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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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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교회

로마서 1:16-17

조 영 준 목사
2017년은 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Martin Luther가 95개조의 항의문을 독일 Wittenberg 성문에 붙이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적 오류와 도덕적 부패에 도전한 것이 이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서양 격언에 “사과 하나에 씨가 몇 개 들어있는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지만, 사과 씨 하나에 몇 개의 사과가 들어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루터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려는 것은 도무지 안중에 없었고, 단지 개혁을 하고자 한 것뿐이었는데, 로마가톨릭교회에서 파문을 받고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것이 발전되어 개신교라고하는 거대한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Martin Luther의 고향인 독일에서는 이 해에 100여 곳에서 1,000개가 넘은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거행한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은 Martin Luther 혼자만 한 것은 아닙니다. Luther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Calvin, Zwingli, Melanchton, Bucer 등이 중요한 리더(leader)들이었고, 당시에 팽창하던 르넹쌍쓰 문명과, 또 각처에서 일어난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의 힘을 입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순수한 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루터를 종교개혁의 제1인자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또는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늘 뜨거운 토론제목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만 가지고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시대와 인물이 서로 맞을 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말 개혁이 필요한 때에 루터와 같은 용기 있는 인물이 있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에는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그의 신앙의 중심사상,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주는 질문과 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짧은 시간 내에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루터가 태어난 시대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대단히 타락한 권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Lord Acton이란 정치가가 말하기를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만, 이 말은 루터시대의 교회를 잘 묘사하는 말입니다. 최고의 존경을 받아야 할 교황은 부패와 정치싸움으로 말미암아 일반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많은 신부들이 결혼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첩을 거느리고 사생아를 낳고, 일도 안하면서 이름만 걸어놓고 봉급을 받기도 하던 때였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해서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 교회의 고위직을 돈을 주고 사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심지어 5살 난 아이를 위해 주교(bishop)의 직이나 수도원장의 직을 샀다고 합니다.
그 반면에 일반 서민들은 영적 기아상태 가운데 허덕이고 있었고, 간결하고 순수한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1483년에 출생한 마틴 루터는 이러한 순진한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광부로 출발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고, 아들이 법률을 공부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루터가 하루는 걷다가 굉장한 폭우와 천둥번개를 만나게 되었는데, 죽을 까봐 너무 겁이 났던 루터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살려주시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가겠습니다”–이런 서원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루터는 22살에 Wittenberg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루터가 믿던 하나님은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 죄인을 벌주시고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기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렇던 루터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성경을 연구하면서부터였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두려움과 정죄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의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이와 같은 말씀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여태까지 루터는 행위로써 자기의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위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늘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루터가 발견한 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가지고 피 땀나는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쓰기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행위로써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 인간을 의롭다 여기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진리를 루터가 재발견한 것입니다. 즉 행위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루터는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루터가 말한 유명한 슬로건 “sola fides 믿음으로써만”이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이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sola scriptura 성경으로써만”이라는 슬로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의 의가 아니라 “sola gratia 은혜로써만”이란 유명한 슬로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즉 로마가톨릭교회의 절대적 권위는 교황에게 있는데 이것을 뒤엎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즉 교황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은 교회의 산물이고 성경의 올바른 해석권이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실상 성경 위에다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을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행위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반면에 루터가 발견한 것은—지금 우리나라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초긴장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성경은 교회의 헌법과 같아서 교황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루터는 우리의 의와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올바른 믿음을 가르치는 권위가 그 위치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즉 교황이라고 하는 객관적(나 밖에) 대상에게서 믿음이라고 하는 주관적(내 안에) 확신으로 위치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천년동안 서방 기독교를 지배해 온 로마가톨릭교회를 해체시키는 혁명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행위는 무시해도 되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7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했지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믿음을 실천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로마서 2:6-8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했습니다.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말은 논리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지,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천사의 안내를 받아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찝(Jeep)차를 타고 한참 가다가 보니까 무엇인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까 그 산더미 같이 쌓인 것이 모두 입술이드랍니다. 이 사람이 안내하는 천사에게 묻기를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입술만 천당에 와 있습니까? 몸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이게 누구의 입술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게 다 신부와 목사들의 입술입니다. 말은 잘해서 설교도 잘하고 잘 가르쳤는데, 실천을 안 했기 때문에, 입술만 천당에 왔고, 몸은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참 가니까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더 큰 산더미 같은 무엇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이번에는 귀가 산더미처럼 쌓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방문자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왜 귀만 천당에 왔습니까? 몸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이게 누구 귑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건 평신도들의 귑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인—모두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들었지만, 듣기만 했지, 실천을 안 했기 때문에 귀는 천당에 왔는데, 몸은 다 지옥에 가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예화의 요점은 실천이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란 것 아닙니까?
이러한 신앙이해의 변화를 체험한 루터에게 그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 것이 면죄부를 판매한 속죄전 사건입니다. 속죄전은 당시의 교황 Leo X세가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시행한 것으로서 지금 연옥(천당과 지옥의 중간 대기소)에 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살아 있는 자가 헌금을 하면, 그 돈이 헌금함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그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와 천당으로 간다는 허무맹랑한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드린 순진한 교인들이 많이 헌금을 함으로써, 로마가톨릭교회는 막대한 돈을 걷어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멀쩡한 사기극을 보면서 더 참을 수 없었던 루터는 분연히 일어나 이것이 정말 옳으냐 아니냐를 변론해보자는 의도에서 95개조 항의문을 써서 Wittenberg 성문에 붙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루터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교황이 죄를 사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불거진 사건들로 인해 결국 로마의 교황은 1520년에 루터를 파문,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루터는 지옥감이니 상종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 해 1521년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Charles V세는 독일 Worms라는 곳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자기의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사형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최고위 통치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루터가 한 유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Ich kann nicht. 나는 할 수 없습니다. Ich stehe hier. 나는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O Gott, hilf mir. 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이제 루터는 자기의 신앙양심으로 말미암아 교황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불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루터가 체포되고 죽게 되었을 때에, Frederick the Wise라고 하는 루터가 살던 지역 통치자가 루터를 납치해서 자기 성 속에 숨어있게 했습니다. 1년 간 숨어 사는 동안에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10년 후에 루터는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신앙교육을 위해 성경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만, 당시 독일어는 통일이 안 된 상태였는데, 루터로 말미암아 독일어가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고 독일어의 기준을 정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입니다.
루터의 신학과 사상을 포괄적으로 보면 다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루터는 말씀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교회를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써만”이란 구호가 나온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성경에 나타난 복음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 안에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문자 하나하나나 책을 경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아주 이상한 신앙생활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성경을 척 펴서 제일 먼저 자기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성경을 척 펴니까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마태27:5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습관대로 하자면 자기가 스스로 목매어 죽어야 할 판인데 이걸 어떡합니까? 한참 고민하다가 “하나님, 이건 너무 하십니다. 다른 말씀을 주십시오” 하고 성경을 다시 척 펴니까 이 번에는 누가10: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문맥을 생각지 않고 단어 몇 개만 읽었다는 것입니다. 마태27:5의 말씀은 은 30냥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는 것을 보고 양심에 찔려 은 30냥을 성소에 던져 넣고, 밖에 나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10:37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는 말씀은, 예수께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질문한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결론적으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이웃이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의 앞뒤를 잘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도 잘 알아야만 합니다. 6.25 전쟁이 끝난 다음 얼마 안 되어서 어느 부흥사가 시골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아멘, 아멘” 하면서 유난스럽게 잘 믿는 티를 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부흥사가 알아보니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이 돈독한 것 같으니 한 번 시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부흥사가 이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도대체 예수님을 누가 죽였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아니 그런 질문을 왜 하십니까? 그걸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대답해 보시오. 누가 예수님을 죽였소?” 이렇게 여러 번 물으니까, 이 사람이 마지못해서 대답하기를 “6.25때 빨갱이가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믿는다고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무지를 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믿음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믿음의 내용을 알아야지요. 제가 미국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유럽의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의 전통을 가진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입교교육 (Confirmation) 받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신앙내용을 아주 중시하고 따라서 교리문답을 철저히 가르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둘째, 루터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루터의 신학을 정리하면서 루터의 신학은 “Let God be God!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라”라는 말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지 우리가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채우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욕심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황이 하나님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리나 제도도 하나님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목사나 신부도 하나님을 대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루터는 모는 믿는 자는 제사장임을 선포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아내는 사람입니다. 루터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으므로, 로마가톨릭교회와 같이 신부가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때에 또한 용서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혁명적인 교리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최고의 특권인 동시에 믿는 자 개개인이 져야할 무거운 책임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가 용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자기 마음 가운데 용서의 확신이 없으면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에 말씀 한 것같이, 신앙의 권위가 내 밖에 있는 교황에게서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란 말은 믿는 자들이 서로 제사장이 되어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있는 자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지체들이 서로 보완협력하여 건강이 유지되는 것처럼, 믿는 자들이 서로 보완협력함으로써 교회의 건강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로서 20세기의 순교자로 알려진 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 형제의 입 속에 자기의 말씀을 넣어주셨고, 우리는 형제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개신교의 한 가지 약점은 그 성격상 분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과 내 믿음의 내용이 내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개인마다 이것이 다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셨습니다만, 교회가 쪼개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왜 개신교안에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하는 것은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 개신교회의 수가 약 4,500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마치고 시선을 돌려 루터의 개혁운동을 거울삼아 현재의 한국교회를 고찰하고 문제점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질문 형태로 하겠습니다.
첫째 질문은 한국교회에 편만한 우상숭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는 신율법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주의에서 해방시키러 오셨는데, 한국교회는 다시금 행위로써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신율법주의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진짜 교인이고 무엇을 안 하면 엉터리 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의 상태를 중시하셨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기 보다 축복을 따르는 기복신앙이 교회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둘째 질문은 한국교회에 편만한 권위주의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사상에 위배되는 생각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의 중간에서 축복권을 가진 사람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축복한다”는 말을 설교에서 또 기도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그 개념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축복하시는 분이지 인간이 축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며 함께 봉사하는 평등한 신앙공동체이지 상하구조의 제도적 집단이 아닙니다.
셋째 질문은 교회 내에 도덕적 타락이 성행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루터 당시 교회는 물질의 유혹으로 타락했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이와 다를 것 없는 행태가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개인의 기업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감투싸움은 권력싸움이고 권력싸움은 결국 돈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패거리가 생기고 싸움이 끝일 날이 없습니다.
넷째 질문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루터와 같이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애족교회입니다. 상해임시정부의 배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국회의장직을 맡았던 손정도목사님은 늘 “하나님 사랑은 나랏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원은 민족의 걸레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정의의 수호자라기 보다는 “부익부 빈익빈”의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통계는 한국교회의 정체 또는 하강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단사상이 판을 치고, 이슬람이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너무 안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교회는 늘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신앙적 오류와 도덕적 부패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복음의 진리로 다시금 돌아가고, 이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 위에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500년 전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오늘의 한국교회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Flushing First Methodist Church 03/08/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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