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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형록사장(목사) 간증문-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https://youtu.be/DBsRkqrQiVM

  1.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씨앗이다.

미래의 모든 꽃들이 지금 당신의 씨앗에 담겨 있다.”

새해는 곧 희망이다. 매년 그러하듯, 지금 이 시간은 우리에게 또 다른 출발을 꿈꾸게 한다. 두려움과 고통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새롭게 꿈꿀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이다.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어떤 이들은 ‘목발’을 구입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날아오를 ‘날개’를 펼친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고 해서 우리의 고민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 해가 시작됐다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새해는 우리에게 분명 기회를 준다. 새해는 우리에게 목발이 아니라 스스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준비할 때이다. 새해는 지금 우리의 걱정거리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시기이다. 새해는 지금 우리가 지닌 고통이 내일의 꽃과 열매로 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새해를 맞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우리의 근심 걱정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씨앗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찾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힘겨운 시간을 겪고 있다면 이 역경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특별히 준비하신 씨앗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쇼핑몰의 계산대에서 예수님과 마주쳤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기쁘고 놀라운 마음으로 “이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기쁨, 행복, 지혜, 그리고 자유를 갖기를 원한다”라고 답했다. 아울러 그녀는 “이것은 그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점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 우리 가게에서는 그 열매들이 아닌, 오직 씨앗들만을 판매한다.”

나는 한때 죽음의 문턱에 놓여 두 번이나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주치의로부터 심장 이식 수술을 선고받았을 때 삶의 평화나 즐거움을 놓치고, 두려움의 끝자락에 놓여 사고의 자유마저 잃고 말았다. 고통이 삶의 날개가 될 수 있다는 지혜를 떠올리기는커녕 평생 심장 이상이라는 무거운 짐을 거머쥔 채 이식된 심장으로 목발을 짚듯 위태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내일의 모든 꽃들이 사실 오늘의 씨앗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나에게 보다 풍성한 꽃과 열매를 주시기 위해 그러한 고통의 씨앗을 안겨 주셨음을 알게 됐다. 열매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씨앗에는 무한한 풍성함이 있다는 것도 더불어 깨달았다.

모든 꽃과 열매가 씨앗으로부터 나오듯, 우리 삶의 결실들도 우리네 인생의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통과 근심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내일에의 희망의 씨앗이 된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이 우리 영생에의 씨앗이 된 것과 같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고통의 절망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희망의 싹을 쥐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이 그 희망의 싹을 쥐고 있을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신다는 것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새해를 맞이하며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잡듯, 여러분의 선택으로 지금의 고통을 보다 나은 미래에의 희망의 싹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

서른셋에 얻은치명적 질병’… 살고자 매달린 말씀

잠언 31장에서 하나님 지혜 얻어성경에 뿌리 둔 기업팀하스창립

목회자인 아버지의 헌신으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부산 한센병 환자촌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69년 12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미국 필라델피아로 가게 됐다. 학창 시절 건축공학에 관심이 많아 일찌감치 진로를 확정, 펜실베이니아대학 건축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주차빌딩 건축설계 회사인 워커사에 들어갔다. 29세에 부사장 자리에 오를 만큼 승승장구했다. 아내와 두 딸을 둔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목표는 오로지 크게 성공하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높은 자리를 차지해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런데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1991년 10월, 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심실빈맥. 심장이 불시에 빠른 속도로 계속 뛰어 숨을 거둘 수도 있는 무서운 병에 걸렸다. 건강에 대해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자신했던 내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생사를 오가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2년간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넘기면서, 오로지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심장이식 수술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잠언 31장(P31)에서 얻은 지혜로 하나님의 기업 ‘팀하스(Timhaahs)’를 창립했다.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훈을 내걸었다. 성경말씀 잠언에서 뽑은 주옥같은 원리들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다. 우리 회사는 절대다수의 미국적 비즈니스 풍토를 거슬러, 성경적 믿음과 가치에 뿌리를 두면서도 업계를 선도하는 놀라운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나님의 치유와 구속을 경험한 후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헌신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이 의미 있고 비전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 특권을 누린다. 팀하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회사이다. 고객과 직원을 최고의 존중과 존경으로 대한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상대의 일까지도 좋아한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신만 섬길 뿐이지만, 이타심으로 그 일을 하면 남까지 섬기게 된다. 그게 우리가 주어진 일 이상으로 섬기는 이유다.

팀하스는 언스트앤영 최우수 건설 기업가상, 필라델피아 올해의 엔지니어상 등을 수상한 미국 유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올해로 창립 21주년을 맞이한 팀하스는 미국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 중 하나로, 비즈니스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나의 이야기(국민일보 2015년 7월 25일자 17면 참조)는 3년 전에 KBS TV ‘글로벌 성공시대’에 방영된 바 있다.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맞아 국민일보를 통해 나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전할 귀한 선물을 받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 코너를 통해 믿음의 기업이 잠언 31장으로 어떻게 비즈니스를 실천해 왔는지 선명하게 보여 주고 싶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한국의 대학생과 청년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비즈니스 현장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크리스천 CEO와 직장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3.

한센병 환자촌서 태어나고 자라는특별한 축복

목사인 아버지 첫 목회 사역지로 선택그곳에서 환자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

돌아보면 내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특별한 축복 안에 있었다. 단지 심장 이상으로 죽음과 마주서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1969년, 열두 살 때였다. 그 전까지는 나의 가족은 부산에 살았다. 어린 시절, 나의 인생을 결정지은 가장 큰 요인은 아버지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담대함이다. 바울이 담대하게 자기가 체포될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듯이 아버지는 한센병 환자촌을 자신의 사역지로 택했다.

당시 한센병 환자는 위험한 전염병을 가졌다고 생각해서 접근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나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나 섬에 격리되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회자도 흔치 않았다.

부산 고려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는 “육신의 더러움은 영의 더러움보다 가볍다”면서 한센병 환자촌 목회를 결심했고, 결혼 후 어머니를 데리고 한센병 환자촌으로 들어가 목회를 시작했다.

원래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거창이다. 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민족과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죽을 고비를 맞았다. 죽음과 직면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부르며 이렇게 외치셨다고 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평생 당신을 주로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아버지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향해 뛰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함께 포탄을 뚫고 뛰던 학도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버지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망설임 없이 첫 목회지를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는 곳으로 결정한 것 같다. 덕분에 나는 한센병 환자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곳은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매캐한 약 냄새가 아직도 선하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대개 한센병 환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긴 해도 사람이 그렇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 자신도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같이 손을 잡고 놀 수 없으니까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이 전부였지만 보통 아이들 대하듯 거리낌 없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당시 한센병 환자촌에 들어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란 듯이 그곳에서 7년간 건강하게 살았고, 아버지는 작정한 기간이 끝나자 부산의 한 교회의 청빙을 받아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첫 7년이 끝날 무렵 나는 코흘리개 여섯 살 꼬마였다. 이삿짐까지 다 싼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도 우리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커서야 어머니에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7년을 더 있자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목회자인 남편의 뜻에 따라’ 할 수 없이 한센병 환자촌에 들어왔으나 거기서 사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싫어서 작정한 7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이삿짐까지 꾸리고 나가려는데 꿈에서 찬란한 십자가를 보셨단다.

4.

한센인 마을 산다고 학교친구들에게 왕따 당해

돌 던지거나 막대기로 때리기 일쑤주변 동네 지나다닐 때마다공포

어린 시절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도 그냥 웃어넘기던 아버지 하병국 목사, 필자와 형 영록, 여동생 은신(왼쪽부터). 여동생은 겁이 많아서 곧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어머니는 왜 그토록 싫어하시던 한센병 환자촌 7년 생활을 접고 떠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 것일까. 그것은 지난밤 꿈에서 본 찬란한 십자가 때문이라고 했다. “니 아버지 뜻에 따라 여기에 들어왔지만 내는 그들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었다 아이가. 그래서 내가 7년을 더 있기로 결정한 기다.”

어렸을 때는 그곳에서 사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만 문제가 생겼다. 형과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우리 형제가 한센병 환자촌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이 그냥 놔두지 않았다.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우리를 피하거나 ‘문둥이’라고 놀리고 왕따를 시켰다. 당시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영록이 형과 나는 학교를 같이 다녔다. 집에서부터 30분을 걷다가 버스를 탄 뒤 다시 20분을 더 가야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버스정거장까지 가는 길에 조그마한 동네를 지나가야 했는데 그 동네 아이들이 우리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아이들은 그냥 말로만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돌을 던지거나 작대기로 때리면서 자기 동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 아이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 피가 난 적도 있었다. 우리 형제는 떼를 지어 쫓아다니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면 20분을 더 허비해야 했다. 형과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음박질해도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오며 돌을 던졌다. 거의 매일이 전쟁 같았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그때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예쁜 차장 누나가 나한테 어느 동네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았다. “저 동네(한센병 환자촌)에 삽니더.” 그러자 그 누나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형과 내가 낸 돈을 받지도 않고 그냥 내리라고 했다.

“형아, 와 내리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착한 누나가 왜 내리라고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형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을 지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멸시를 받으며 자라는구나”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우리가 왜 그런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어려서 오히려 그런 것들을 힘들어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가슴 찡한 기억이 많다. 한센병 환자촌에서 13년을 살면서 우리 가족끼리 시내에 나가 외식을 한 적이 한두 번밖에 없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신 적이 있었다. 그런 걸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던 나는 아껴 먹는답시고 핥아먹다가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그만 녹아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우야노 아까버라.”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아이스크림은 땅바닥에 녹아버린 상태였다.

가게 주인은 야박하게도 내가 떨어뜨린 것이니 다시 줄 수 없다며 모른 척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이 두고두고 아까워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앞에 아이스크림이 선해 잠이 오지 않았다.

외로운 한센병 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부어져 우리는 그곳에서 6년을 더 살다가 그곳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들의 권유와 배려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가게 됐다.

5.

여전한 가난과 인종차별에 힘들었던 미국 생활

초등학교 졸업 앞두고 필라델피아로 아버지 택시 운전·청소로 가계 꾸려

초등학교 졸업식을 두어 달 앞둔 1969년 12월, 우리 가족은 무사히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당시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우리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계셨다. 미국은 매우 크고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막상 와 보니 내가 살던 부산보다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집들이 단층집인 데다 번화한 거리도 없이 시골처럼 조용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가난한 신학생이다 보니 사는 형편도 한국에서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책상도 없었다. 전축도 라디오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무척 실망했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산에 살 때는 아버지는 목회자였고 돼지와 닭을 키우던 한센병 환자들 덕분에 고기와 달걀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오니 아버지는 그저 가난한 신학생에 불과한 데다 네 명의 아이가 딸린 가장으로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해야 했다. 낮에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수 보조를 하고 밤이면 야간 청소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때는 밤새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가정부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봉제공장에서 바느질을 했다.

내가 아버지를 잘 이해하게 된 것은 함께 일을 나가면서부터다.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큰 빌딩을 청소하러 다녔다. 아버지 혼자 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하기 때문에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화장실 청소만큼은 나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에도 두세 군데씩 다니며 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 그 많은 고생을 묵묵히 감당했다.

아버지가 심야 택시를 할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택시 기사라는 사람이 길도 모르는 데다 승객이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저 뒤에 앉은 손님이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데 보다 못한 승객들이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면 꾹 참고 다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곧 길을 익혀서 나중엔 팁 받는 재미에 날 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동양인이 별로 없어서 한국에서 온 신학생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팁을 더 챙겨주곤 했다. 가난한 우리 형편으로선 그 팁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도 식당에 가든, 호텔에 가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팁을 많이 주라고 당부하셨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형과 나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우리가 미국에 가기 1년 전인 68년에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흑백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당시 인구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동양인에 대한 핍박도 심했다. 당연히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놀림을 받는 데다 수업 시간에는 영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맘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특히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하’라고 부르지 않고 ‘하하하’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문둥이’라고 놀림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한 것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한센병 환자촌에서 보낸 시간이 미국 생활의 어려움을 잘 넘기는 약이 되었던 것이다.

6.

나중 가장 크게 성공할 학생은 하형록한마디에

美 학교생활 중 영어 등 큰 좌절감선생님 격려가 한 줄기 햇살로 비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터였다.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탔던 고교생 하형록의 향수를 달래주는 것은 노래하며 기타를 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망(Hope from the Darkness)은 솟아나고, 격려는 또 다른 우리를 만든다.”

나에게도 한때 자신감 없이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열두 살이 되던 해 미국에 건너와, 영어 단어 하나도 모른 채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책을 읽은 후 여러 친구들 앞에 나가 자신의 소감을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영어도 못하는데다가, 마침 사춘기까지 맞아 부쩍 부끄러움이 많아졌다. 내가 이상한 발음으로 발표할 때마다 여학생들이 낄낄거렸다. 그때마다 나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시 사춘기 소년이었던 내게 그 상황이 죽기보다 싫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자신감 없이 여학생들과 데이트 한번 못하고 지냈다. 부끄러움도 많이 탔고 말수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내게 한 줄기 햇살처럼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졸업반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다. 학기의 마지막 날이라 선생님은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하기보다는 학생들과 그저 가벼운 인생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다. 그때, 평소에도 잘난 척을 곧잘 하고 공부도 꽤나 잘하던 한 남학생이 엉뚱하게도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우리들 중에서 나중에 가장 크게 성공할 학생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긍심이 무척 강하던 그 친구는 그 질문을 하며 선생님이 당연히 자기를 지명할 줄 알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여러 학생과 눈 맞춤을 한 후 손을 들어 갈색 눈동자인 나를 지목했다.

“바로 형록 하….”

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바닥이던 나의 자신감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선생님의 단 한번의 지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얻은 삶의 열매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아낌없는 격려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부터, 나는 격려의 힘을 믿고 언제나 나보다 어린 이들을 사랑으로 격려해 주고자 노력한다. 모두 잘 되리라고, 성공할 것이라고,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하고 다닌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라며 격려의 힘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잠언 15장 역시 “따뜻한 격려의 말은 우리 인생의 참된 나무이다”라고 우리에게 격려의 한마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 생의 험한 십자가는 이처럼 격려와 함께 할 때, 우리 인생의 나무, 그리고 인생의 살아있는 참된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참되고 따뜻한 격려의 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하며 “다 이루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라”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라고 우리를 격려하셨다. 우리 삶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격려가 역경 속에 놓인 이들의 삶에 값진 열매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아버지는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사실 아버지는 탁월한 설교자였다. 한센병 환자촌에서 살 때도 아버지는 여러 교회에 부흥강사로 초빙되어 설교를 많이 했는데 가끔 나도 따라가서 듣노라면 감동을 받곤 했다.

7.

대학 때 주 30시간씩 일해 학비 벌고 건축도 배워

건축으로 일찍 진로 결정해 경험 쌓아졸업 후 주차건물 전문회사에 입사

아버지는 탁월한 설교자였지만 이곳은 미국이었고 당시는 한인이 많지 않던 때라 교회 개척 후에도 우리 집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형과 나는 공부하면서 일을 해야 했다.

미국은 여름방학이 길어서 거의 석 달가량 됐다. 학생들은 일을 해서 1년 공부할 돈을 모으곤 했다. 나도 열세 살 무렵부터 여름방학에 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버지와 야간 청소를 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온 종일 페인트칠을 했는데 실내 페인트는 그나마 쉬웠다. 하지만 돈 벌이가 안 됐다. 반면에 건물 밖 페인트칠은 힘은 들었지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외부 페인트칠을 하려면 사다리를 놓고 건물 꼭대기 층에서부터 기존의 페인트를 깨끗이 벗겨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얼굴이 페인트껍질로 뒤범벅되도록 반나절 이상을 벗겨내야 했다.

그러다가 독립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열여섯 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지 않고 노인케어센터에서 청소하고 빨래를 수거하는 일을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어느 미국인 교회의 부목사로 가신 뒤에는 그 교회 청소일도 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학교 건축부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당시 직장인들이 보통 주당 40시간 일을 했는데 나는 주중에만 하루 4시간씩 20시간 일했다. 주말에 일 한 것까지 합하면 30시간이 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한 일이지만 대학에서 일할 때는 건축과 관련해 상당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어릴 때 나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그 꿈은 두 살 때부터 품은 것이다. 비행기 장난감을 보면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장난감 비행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대신에 직접 나무로 비행기를 만들어 고무줄로 당기면서 놀았다. 이 꿈은 고등학교 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비행기 조종사는 한번 집을 떠나면 최소 1∼2주는 집에 돌아오기 어렵다’면서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떤 경우라도 가족을 떠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언어 장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영어를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미국에서 말로는 도저히 먹고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웃에 사는 한인이 “동양인은 기술을 배우는 게 좋다”는 말을 듣고 건축 관련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미국의 시장 경제 사정이 너무 안 좋아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가정부에 삯바느질까지 하며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누구보다 빨리 취직해야 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나는 3년제 고등학교도 2년 만에 마치고 4년제 대학도 3년 반 만에 끝냈다. 구조공학 분야 자격증도 남들보다 4∼5년 빨리 취득했다. 이후 건축 디자이너 자격증도 땄다.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은 무조건 붙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즈음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원자력발전소였다. 거기에 취직해 몇 년간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발전소가 어려워져서 그만두고 칼 워커 회장이 창업한 주차건물 전문 건축회사인 워커 파킹 컨설턴트에 입사하게 됐다.

8.

입사 후 해마다 승진 29세에 부사장탄탄대로

200명 회사서 11번째 고위직 오르며 세상의 명예와 부를 좇는 삶에 빠져

주차건물 전문 건축회사인 워커 파킹 컨설턴트에 취직한 후 그야말로 수직 상승하듯 매년 승진을 거듭했다. 마침내 29세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사람들은 이민자가 미국의 유명 회사에서 파격적인 승진과 성공을 하게 된 비결을 묻곤 하는데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여간 당황스럽지 않다. 단지 매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 특별한 비결이 없기 때문이다.

상사가 10개 하라면 11개를 했다. 지시한 것보다 항상 더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도 승진을 해서 성공하겠다는 무슨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하면 상사나 동료들이 기뻐하는 게 좋아서 그랬다.

예를 들어 상사가 물을 떠오라고 하면 보통은 그냥 컵에 물을 부어서 갖다 주지만 나는 냅킨까지 챙겼다. 그러면 어떤 상사라도 특별한 대접이라도 받은 양 기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잠언 31장 24절에서 옷을 지어 띠를 만들어 보내는 그 일을 성경을 읽기도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즐거웠다.

일을 할 때나 리포트를 작성할 때도 나는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반드시 일을 끝마쳐 상사의 책상 위에 갖다 놓곤 했다. 상사가 내가 하는 일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물었다.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많고 사회 경험도 그만큼 더 많은데 왜 사람들이 나 말고 자네를 찾는 거지? 그 비결 좀 말해 보게.” 나는 잘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사장은 그냥 물러서지 않고 내가 다른 직원들과 다른 점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째, 내가 질문을 많이 한다는 점, 둘째 일을 시키면 그 일을 정확하게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참 멋있게 해낸다는 점, 셋째 묻기 전에 미리미리 진행 상황을 보고해서 안심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 등을 꼽았다.

그날 이후로 사장은 나를 매년 진급시켜 1986년 서른도 안 된 나를 회사 중역에 오르게 했다. 회사라고 인종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으면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색인이 미국 사람과 똑같이 일을 하면 미국인들은 당연히 미국인을 고용한다. 하지만 미국인이 10개를 할 때 11개를 하면 미국인이 아니라 유색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워커 파킹 컨설턴트는 직원이 200명이나 되는 상당히 큰 회사였다. 내가 29세에 그 회사 중역이 되었을 때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은 10명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40대는 단 한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50, 60대였다. 나 혼자만 20대였다.

대략 10년 후에는 회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계산도 섰다. 목표와 돈이 보이자 나는 그것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젊다보니 아무래도 돈보다는 명예와 직위에 더 욕심이 생겼다.

회사 대표가 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 이만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다른 젊은이들처럼 세상의 명예와 부를 향해 나의 몸을 불살랐다.

그야말로 나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런데 1991년 가을, 뉴욕을 향해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 위에서 하나님은 질주하는 나를 잡아 세우셨다.

9.

앞만 보고 질주하던 삶에 제동을 건심실빈맥

심박조율기 등 기계 몸속에 넣었지만 병원침대서 심장이식 기다리는 처지로

“심실빈맥 증상이 앞으로 얼마나 빨리 심각해질지 모르므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능한 빨리 심장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심장전문의 아이젠 박사는 정확하고 냉정하게 내가 처한 현실을 설명해 주었다. 이후로 나는 내 몸 안에서 내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전쟁을 시작했다. 아이젠 박사는 먼저 심장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수술을 했다. 임시방편으로 심박조율기(pacemaker)를 몸 안에 넣는 수술을 해 주면서 제세동기(defibrillator)란 보조기구를 또 하나 넣어 주었다. 심박조율기는 심장박동이 멈출 때 인위적으로 심장에 자극을 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장치이다. 제세동기는 빨리 뛰는 심장의 박동 속도를 늦춰 주는 장치다.

출근과 입원을 번갈아 가며 제세동기를 몸에 넣는 수술을 받고 퇴원하기까지 6개월가량이 흘렀다. 당분간은 기계에 의지해 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퇴원 수속을 하고 나오는데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심장이 빨리 뛰자 제세동기가 강한 전기충격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장박동 속도는 도무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숨을 조여 오는 빠른 심장박동과 마치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강하게 충격을 가하는 제세동기의 압력을 동시에 받으면서 ‘이제 정말 죽는구나’ 하는 강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었고, 그 길로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 기계를 점검했다.

아이젠 박사는 기계가 내 몸에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 기계를 바꾸는 재수술을 했다. 그렇게 입원을 한 채로 다시 두 달을 더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 후 퇴원을 했지만 심실빈맥 증상은 계속됐다. 아니 점점 그 빈도가 잦아져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한 박동을 멈추지 않는 심장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곤 했다. 아이젠 박사가 전기절제술을 이용해서 위험을 제거했지만 하나를 없애면 또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겨났고 거의 24시간 진정제를 맞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의 심장은 통제불능 상태까지 갔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식수술만은 피하고 싶어서 나는 그때부터 약물에 의지해 1년여를 버텼다. 그러나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아이젠 박사로부터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입원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이식수술 외에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30대의 전도유망한 나이에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남의 심장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 암울하고 암담했다. 나의 상징이던 빛나는 당당함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불굴의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적당한 속도로 뛰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우리 아이들은 겨우 두 살과 세 살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이 생길 줄 모르고 큰 집을 산 지 얼마 안 된 때라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불경기라 임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나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으니 앉아도 힘들고 누워도 힘들고 고문 중에 그런 고문이 없었다. 한 번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 고통도 고통이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두려움이 덮쳐왔다.

10.

심장이식 기다리다 생명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아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 오가며 의식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엔 성경 읽어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딱 맞았다. 먹던 약이 듣지 않자 병원에서는 계속 약을 바꿔가며 위급한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모르핀(morphine)을 놔 주기도 했다. 의식이 살아 있어야 심장이 뛰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특히 주치의 아이젠 박사는 나를 살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내 상태가 좋지 않으면 퇴근하지 않고 밤새 나를 지켜보곤 했다. 중환자실에서 내 심장의 심한 박동을 멈추게 하는 모든 약물을 다 맞았지만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었다. 병원 의사들의 아침 인사가 “팀이 아직 살아 있어?”였을 만큼 심각했다.

당시 내가 살 확률은 높지 않았다. 심장병 환자의 절반쯤은 병원에서 심장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둔다. 남은 절반은 심장 이식수술을 받은 후 1년 내에 감염 후유증으로 죽는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식수술을 받은 사람도 평균 수명이 10년 남짓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며 30대 초반인 내가 성공적으로 이식수술을 받는다 해도 10년 정도 더 살 확률은 25%에 불과했다.

한번 입원하면 적어도 6개월은 병원 생활을 하게 된다. 내 생체 조건이 맞는 심장이 그리 빨리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심장을 기다리면서 위급해지면 내 순서가 아니라도 먼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다림과의 싸움이다. 기다린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 심장이 나와도 이식수술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심장병동은 살아남기 위해 피 마르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며 처절하게 기다려야 하는 자기와의 싸움터이자 남보다 하루라도 먼저 더 좋은 심장을 받기 위해 소리 없이 싸우는 남과의 치열한 전쟁터라고 말한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 나갈 가망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심장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런 광경을 지며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만일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이 병원을 나간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힘들었지만 갓 결혼해 새댁인 아내의 충격이 더 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 보니 아내를 못 알아보는 적도 있었다. 아내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 주었다. 아내는 어린 아이들을 건사하기도 힘든데 병석에 누운 남편까지 돌봐야 했다. 그러기를 2년여가 흘렀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살고 싶었다. 꼭 살아서 이 심장병동을 나가고 싶었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이식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다.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병원은 내게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의식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성경을 읽었다. 그때는 하나님과 나, 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기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온 나를 계속 깨워가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은 선물로 주셨지만 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수평적으로 사람들에게 나눠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

11.

살려주시면 자선단체 돕겠다아내와 기도

첫 수술 마치고 아내 반대에도 창업회사는 하나님이 이끄실 것믿어

“여보, 신문에 이런 광고가 났네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미국의 자선단체인 ‘스프앤키친’(Soup and Kitchen)이 기금이 없어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뉴스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소식은 내 마음을 내내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장이식수술을 기다리면서 아내와 나는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면 이런 단체를 돕겠다”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그것도 내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말이다.

1993년 1월에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몇 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 직후라서 또 몇 개월을 집에서 쉬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팔리지도 않았다. 약값이 없어서 동료 환자에게 남은 약을 구하러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전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사업을 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내는 1년을 말렸다. 대수술을 받은 탓에 얼굴은 부었고 먹는 약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하루에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그렇데 약을 먹으면서 무슨 사업을 하느냐는 거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에선 나를 배려해 설계 프로젝트만 따오라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사람을 고용한 상태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회사로 돌아가선 안 되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무렵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직장 다니며 번 돈으로 집을 몇 채 사 두긴 했지만 엄청난 금액의 병원비를 대느라 다 팔아치우고 남은 것이라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 한 채가 전부였다. 더구나 장인어른이 하던 사업마저 부도가 나서 우리는 그야말로 어느 쪽에도 손을 벌릴 형편이 못됐다.

1994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상태였다. 의료보험비를 낼 돈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95년, 하나님의 은혜로 템플대학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기적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창업을 한 지 불과 1년 만에 우리는 창고를 벗어나 사무실다운 사무실을 갖게 되었고 첫 파트너로 온 논리 알라콘 부사장을 비롯해 15명의 식구가 생겼다. 하나님은 사업을 통해 재정적인 회복을 주셨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회복과 가족관계의 회복도 허락해 주셨다.

그러다 98년에 다시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이듬해인 99년에 2차 수술을 큰 은혜 가운데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알코올중독 병력이 있는 40대의 심장을 이식받았는데 두 번째는 건강한 십대 남자 아이의 심장을 받은 것이었다. 2차 수술을 받기 위해 6개월가량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정말 재미있었다. 약병 줄을 주렁주렁 단 채로 환자들과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서 말씀을 보는가 하면 비즈니스미팅도 했다.

내가 입원하고 있으니 회사로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맡긴 회사이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에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이 당신의 기업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 믿었다.

12.

인간의 벽돌로 쌓은 삶, 부질없음 깨달아

건강 잃고 평생 일궈놓은 것 무너져하나님의 반석은 결코 무너지지 않아

“벽돌이 될 것인가. 돌이 될 것인가?(Which Lasts Longer: Brick or Stone?).”

몇 년 전 가족들과 로마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이제 웬만한 건물들은 거의 무너져 내린 그 유적을 방문했을 때 나는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저 돌덩이와 부서진 건물의 흔적들 사이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돌로 세워진 것들이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일화를 떠올렸다. 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나? 흔히 우리는 이를 인간들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건축가로서 나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참된 삶의 탑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과 로마의 유적을 통해 우리에게 ‘벽돌’이 될 것이냐, 아니면 ‘돌’이 될 것이냐를 물으시는 것이다.

섬세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1장 4절에 바벨탑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셨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왜 성경에는 사람들이 돌 대신에 벽돌을 썼고, 흙 대신 역청을 썼다는 말씀이 쓰여 있을까.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벽돌과 돌의 차이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벽돌은 바로 인간의 힘으로 빚은 것이고, 돌은 하나님께서 직접 빚으신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벽돌은 아무리 잘 구워졌다 하더라도 실제로 200∼300년을 가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빚으신 돌은 영원히 남는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열매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돌로 빚고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오늘날 분주한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들의 삶을 그저 인간이 빚은 벽돌로 빨리 빨리 쌓아 올리려 한다. 그리고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인간들의 방식에서 쉽게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나도 심장이식 수술을 받기 전까지 실제로 벽돌로 탑을 쌓는 삶에 매진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나는 나의 이름을 세상에 내세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미 회사의 대표 중역이 되었고, 큰 집과 값비싼 자동차도 굴리게 되었다. 부동산으로 여분의 집도 여러 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기다리는 불과 6개월 동안 나는 일평생 일구어 놓았던 그 많은 것을 모두 잃어 버렸다. 내가 인간의 의지로 쌓아 온 세속의 탑들은 일순간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역경을 통해 배운 것은 그동안 내가 하나님의 ‘돌’이 아닌 인간의 ‘벽돌’로 인생을 쌓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영원히 남는 ‘돌’로 인생의 탑을 쌓아가기로 말이다.

성경에 돌은 하나님의 반석이라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반석으로 우리의 인생을 쌓는 것은 하나님 말씀 위에 우뚝 서는 것이며, 하나님의 반석으로 쌓은 참된 인생은 어떠한 역경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13.

궁핍한 자 위해 손을 내밀며경영철학 삼아

잠언에 감동… ‘성경적 비즈니스목표 세워, 직원 뽑을 때도 말씀 놓고 23시간 면접

창업을 하기 전 나에게 큰 영감으로 다가온 말씀이 있었다. 바로 잠언 31장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본문에 나오는 여인을 그냥 여인으로 해석하는데, 영어로 이 말씀을 보면 단순히 여인을 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면 특히 미혼 여성들에게 ‘이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특히 이 말씀은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한국의 남녀관계로 볼 때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일찍부터 남녀평등의 전통을 가진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제한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원래 성경에서 현숙한 여인이란 단순히 여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이자 성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각에서 보면 현숙한 여인은 곧 지혜로운 성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맞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이 어떻게 남편을 섬기며 가정을 일궈 가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현숙한 여인이 성도라면, 성도가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인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주님의 나라를 위한, 즉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인 구원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믿는 자들이 하는 비즈니스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1장 20절은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했다.

이 말씀은 내가 죽음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심장수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이 말씀에 의거해 새로 시작할 회사의 정신을 만들었다.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 우리 회사는 입사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경영철학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그리고 잠언 31장에 나오는 말씀을 읽어주고 그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보통 31장 10절부터 시작하는데 30분 이상이 걸리는 설교나 다름없다. 우리는 20년 동안 100여 명의 직원을 뽑기 위해 1000명 이상을 상대로 이런 인터뷰를 해왔다. 보통 한 사람을 인터뷰하는 데 2∼3시간이 걸리다 보니 인사 담당 직원들이 여간 고생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직원을 뽑고 나면 훨씬 더 긴 시간에 걸쳐 오리엔테이션을 갖는다. 잠언 31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직원을 뽑고 함께 일을 하다 보면 확실히 사람들이 달라진다. 그들도 인터뷰에서부터 이 회사가 보통 회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이전 회사에서는 시도해 본 적 없던 일을 하나씩 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시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이웃에게 나눠야 한다. 이제 잠언 31장의 말씀이 어떻게 비즈니스와 연관이 되는지, 그리고 나와 우리 회사가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 왔는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잠언 31장의 말씀 중에 직접적으로 비즈니스와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구절은 10절부터다.

영어 성경은 ‘현숙한 여인’을 고귀한 성품을 가진 아내로 해석하는데 그는 바로 우리다. 그래서 성경도 단순히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아내이긴 하나 고귀한 성품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우리는 우리 회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보통 회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돈보다 더 귀한 성품을 중요시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14.

美 뉴저지 주차 관련 자문역에게 신뢰 얻어

신뢰 쌓은 고객, 대가 없이 일감 소개가족 관계·직장생활도 신뢰가 중요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여동생 친구와 30년 전 백년가약을 맺은 하형록 회장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아내라고 말한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잠 31:11)

여기에 등장하는 남편을 클라이언트, 즉 고객으로 바꾸면 ‘Our client fill confidence in us’가 된다. 즉 고객에게 항상 신뢰받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리 고객 중에 레니 비어라는 사람이 있다. 뉴저지에 사는 그는 작은 도시의 주차 관련 자문을 하기 때문에 전국에 아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는 주차장, 항공, 부두의 모든 시설을 관리하는 정부 위임기관이 있다. 이 기관에서 문제가 있을 때 레니 비어를 부른다.

그런데 레니 비어는 이상하게도 우리 회사를 좋아한다. 좋은 건수만 있으면 우리에게 알려 주고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는다. 미국에는 합법적 커미션이란 개념이 없다. 모든 대가성 수수료는 뇌물로 취급한다. 그런 사회에서 레니처럼 우리를 믿어 주는 고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Lacks nothing of value’란 가치 있는 것에 모자람이 없다는 의미다. 즉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기업에 적용하면 고객이 우리에게 맡긴 일을 100% 만족스럽게 해내야 하고, 고객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우리 회사가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직원인 내가 고객뿐 아니라 회사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신뢰를 받고 고객과 경영진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경영진은 혹은 자기 상사와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 신뢰를 잃는 사람이 종종 있다. 가벼운 거짓말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소한 거짓말에서 인간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루 결근했다고 하자. 사실 그는 어제 기분 나쁜 일이 생겨서 도저히 회사에 갈 마음이 아니었거나 가족이나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해서 결근을 한 것이다. 다음 날 출근할 때 그는 절대 밝은 얼굴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얼굴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에서, 얼굴에서, 태도에서 거짓말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아내나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배우자가 금방 알아채는 것과 같다. 배우자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예전에는 대화를 나눌 때 80% 이상 눈을 쳐다보고 말했는데 10%밖에 눈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작은 변화가 배우자에게 감지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 원리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작은 변화에도 ‘저 친구가 뭔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상사에게 볼만이 많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런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만든 원인의 60∼70%는 그 본인에게 있는 것을 본다. 상사나 경영자는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직원들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이미 상사나 경영자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고객도 마찬가지다. 자기 거래처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담당 직원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고객에게 신뢰받으려면 사소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5.

동트기 전에 일어나’… 근면함 강조했던 부친

이민 와 청소부로 밤새 일하고 새벽 퇴근어린 나에게 자주성경적 태도들려줘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She gets up while it is still dark;she provides food for her family and portions for her servant girls.”(잠 31:15)

13,14절의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와 일맥상통하면서도 그 결과에 해당하는 말씀이 15절이다.

‘아직 통이 트지 않았을 때 일찍 일어난다’는 미국 비즈니스 문화와 잘 어울리는 말씀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는 처음 미국에 와서 청소부 일을 했을 때 밤새 청소하고 소파에서 쪽잠을 잔 뒤 새벽에 퇴근을 하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매우 성경적이라면서 자주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도 미국 회사의 사장들은 가장 먼저 출근해서 회사의 문을 열고 커피를 탄다. 하지만 한국은 이와 정반대로 직원이 먼저 회사에 와서 문을 열고 커피를 타고 일할 준비를 해 놓으면 그제야 사장이 출근하는 경우가 아직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흔히 내가 만든 회사가 벌어들인 돈은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그 돈을 종들에게도, 즉 직원들에게도 주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수익이 생기면 그 수익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지급한다. 물론 한국의 기업들도 보너스를 지급하지만 미국에는 그런 문화가 없다. 왜냐면 한국처럼 밤 10∼11시까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제로 일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기본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예상 외 수익이 생기면 그것을 직원들과 나누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인정을 베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기업가라면 15절에 나온 것처럼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날 뿐 아니라 14절에서처럼 ‘멀리서 양식을 구하여 가져오는 상인의 배’와 같아야 한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가져온 일거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일한 대가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인정을 베풀 때 직원들의 사기도 오르고 일의 능률도 높아진다.

현숙한 여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한 일을 가져온다. 선을 베푼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고객에게 항상 최선의 대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온유하라고 하면 온유하고 참으라고 하면 참고, 고객을 예수님처럼 대하고 섬긴다. 그리고 평생 그 마음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일단 고객이 된 상대에게는 그 사람이 돈을 많이 주든 아니든,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에 그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에게 평생 영원히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보통 고객이 돈을 많이 지불하지 않으면 “대충 해 줘서 끝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식의 일처리는 엄격히 금하고 있다. 계약이 1억짜리든, 10억짜리든 똑같은 태도로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사실 10억짜리 고객에게 하는 서비스를 1억짜리 고객에게도 똑같이 제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잘 하는 기업은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16.

고통·인내로 연단한 좋은 품성이 삶을 지탱

모든 건축재료를 연결하는 나사못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힘 지녀

두 번의 심장이식 수술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하형록 회장이 작은 나사못 한 개의 소중함을 설명하고 있다.

나사못 하나가 건물을 지탱하듯 좋은 품성이 아름다운 삶을 만든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무엇이 그 아름다운 건물을 하나로 이어주는가? 그것은 바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나사못이다. 나사못이 없으면 우리는 그 어떤 멋진 건물도 지어올릴 수 없으며 각각의 건축 재료들을 연결할 수 없다.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운 맨션을 짓고자 하는 한 커플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멋진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자신들이 지어올린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그러나 그들이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나사못에 대한 감사는 없었다. 지붕 위에 있던 작은 나사못은 그들이 자신들의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늘어놓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몹시 화가 났다.

나사못은 무척 슬프고 원망의 마음마저 들었다. “만약 내가 내 할 일을 그만두어 버리거나 불쑥 뛰쳐나갔더라면 그 누구도 나를 망각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그동안 지붕 위에서 자신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렸고, 이내 진흙더미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날 밤 비바람이 몰아쳤다. 땅에 굴러떨어진 나사못은 조약돌에 부딪쳐 날아가고, 지붕에는 물이 새기 시작했다. 벽을 따라 물이 흘러넘치고, 아름다운 벽화들은 망가졌다. 석고들이 떨어져내리고, 카펫은 얼룩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작은 나사못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그들 주변에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친구로 삼고 싶어 하고, 그들을 채용하고 싶어 하며, 그들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들의 품성이 바로 건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사못과 같은 존재임을 망각한다. 만약 그들에게 나사못과 같은 품성이 결여되면 그들의 아름다운 의상은 더 이상 화려하지 못하다. 그들의 헤어스타일은 매력적이지 않고, 고귀한 향은 더 이상 감동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값비싼 구두는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지 못한다. 마치 나사못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망가지듯 사람들이 순결한 품성을 갖추지 못하면 그들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한다.

나사못은 반드시 망치질을 견뎌야 한다. 강한 망치질의 단련만이 나사못의 날카로움과 관통의 능력을 발하게 하며, 나사못으로 하여금 많은 재료들을 하나로 강력히 거머쥐게 하며, 그 자체의 목적을 달성하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룰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아름다운 건물이란 모든 재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나사못을 향한 호된 망치질의 결과물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고통과 인내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품성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희망한다면 기꺼이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품성을 지녀야 한다.

17.

한번 뽑은 직원은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로 경영

직원 명목의 예비비 축적한 덕분에 2008년 금융위기 등 힘든 시기 넘겨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필자와 직원들이 힘을 모아 기도하자 마이애미 법원센터 주차장 등 대규모 건물 설계 의뢰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떤 신입사원이 우리 회사와 다른 회사 입사시험에 동시 합격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 회사보다 많은 보수를 주겠다는 다른 회사를 마다하고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돈도 중요하지만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이 회사에 다니고 싶다”고 대답했다.

지금 우리 회사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 번 뽑은 직원은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신뢰를 받게 된 데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러다 2008년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미국 경제를 한순간에 침몰시켰다.

웬만한 회사들이 직원의 70∼80%를 해고했다. 문 닫는 회사도 무척 많았다. 그에 따라 한때 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경제학자들은 통계적으로 2년이면 회복될 거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여파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수많은 회사가 직원의 절반 이상을 해고하면서 회사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업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3명의 직원을 해고했을 뿐 불경기가 계속됐지만 한 명도 정리해고하지 않았다.

크리스천 기업가이자 목회자인 내가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지는 못할망정 있는 직원을 거리로 내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수익을 포기해서라도 그들을 지켜 준다면 그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뜻이 좋아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나 다름없다. 이런 생각이 있다 해도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선 방법을 찾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직원들 명목의 예비비는 그래서 더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심각한 경기 침체를 버티고 나니 그 예비비마저 바닥나고 말았다. 더는 무리였다. 그래서 하루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몫의 예비비는 이미 다 썼고 세 사람의 중역을 위한 예비비도 여러분을 위해 다 썼습니다. 이젠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돈이 없습니다. 빠른 시기 안에 새 프로젝트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젠 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9년 4월쯤이었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한 나는 7월부터 직원을 해고해야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마이애미에서 큰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마이애미 말린스 야구 경기장으로부터 6000대 규모의 주차빌딩 설계 의뢰를 비롯해 4개의 대규모 설계 의뢰를 받은 것이다. 15명의 직원이 1년 반이나 일해야 할 정도로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 하나로 우리는 1년 반을 버틸 수 있었다.

만일 우리에게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예비비가 없었다면 직원 상당수가 회사를 나가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마이애미에서 엄청난 규모의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해도 그 일을 감당해낼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말씀을 통해 주신 지혜를 따라 위기상황을 대비한 예비비를 준비해 놓았기에, 우리는 그 힘든 시기를 다 함께 넘기고 기회가 왔을 때 남들과 차별화된 팀워크와 능력으로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

성공의 비결은 자신보다 이웃 먼저 사랑하는 것

두 번의 심장이식 겪으면서 깨달아이웃사랑 실천한 뒤 사업 더욱 번창

우리를 성공하게 하지 못하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늘 원하는 것이 있다. 삶이 언제나 순조롭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언제나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때로는 새로운 만남에서, 때로는 새로운 학문에서,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단체나 교회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널리 알려진 과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나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다면 나는 55분을 문제점을 생각하는데 쓰고, 단 5분만을 해결책을 찾는 데 쓰겠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답을 찾기 이전에 먼저 문제점을 알아야 한다. 즉 우리의 해결책은 바로 우리가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때 발견된다.

우리의 문제점들, 즉 아픔과 실망, 불안, 그리고 질투 등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마치 침을 잘 놓는 한의사가 진맥을 잘 하듯 성경에서는 창세기부터 우리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서 지적하는 것을 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이 문제들은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아픔, 어려움, 시기, 그리고 질투는 오직 인간이 자기 이름을 내세우려고 할 때 찾아온다. 바벨탑을 쌓던 시절 인간들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고 했던 이유가 창세기에 기록된 바 있다. “자, 우리가 이 높은 탑을 쌓아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자.”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내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생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교만함을 깨우치기 위해 그와 같은 인간들의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성공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점을 잘 알지 못한다. 나도 심장에 이상이 생겨 심장이식을 받기 전에는 나 자신의 문제점을 알지 못했다. 내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삶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고,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내 능력으로 답을 찾고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나의 자만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의 심장이식 수술이라는 고난을 통해 바벨탑처럼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세속적인 삶이 아닌, 이웃을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은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번창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문제를 알았으니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답은 바로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사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보자. 그러면 더욱 빨리 성공하고 우리의 삶은 더 순조롭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동안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성취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면 만약 같은 기간에 온 정성을 타인들에게,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으로 쏟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끝내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19.

5개월 기다린 이식 심장을 더 급한 환자에 양보

두 번째 이식 심장에 문제 생겼지만 그때 기증 덕분에 또 한번 수술 기회

23년 전의 일이다. 병원에서 첫 심장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5개월이나 기다렸다. 통계적으로 심장이식 수술을 기다리다 자기한테 맞는 심장이 나타나지 않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죽는 사람이 5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병원에서 5개월 정도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망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내게 맞는 심장이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나의 전담 의사가 기쁜 소식을 전하러 병실로 달려왔다. “축하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당신에게 아주 잘 맞고 건강한 심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저녁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아! 이젠 살았구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의사가 망설이는 눈치로 주저하더니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옆방에 어떤 젊은 여인이 3일 전 헬리콥터로 실려 왔는데, 우리가 검사해 보니 그 여인은 이틀 안에 심장이식 수술을 받지 못하면 죽어요.”

몇 초가 지났을까. 나도 모르게 “선생님” 하고 의사를 불렀다. 그토록 기다리던 심장을 기증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느꼈던 감사의 마음은, 순식간에 엄청난 정신적 고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나는 “그 젊은 환자에게 너의 심장을 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건강하게 살아서 퇴원했고 나는 7일 뒤 위독해졌고 의식을 잃었다. 의식 잃은 상태로 한 달을 견뎠을 때쯤 또 다른 심장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상태가 좋지 못한 심장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태가 너무 위독했기에 일단 사람이라도 살려 보자고 하였고, 나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수술을 받았다.

나는 그 상태가 좋지 못한 심장을 가지고 6년을 살고 그 후 두 번째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이제 죽는 것으로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불과 6개월 전 마침 공휴일이라 딸들이 하이킹을 가자고 해서 공원에 갔다. 공원을 걷는 동안,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심장에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날 의사에게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담당의사가 말하기를 두 개의 혈관이 완전히 막혔고 막힌 혈관을 뚫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단 입원부터 하자고 권했다. 그날 밤, “이제 때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제 죽는 거구나’ 싶었다.

다음 날 담당의사가 찾아와서 다시 한번 시도해보자고 했다. “만약 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될 경우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고 오직 심장이식 수술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이미 이식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그것은 나한테는 적용할 수 없는 수술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데 의사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기억하세요? 당신의 경우는 한 번 더 수술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때 당신에게 맞는 좋은 심장을 젊은 여성에게 기증했고, 그 후 너무 상태가 위독해 상태가 좋지 못한 심장을 이식받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이 두 번의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좋은 심장은 한 번밖에 이식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참된 희생은 또 다른 기적을 낳는다는 것을 말이다.

20.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현할 때 이뤄져

어릴 적부터정리하는 것을 좋아해결국 조직을 정리·경영하는 사업가로

지난해 8월 두 번째로 방문한 전북 무주 태권도원. 그곳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차창 밖으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푸른 산의 풍경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산 너머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산을 보며 그 너머에 뭔가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과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곳에서 제42회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한국대회가 열렸다. 행사는 크리스천 기업인들이 모여 우리의 사업과 삶을 기독교인답게 경영하고 인도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였다. 전국 각지에서 약 2800명이 참석한, 실로 감개무량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 참석자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의 기업인들이었는데, 이 중 나의 눈길을 끈 참석자가 한 명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어른 참석자들이 넓은 푸른 숲이라면 그는 그 숲에서 필까 말까 하는 꽃봉오리 같은 존재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 소녀가 부모를 따라 그 행사에 참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그 자리에 스스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소녀와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에 펴낸 ‘P31’(두란노)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꿈을 명사로 표현하지 말고 동사로 표현하라.” 즉 의사가 되고 싶으면 의사가 되겠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음악가가 되려면 음악가가 되겠다 하지 말고 음악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해야 한다.

명사는 정지형이지만 동사는 진행형이다. 명사는 자신의 자부심을 키우지만 동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때 우리의 꿈을 향해 실천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동사로 꿈꾸는 이는 스스로 자신의 꿈을 실천해가며 마침내 참된 성공을 이룬다. 사회적 부와 명예를 차지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의사로서 아픈 이들의 마음까지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 무대에서 음악의 위대함을 뽐내는 음악가가 아니라 관중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음악가가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무주에서 만났던 소녀는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이 모인 머나먼 장소까지 찾아와 꿈을 향한 만남의 중요성을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 나는 그 소녀를 보며 이 작은 꽃봉오리가 훗날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정원을 일구어낼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에게도 오늘의 나를 꿈꾸게 만든 ‘동사’가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언젠가 자라서 훌륭한 건축가, 성공하는 사업가, 존경받을 수 있는 목사가 되겠다고 꿈꾼 적이 없다. 나는 나의 꿈을 단 한 번도 ‘명사’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삶의 열정을 잘 나타내는 ‘동사’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정리하는 것(organize)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정리하기’를 좋아했다. 집안을 정리하는 것, 정원을 가꾸며 정리하는 것, 이사하는 곳에 이사를 돕기 위해 가면 짐을 나르기보다는 트럭에 있는 짐을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성공하는 사업가는 돈만 많이 버는 것이 아니고, 조직을 잘 정리하고 경영해야 한다. 존경받는 목사가 되는 것은 입으로 설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하형록사장(목사)간증-하나님나라의 건축가

(정리: 윤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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