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heresey)란
이단들은 성경이 기록된 초대교회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왜 이렇게 많은 이단들이 계속적으로 존재할까? 그 이유는 귀중한 것일수록 가짜가 많은 이유와 같다. 가격이 비싸고 유명한 명품의 브랜드일수록 모조품이 많은 법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분별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단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정의와 개념부터 살펴보자.
(1) 한글의 문자적인 의미: 단을 끝단(端)으로 보아서 처음과 중간은 같은데 끝이 다르다고 한다. 이단은 처음은 비슷하여 분별이 어렵지만, 나중에는 전혀 달라진다고 해석한다. 또 ‘端’은 ‘옳다, 바르다’는 뜻도 있어서, 옳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2) 헬라어적인 의미: 헬라어로 ‘이단’이란 용어는 ‘하이레시스’(heresy)라고 한다. 이 단어의 뜻은 원래 ‘자유로운 선택'(free choice)이란 의미로 ‘당파, 종파’를 가르켰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의 당파(행5:17), 바리새파(행15:5)등에도 사용되었고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행26:5)라는 구절에도 사용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이 단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하면서, 이 용어는 ‘교회와 대적하는 종파’라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단들은 항상 “이단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즉 ‘이단’이라는 헬라적인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로만 보면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또 하나의 당파, 종파라는 것을 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문자적인 뜻이라면 그들은 이단이라는 말을 특별히 싫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하이레시스’라는 단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즉 이단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고전11:19(교회의 분쟁을 일으키는 편당), 갈5:20(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이단), 벧후2:1(멸망케 할 이단)이라는 나쁜 뜻에 사용된다.
(3) 영어적인 의미: 영어에서 사용되는 이단에 대한 단어는 heresy, sect, cult 들이 있다. sect 란 원래 ‘분리’를 뜻하며, cult 란 ‘숭배, 예배’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들 중에서 이단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헬라어에서 어원을 갖는 heresy 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진다.
(4) 교리적 차이: 행 24:5은 바울에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말하고 있다. 또 바울은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행24:14) 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이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는 유대교의 교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단들은 이단이라는 용어가 상대적, 배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장로교의 입장에서 다른 신학과 교리를 가진 감리교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감리교의 시각에서 장로교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리는 서로 다르지만, 성경적인 범주 안에서 인정되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인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는 다양성이 인정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기록된 말씀, 즉 성경 안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단과 정통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교리이며, 그 교리가 성경적인가에 대한 기준에 달려있다. 유대교의 경전은 구약성경이다.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며, 구약과 신약성경이 함께 그 신앙적 기준이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 기준이 다르다. 즉 기독교의 이단은 ‘기록된 성경’의 범주인 성경 66권의 내용을 벗어나는 교리를 가진 곳을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5) 자력으로 취하는 교리: ‘하이레시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이레오마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자력(自力)으로 선택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어느 교회나 단체의 교주 혹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주장, 즉 인위적이며 자력적인 가르침이 그곳의 교리가 된다면 그곳은 이단이 되어진다. 즉 이단이란 단어의 정의는 ‘인위적이며 자력으로 취한 가르침을 갖는 분파’를 말하며, 성경과 어긋나는 ‘다른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단체나 분파를 말한다.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선생을 ‘이단’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하이레시스)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결론적으로 이단들은 기록된 성경말씀이 아니라 자력적인 가르침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속에는 진리가 없으며, 제 것으로 말하는 거짓말장이들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즉 이단이란 뜻은 교회의 전통적인 의미로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하며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의 ‘다른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유1:18)를 말한다. 바울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9)
(6) 이단의 정의: 초대교회의 감독 이레니우스는 정통을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믿어진 바”라고 하였고, 이단을 “올바른 교리의 표준에서의 이탈”로 정의하였다. 20세기 이단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윌터마틴은 이단에 대해서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집단”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이단연구가인 최삼경목사는 “2천년 동안 교회에 전승되어온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이나 단체들, 즉 교단을 초월해서 인정하는 공통된 교리들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단은 교리와 신학으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어느 곳은 자기들은 교리와 신학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곳일수록 그들은 모두 획일적이고 동일한 사상과 교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교리와 신학이 없는 것은 자랑할 것이 아니며, 정말로 교리와 신학이 없는 곳이라면 그곳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하여 모두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성경을 인용하느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관점이 되어진다. 성경을 잘 모르는 초신자는 이단을 분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에 특별히 유의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정통교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으로서, 때로는 목회자의 신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도 있으며, 선한 의의 일군의 모습(고후11:15)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들은 양의 옷(마7:15)을 입고 나타날 수도 있으며, 광명의 천사(고후11:4)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의 이름과 거짓 선지자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도 있으며,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어 보여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은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첫째,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이 성경적인 내용인가를 먼저 판단해야만 한다.
둘째, 그들의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향기에 부합되는가를 판단해야만 한다.
세째, 그들의 신앙적인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이단에 대해서 디도서 3장에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관계를 끊고 멀리하라고 충고하고 있으며, 사도요한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로부터 변질된 거짓 복음이 전파될 수 있음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
“누구든지 이 교훈(teaching)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1:10-11)
(7) 이단과 다른 사이비(似而非)란 무슨 뜻일까?
‘사이비’란 가짜라는 뜻이다. 비록 교리가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곳은 이단이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 거짓종교의 탓을 쓰고 고의적인 다른 목적으로 유사 종교를 운영하는 곳은 가짜 사이비단체가 된다고 정의하고 싶다. 특히 사람을 하나님이나 재림예수, 보혜사라고 하는 곳, 혹은 목사나 교주를 성경에서 예언된 존재라고 말하는 곳은 사이비 단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종교적인 행위의 댓가로 무리한 헌금을 강요하거나 시한부종말론등으로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곳은 사이비단체이다.
2. 정통교리(Ortho-dox)
간혹 어떤 사람들은 교리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을 하기도 하고, 교리는 인위적으로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무사하여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먼저 이단교리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통교리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삼위일체론과 기독론등의 정통신학은 그 당시에 이단들이 이상한 주장을 시작함으로서, 교회가 그들을 대항하고 반박하는 과정과 성경적인 토론을 통하게 정립되어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한 정통신학이 정립된 과정은 이단과 정통의 싸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동섭교수는 “이단은 정통의 시어머니”라고 말하였다.
성경의 정경화도 당시 영지주의의 마르시온이 사도바울의 서신을 제외시키고 자신의 저서를 포함하여 성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정경화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정통교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한 논리를 말한다. 실제로 이단교회이건, 정통교회이건 그들 나름대로의 교리를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교리가 성경적이며 정통교리인가 하는 점이다. 정경옥교수는 “정통교리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말하였다. 어느 교회나 단체를 이단인가 아닌가로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교리가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살펴 보기 때문이다. 즉 교리를 비교함으로서 이단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리가 왜 중요하고 왜 필요할까?
첫째, 교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단 혹은 다른 복음에 대처하고 그들을 막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교리는 울타리 같은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지하며, 또한 외부로 향해 나가려는 이탈을 보호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일년에 몇번씩 부흥회를 열면서 정통교리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이단과 사이비 사상에 미혹되고 빠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단교리가 왜 비성경적인지를 교회가 가르쳐야만 하며, 정통교리를 가르쳐야만 한다.
둘째, 교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서 이다. 참된 신앙인은 어느 누구도 교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거나 교리를 신앙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교리란 곧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향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며 이정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들과 다른 사상을 가진 단체들은 이러한 교리를 비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리가 없어져야만 자신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전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정통교리란 성경을 요약하고 정리한 것으로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하며, 예를 들면 바둑의 정석이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셋째, 교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표준과 기준을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교회를 대항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많은 이단들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며 무엇을 믿어야 올바른 신앙인지 또한 어떤 주장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준적이며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넷째, 교리를 알아야 전도를 할 수 있다. 초신자를 전도하거나 가르칠 때에 어떠한 질문을 받거나 의문점을 물어올 때가 있다. 또 타종교인을 전도할 때 우리는 최소한 기독교의 원칙과 기본 핵심은 알고 있어야 답변을 해 줄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자신에게도 확신과 확증이 될 수 있다. 즉 무조건 믿으라가 아닌 왜,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