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꽃처럼 타오른 설교자 조지 휫필드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조지 휫필드의 회심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장차 영국 교회에 부흥의 불을 지핀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14년 12월 글로스터의 여관 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 중 상당수가 성공회 성직자들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 아니라 벨 여관 주인이었다. 두 살 때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신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으며 다른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범하며 살았다. 그는 주일을 어기고 극장에 놀러 다니며 연애 잡지나 읽으면서 지냈으며 도박과 거짓말, 속된 말들, 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빠져 살았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둔 기간에 한 대중 음식점에서 손님을 시중을 들며 때로는 술을 따르면서 지냈다. 이러한 생활은 15세가 될 때 까지 계속 되었고 그의 양심은 자신을 몹시 괴롭히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 속에서 옥스퍼드 펨브로크 대학에 입학한 휫필드는 옥스퍼드에서 그 유명한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리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홀리 클럽 (Holy Club)모임에 참여하여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거듭남이 없는 엄격한 율법주의였다. 그는 그 클럽의 엄격한 규율을 실천하였지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 할 존재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휫필드는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헨리 스쿠걸 (Henry Scougal) 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이 그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거듭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끼게 되면서 심각한 영적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후 휫필드는 17세기 청교도들의 유명 작품들과 매튜 헨리의 주석과 같은 책들을 읽음으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어둠으로 부터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휫필드는 그동안 읽었던 모든 책들은 옆으로 다 치워둔 채 오직 성경만을 무릎 위에 놓고 묵상하였다. 그는 말씀 한 구절 읽고 기도하고, 또 말씀 한 구절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순간 그는 거듭남을 체험하였다. 그때 성령이 그를 인치셨으며 그는 능력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위로 부터 새로운 생명과 빛, 성령의 부어주시는 능력을 매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리를 명확하게 깨달았으며 그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는 1735년 옥스퍼드에서 회심한 후 1736년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암울했던 18세기 영국의 시대적 상황
18세기 초의 영국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몹시 소란하던 시기였다. 시민들의 소요, 폭동, 밀수, 강간, 폭력 등으로 들 끊어서, 도시든 시골이든 밤 거리는 안전하지 못했다. 감옥은 죄수들로 가득 메워졌고, 거리에서 백주에도 총에 맞아 죽은 경우도 있었고, 흉악한 범죄 행위로 인해서 공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잔인하고도 유해한 오락과 음탕한 삶과 술독에 빠져 깊이 병들어 가고 있었다. 사회는 영적인 무관심과 회의론이 팽배했고, 종교는 전반적으로 형식적이었고 생명이 없었다.
교회는 영성과 능력을 상실하면서 쇠퇴 일로에 있었고, 교회 건물은 아주 황폐해져 갔다. 사람들은 예배를 등한시 했고, 교회에 의해 변화를 받지 못한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은 그 시대의 부도덕의 나락에 휩쓸려 들어갔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강단으로부터 점점 기독교적인 색채를 탈색시켜 가고 있었다. 또한 교회지도자들이 주일 밤에 크리켓 투구를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음악 파티와 카드 파티를 장려하였다. 성직자들 마저 술취함과 방탕함과 쾌락주의에 빠져들었으며, 감독들이나 목사들은 모두 다 세속적인 일에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영국 국교회는 세속화되어 가고, 알미니안주의 (Arminianism)와 자연신론(Deism)과 이성주의(Rationalism)가 교회에 침투하여 성경의 계시성에 도전하면서부터 성경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과 핵심 교리가 심히 부패해졌고, 교회 전체 상태가 또 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양상을 나타내면서 기독교는 어떤 생명력이 있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잉글랜드 교회인 성공회는 이른 바 영적인 암흑기로서 점점 쇠퇴하여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영국은 정녕 부흥이 필요했다.
휫필드의 불타 오르는 설교
휫필드는 1736년 21세의 나이에 영국 교회 성공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영국 국교회는 매우 침체된 상채였는데 그의 첫 번째 설교는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 있는 세인트 메리 크립트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교회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세례를 받았고 처음으로 성찬예식에 참여했던 교회이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 백명의 사람들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첫 설교가 청중들에게 미친 충격은 매우 컸다. 능력과 힘이 충만하였던 휫필드의 참된 복음 설교 속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대다수 청중들이 감동을 받았으며 15명이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즉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교는 곧 수 천 수 만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첫 신호탄임을 암시했다. 휫필드 목사는 1737년 런던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권위와 능력과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그 결과 엄청난 열매가 따라 왔다.
그래서 그가 설교할 때 마다 곳곳에서 수 많은 군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 왔다. 그가 설교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가게 주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와서 설교를 들었고, 농부들은 농기구들을 다 버려 두고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고, 사업가들은 사업하는 일을 잊을 정도로 설교에 심취하였다. 휫필드의 설교 무대는 강단, 정거장, 돌담, 승마대, 풀더미, 빈들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오직 육성으로만 하는 옥외에서 행하여졌다. 22살밖에 안된 휫필드가 설교할 때 마다 어디서든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가득 찼다. 브리스톨에서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1마일을 걸어온 사람도 있었고, 수 천명이 모였고 때로는 약 5천명의 광부들이 모이기도 했다. 다음에는 1만명, 2만여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옥외에서 서서 설교를 들었다. 안개가 자욱하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군중들이 모였다.
그의 설교는 아주 잘 선포되었고 모든 영예와 참사를 받기에 합당한 것들이었다. 그의 설교는 깊이 있고 정확하며 바른 이해를 가지고 설교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빈약한 설교형식이었지만 그의 설교를 듣고서 온 회중이 전율을 느꼈다. 어떤 청중들은 하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 같았고, 천둥소리를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휫필드 설교의 핵심 메시지 – “여러분은 거듭나야 한다”
휫필드는 홍역으로 인해 사시가 된 두 눈으로 지나치게 열광하는 회중들을 응시하면서 죄 사함의 은혜와 자신의 회심 체험을 설교 중에 잘 나타내 주었다. 그는 주로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촉구한 설교를 자주 하였다. 성령의 부어 주심과 생명을 얻게 하는 능력있는 설교였다. 휫필드의 설교의 핵심 내용들은 “회개와 원죄, 칭의, 중생,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과 선택교리,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 등의 주요 교리를 강조하였다. 특별히 그의 핵심 메시지는 중생 즉 “여러분은 거듭나야 한다” 였다. 그는 중생의 긴박한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당시에 중생되지 않은 목회자들이 많았다. 휫필드는 수 많은 사역자들이 회심하지 않은 채 목회 사역을 하는 것을 혹독하게 질책하면서 그는 자신이 볼 때 “느끼지도 않는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대부분의 강단에서는 그리스도가 묻혀 버린 메시지가 설교 되었지만 휫필드는 항상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휫필드는 교회의 죄악이 국가의 죄악보다 더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고 설교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를 특징짓는 것은 열심이요, 불이요, 불꽃이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정말 엄청났다. 그의 활활 불타오르는 설교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영광을 들어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영국교회에 임한 놀라운 부흥
불꽃처럼 하늘의 진리를 선포한 그의 설교를 통하여 영적으로 암흑기인 영국과 미국에 놀라운 영적부흥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그의 확신있고 위력적인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 마음의 어둠과 죄악성을 들추어 내었고 겁을 먹고 놀라게 하였다. 눈물이 광부들의 얼굴로 흘러내리자 에 석탄 먼지로 가득한 얼굴에 흰 줄기가 생기게 되었다. 술취함과 방탕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도 모르고 죄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다. 영국교회는 매 주일마다 회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원수들이 회심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변하여 복음의 일군이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온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스코틀랜드 캠버스랭에서 거행된 성찬식 예배에 2만명이 참석하였는데 수 많은 청중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성령이 회중 가운데 물 붓듯 부어졌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풍성한 체험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사람들은 교회에 몰려 왔으며,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듣기를 원했고, 교회에 속하려고 열심을 내었다.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으며, 교회는 생명력으로 가득 찼으며, 권위 있게 복음은 전파되었다. 온 교회가 살았고 활력으로 충만하였던 것이다. 부흥은 기성교회를 완전히 깨웠다. 영국 사회가 완전히 달라지고 변화되었다.
부흥의 결과
부흥의 결과는 영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전체 모습이 변화되었다. 죄를 버리고 새 생활을 갖게 되고 모든 품행에서 변화된 모습이 나타냈다. 사회 도처에 진실, 정직, 순결의 정신이 함양되었고 반면에 범죄, 술 주정, 도박 등은 크게 줄어 들었다. 그리고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로 인해 노예제도 폐지 운동이 일어났다. 쇠퇴하였던 잉글랜드 교회가 소생함을 받았고 크게 부흥하였다. 비국교도들도 회생되었다. 회심자들이 교회에 몰려와 설교를 듣기 원했고, 교회에 속하려고 열심을 내었다.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교회는 생명력으로 가득 찼으며, 온 교회가 살았고 활력으로 충만하였던 것이다. 부흥은 기성교회를 완전히 깨웠다.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교회는 생기가 넘치고 활기찬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또한 부흥 이후 런던 선교회, 글라스고우 선교회 등 각 도시별로 선교회가 조직되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를 인도로 파송한 후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위대한 부흥 설교자의 죽음
휫필드는 열정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영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도 방문하여 부흥설교를 하였다. 또한 그는 미국 땅에서도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에 불을 당기게 되었다. 그는 1738년 미국에 건너가 조지아 및 식민지 전 지역에서 설교하였다. 그가 말씀 선포할 때 마다 많은 회심자들이 나왔다. 그는 미국을 7번 방문하였고, 대성양만 13번이나 건넜다. 그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상 목사로서 봉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7번째 미국 방문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770년 9월 30일, 55세에 이 땅의 삶을 마감하였다. 익세터의 프론트가의 한 그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1770년 9월 29일, 이곳에서 조지 휫필드가 마지막으로 설교하였다” (George Whitefield here preached his last sermon. Sept. 29. 1770).
실로 영국과 미국에 끼친 휫필드의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21세에 시작하여 55세 사망할 때 까지 그의 34년이라는 설교 사역 기간 중에 하루 평균 5-6회 설교를 하였으며 총 3만회 이상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역에 나타난 부흥설교는 사도 시대 이후로 성령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고 말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휫필드를 사도바울 이래 가장 위대한 복음 설교자라고 생각한다.
찰스 스펄전은 ‘내가 그의 생애를 읽음으로서 내가 그를 펼쳐 읽을 때 마다 내 마음은 독특한 깨우침이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휫필드의 전 생애는 생명이요 불이요 바람이며 강력이었다’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나는 휫필드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읽었다. 내가 그 작업을 하는 동안 한번도 스릴이 넘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더 나은 성도와 더 나은 설교자가 되도록 자극하였다’ 고 말하면서 그를 “이 땅에 살았던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하며
이제 우리는 휫필드의 목회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조명하면서 우리의 영적 생활의 결함이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발견되어지는 것은 겸손함이 부족하고 죄에 대한 참된 회개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보다 인간의 행복에 사로잡혀 있다. 거룩함이 없이는 천국도 없다. 우리 심령 속에서 거룩성이 타올라야 한다.
현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심령을 편안하게 해주는 설교로는 회심과 헌신을 기대할 수 없다. 18세기와 21세기가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시대는 변했지만 신학과 교리, 신앙, 복음, 십자가는 변함이 없다. 휫필드가 강하게 붙잡았던 주요 교리를 오늘날 설교자들은 붙잡아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오직 참된 복음의 선포만이 참된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됨을 확신해야 한다.
18세기의 휫필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로 하여금 설교의 능력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21세기의 휫필드는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불태워 없어지게 하리라고 한 휫필드처럼 불같은 진리에 목숨을 거는 설교자의 모습이 오늘날에는 없어 보인다. 이 시대는 휫필드가 설교한 복음을 설교하는 능력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로 충만한 설교자가 필요하다. 성령의 불을 받은 열정적인 설교자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 21세기의 휫필드가 되어 침체해가는 조국과 유럽에 부흥이 임하도록 해야 한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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