲ 헐버트 선교사

 

헐버트 선교사는 누구인가?

 

 

초년기

 

헐버트는 1862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매리 우드워드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 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1889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 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지 1년이 안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 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 헐버트 선교사 64주기 추모식에는 서울지방보훈청장, 안철수 의원, 제프리 존스 국제변호사, 박홍섭 마포구청장, 광복회 총무, 기념사업회원, 유족,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하여 헌화 했으며, 청년들로 구성된 ‘헐버트청년모임’이 발족되기도 했다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제국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해방되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42년 만에 내한하였다. 내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료출처=위키백과]

 

▲ 문경새재 아리랑비.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채보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헐버트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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