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독립기념일 특집] ‘큰 바위 얼굴’ 마운트 러시모어(Mt. Rushmore) 국립 기념
사우스 다코다 주에 있는 마운트 러시모어 국립 기념비(Mount Rushmore National Memorial)는 그냥 ‘마운트 러시모어’란 말로 통한다. 미국 땅 여러 곳에 널려 있는 기념비 중에서도 최고의 기념비로 꼽힌다. 미국인에겐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을 여행하는 외국 사람들도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결심은 해 보지만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이민 온 해는 1980년이다. 한해가 지난 1981년 미 대륙횡단을 하면서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때가 벌써 30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금년 7월 4일 미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이곳 마운트 러시모어를 소개한다.
러시모어는 사우스 다코타 주 서부의 최대도시인 래피드시티(Rapid City)로부터 남서쪽으로 20여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블랙힐스 내셔날 포레스트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엔 울창한 소나무가 많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달려도 보이는 건 초원 뿐이요, 버팔로 뿐인데 이 블랙힐스에 들어서면 갑자기 산악지대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평원에 솟은 높은 산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연상하며 이곳 러시모어의 대통령 조각을 흔히 ‘대통령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큰 바위 얼굴 조각이 새겨진 바위산 앞으로는 커다란 원형극장이 있다. 원형극장과 함께 보글럼 박물관이 붙어있고 이 보글럼 뮤지엄의 옥상이 전망대, 즉 그랜드 뷰 테라스이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정면으로 대통령 얼굴 조각을 관람할 수 있다. 조각상에서 전망대까지는 직선거리로 600~700미터 거리.
이곳의 4명의 대통령들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대표급’이라고 알려진 인물들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고 있는 조지 워싱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미국의 땅덩이를 세계 3번째로 키우는 데 초석을 다진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연방시스템을 지키면서 유니온을 이끌고 남북전쟁에서 승리,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파나마 운하를 뚫어 세계를 좀 더 가깝게 만든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4명의 대통령이다.
루즈벨트는 앞선 3명의 대통령보다는 업적이 좀 빠진 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이 조각상을 건축할 당시의 대통령이라서 그냥 무임승차 한 격이라고 하지만 미 서부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그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수많은 국립공원이나 국립 기념비를 지정해 놓은 업적만 봐도 훌륭한 치적이 아닐 수 없다.
마운트러시모어의 처음 계획은 관광객 유치가 목적
사실 이 러시모어 기념비의 건립계획은 비교적 가난한 이 지역의 관광수입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국 대평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주리(Missouri)강의 동쪽지역 즉 다코타 주의 일부와 아이오와, 미네소타 지역은 밀 생산 등으로 유명한 대표적 곡창지대. 엄청난 농산물 생산으로 잘 사는 지역이다.
그러나 미주리 강 서부지역은 초원지대에 버팔로가 줄지어 뛰어다니는 모습 외엔 별로 생산품이 없다. 러시모어에서 동쪽으로 2시간 정도를 가면 배드랜드(Badland) 국립공원이 나오는데 글자 그대로 이 지역은 배드랜드다.
이 지역 사람들은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한 방편으로 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두고 이 기념비를 고안해 낸 것이다.
기념비를 처음 착상한 사람은 돈 로빈슨(Doane Robinson)이란 사람이다. 마운트 러시모어가 결국은 이 사람 때문에 유명해 진 것이다. 그리고 4명의 대통령 큰 바위 얼굴도 이 사람 때문이었다.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돈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주장 앞에는 열세였다.
‘러시모어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돈 로빈슨은 처음엔 유명한 인디언 추장 ‘레드 클라우드’나 서부 탐험가 루이스와 클락 같은 인물들을 새기자는 제안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낸 조각가 굿전 보글럼(Gutzon Borglum)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인물들의 조각상을 새기는 데 자신의 여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보글럼은 역사적 인물 중에서도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전국구’ 수준의 인물이어여 한다고 주장했다.
보글럼은 두 차례의 지질 답사여행을 거쳐 1925년 8월 13일 바위의 종류와 경도, 위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 마운트 러시모어라고 결론짓고 그곳에다 조각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 그로부터 보글럼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14년 동안 러시모어 대통령상 조각에 매달렸다.
조각가로서의 보글럼의 예술적 자질은 러시모어 조각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셈이다. 산꼭대기의 화강암 절벽에다 4명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는 것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까? 조각 작업이 주로 다이너마이트 폭파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건립과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있었다. 산 정상에다 조각상을 새기는 것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작업이었다. 보글럼 자신은 인생 최대의 역작을 남길 작정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그를 돕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고용돼 노동을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기 전까지는 재정적 어려움도 커서 인부들의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1927년 휴가차 래피드 시티를 방문한 쿨리지 미국 대통령은 처음으로 러시모어를 ‘국가적 성지’로 언급하고 연방 예산지원이 성사되도록 노력하여 부진했던 사업이 탄력을 받기도 했다.
마운트 러시모어의 절벽 사면에 인물들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저 구경꾼처럼 바라보던 사람들의 생각도 바꿔지기 시작했다. 보글럼이 산 위에다 옮겨 놓고 싶었던 꿈은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산꼭대기에 대통령의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자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14년 동안 이 마뉴먼트를 완성하기 위해 들어간 돈은 1백만 달러보다 조금 적은 98만 9천9백92달러였다고 한다. 보글럼이 사망한 후 기념비 완공의 마지막 작업은 그의 아들 링컨 보글럼이 맡아 1941년 10월 31일 2대에 걸친 기념비 조각 작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금의 마운트 러시모어 관광수입은 사우스 다코타 주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로빈슨의 처음 기획 의도는 100%를 초과하여 150% 달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각가 보글럼은 누구인가?
보글럼은 덴마크 이민자의 아들로 1867년에 아이다호에서 태어났다. 네브라스카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캘리포니아, 파리, 런던에서 공부했다.
일부다처제를 따르는 몰몬 가정에서 태어난 보글럼은 2명의 아내를 갖고 있던 아버지가 일부다처제를 거부하고 타주로 이주하면서 보글럼의 어머니를 버렸다. 보글럼은 다른 8명의 형제와 함께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여러번 가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마침내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파리에서 공부할 때는 유명한 조각가 로댕을 만나기도 했다. 1901년 미국으로 돌아와 십년동안 그는 수많은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조지아주 ‘스톤 마운튼’에 거대한 벽화를 조각하는 것이었다. 남부 연합(1860~61년 사이에 미 합중국을 탈퇴해서 미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의 11개 주, the Confederacy)을 기념하기 위해 큰 바위에 남부군을 조각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그는 다 완성하지는 못한 채 손을 뗐다.
그 후 사우스 다코다 주로부터 관광수입을 올려서 주 정부의 수입창출에 기여하자는 목적으로 보글럼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네 명의 대통령을 조각하기로 하고 이를 수락했다.
그는 당시 12살의 아들 링컨에게 “이 위대한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말함으로 그의 확고한 조각의지를 밝혔다고 전해진다.
보글럼은 마운트 러시모어 말고도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리모델하기도 했고 뉴욕에 있는 성 요한 캐시드럴(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에 ‘12 제자상’을 조각하기도 했다.
보글럼은 큰 바위 얼굴 조작가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후 사망 하여 남가주 글렌데일에 있는 포레스트 론에 묻혀있다. 그리고 아내 매리는 러시모어 조각에 매달려 있는 남편에게 돈 걱정 말라며 2명의 자녀들을 양육해 왔는데 남편과 사별 후 1955년까지 살다가 남편의 무덤에 함께 묻혀 있다.
보글럼은 위대한 조각가였고 마운트 러시모어 조각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그는 인종주의자요, 특히 백인 우월단체인 KKK(Ku Klux Klan) 단원이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