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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40일 묵상및 기도문(2월 10일-3월 26일, 2016)

2 월 10 일 수요일 창세기 35 장 (Ash Wednesday)

<언덕 위의 소리: 벧엘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삶> 야곱에게 벧엘의 경험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가족들과 자신 스스로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갱신의 장소입니다. 야곱에게 벧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가족들과 함께 갱신의 장소로 만들었다면, 저에게는 새벽기도가  벧엘의 경험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한국을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미국에서 계속 사역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집에서 가까운 작은 성결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10 명도 나오지 않는 작은 교회였는데, 목사님께서 열정적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설명해 주시는데, 저에게는 말씀 하나하나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10 명도 안 되는 성도들과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이, 내 안에 있던 벧엘의 기억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입니다. 신학생 때 간절하게 기도하던 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한국의 교우분들도 떠올랐습니다. 미래를 놓고, 계산적으로 생각만 하던 저의 부끄러운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벧엘의 경험을 가지고, 어렵고 힘들 때 그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원홍연/어바인 드림교회, CA>

<묵상 기도> 모세가 거룩한 떨기나무 불길 앞에서 신발을 벗었듯이, 야곱의 식구들이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기 전 미디안에서 가지고 왔던 우상들을 쓸어 모아 세겜에 묻어 버렸듯이, 사순절을 시작하며 지난 세월 끌고 다니며, 곰쳐 가지고 다녔던 나의 우상들을 내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처음 뵈었던 벧엘로 다시 올라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지체하며 먼 길을 돌아온 죄송한 마음으로, 새롭게 보여 주실 하늘 사닥다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벧엘을 향해 가듯, 골고다를 향해 다시금 믿음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고난의 돌 베개를 거룩한 제단 삼아 주신 주님, 힘에 겨울 수 있는 이 사순절의 하루하루를 통해 돌 베개가 은혜의 제단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11 일 창세기 36 장

<언덕 위의 소리: 조연도 빛날 수 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있다가 잠시 산책하러 나갔는데 예배당 옆에 있는 저희 교회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인 회중(Central UMC)교회 싸인 밑에 자리 잡은 저희 교회 이름이 왜소해 보였습니다. 한인 회중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영어로만 적혀 있습니다. 교회 사인을 보면서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물어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형아~ 어떤 교회를 꿈꾸며 목회하고 있니? 설마 언젠가는 저 아래 쪽(Secondary Position)이 아니라 위쪽(Primary Position)에 큼지막하게 교회 이름을 써 붙이고야 말리라~ 하는 생각으로 나의 소중한 양들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진정한 교회라면 설사 땅속에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 복음의 생명력과 삶의 변화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역동성 때문에 감추어 질 수가 없는 법이란다. 어떤 교회도 홍보가 덜 되어 문을 닫는 교회는 없단다. 단지 생명력과 변화의 소문이 밖으로 흘러 나갈 만큼 진정한 나의 교회가 되지 못되고 있을 뿐이란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교회 싸인 앞에 서서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다시 채워졌을 때, 교회 간판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저희 교회 이름이 그렇게 아래쪽에 그리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생명력과 사랑의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작아도 감사하고 감추어 져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라는 빛을 발하고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알아서 필요한 곳에 우리를 비추시고 보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에서는 마치 약속의 자녀가 아닌 비주류 조연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에서의 족보 또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조연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은 없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빛의 자녀의 삶으로 나아갈 선택 앞에 매일 같이 서 있을 뿐입니다. <조선형/시카고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죄인 된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하시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 저희들에게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시어서 주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과의 만남이 동행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의 삶과 이 땅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헌신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그 가문을 이루게 하셨으니,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믿음의 자녀로서 주님을 닮아가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2 월 12 일 창세기 37 장

<언덕 위의 소리: 편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셉과 그 형제들 비극의 시작은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합니다. 코넬대학(Cornell University)의 칼 필레머(Karl Pillemer)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Mothers’ Differentiation and Depressive Symptoms Among Adult Children) 부모의 편애는 가족 갈등의 주된 원인 중의 하나이며, 자녀들의 심리 형성과 행동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고 자란 야곱이 그의 자녀 중 요셉만을 아끼는 모습과 그로 인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결국 노예로 팔게 되는 모습을 보면 칼 필레머 교수의 연구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명심보감 (Myeangsim Bogam: The Precious Mirror of Bright Mind) 은 편애를 가리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가시와 같이 날카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오랫동안 편애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 마음에 아픔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 아픔은 미움과 증오심으로 변해 결국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가시로 바뀌게 됩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특별한 감정이 아무런 여과 없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와 가시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3 일째입니다. 오늘 창세기 37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요셉이 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애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가슴 아픈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당시의 불의한 기득권자들에게 받으셨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시던 제자,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은 30 에 팔려가며 주님이 겪으신 그 고통과 고뇌를 묵상하여 봅니다. 이제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저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이 가져오는 처절한 고통을 더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따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나는 참 자유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의를 행하는 자와 함께 평화를 누리고 귀한 일을 성취한 자와 함께 그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늘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13 일 창세기 38 장

<언덕 위의 소리: 성도의 책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즘 유행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아이를, 그것도 쌍둥이를 출산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행동이 막장과는 거리가 먼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인들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은 한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사내아이를 출산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자 장남인 엘이 그의 악함으로 죽게 되자 다말이 시동생 오난과 결혼을 한 것도 남편 엘의 후손을 잇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25:5-10) 하지만 오난은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소홀히 한 결과 목숨을 잃게 되고 율법에 따라 다말은 유다의 셋째 아들인 셀라와 결혼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과 오난의 죽음은 결국 본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유다 또한 다말을 셋째 아들인 셀라와 결혼시켜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다말 때문이라 생각한 나머지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립니다. 다말이 창기로 변해 시아버지인 유다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은 결코 그녀가 음란해서가 아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아버지를 속인 다말의 행위를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형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다말에게 성경은 그녀의 행위가 옳았음을 인정합니다. 다말이 낳은 쌍둥이 중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 다윗왕이 있고, 그 족보를 통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속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입니까? 유다와 그의 아들들처럼 그 소중한 책임을 소홀히 여겨 응당 받을 복을 걷어차 버리는 신앙의 막장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연약한 입술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삶의 여러 갈래 길 속에서 항상 최선의 것만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주님의 길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걷는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 되게 하시고, 오늘 걷는 이 길이 좁고 험한 길일지라도 그 길이 은혜의 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 없이 헤매던 다말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셔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사오니, 우리에게도 주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지게 하시되 세상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좇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의 첫 주간을 지나며 겸허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기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오니 주님이시여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따르는 삶에 굳건한 믿음 허락하셔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늘 새로운 소망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2 월 15 일 창세기 40 장

<언덕 위의 소리: 운명과 섭리>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규태 씨가 한국인의 운명론에 대한 생각을 기술하며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서양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분수인데 모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있는 것을 서양에서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물을 아래서 위로 올리며 분수를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화는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에 힘을 쏟아 지금의 서양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반면에 동양 문화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서양문화가 분수로 대표할 수 있다면 동양문화의 대표는 폭포라고 하며 물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세상 이치가 음양오행이라는 이치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이치에 순응하고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이것을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기구한 삶에 대해 정말 팔자가 사납거나 꼬인 인생 즉 이것이 요셉의 불행한 운명으로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요셉의 인생에는 필연적인 불행한 운명이라는 표현보다는 요셉의 인생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대가로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 안에서 왕의 신하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불행한 운명 같아도 하나님 안에서는 만남도 문제도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주활/솔즈베리감리교회, MD>

<묵상 기도> 오 주님, 십자가가 당신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는,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긴 터널 같은 어두움이 계속되지만 그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요셉의 고난이 불행의 연속이요 억울함의 연속이요 실패의 연속처럼 보이나 그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늘 함께 계셨고 그의 매 순간에 당신이 늘 인도하셨음을 바라봅니다. 나의 인생에도 요셉처럼 주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계획을 바라보며 당신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아 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애굽으로의 길이, 감옥으로의 길이, 총리대신의 길이었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이, 죽음의 길이 부활의 길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길이, 고난과 역경의 길이 주님이 예비하시는 은총의 길, 축복의 길이 되게 하옵소서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2 월 16 일 창세기 41:1-36

<언덕 위의 소리: 꿈보다 해몽>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습니다. ‘길몽’인지 ‘흉몽’인지는 꿈 그 자체보다는, 꿈을 해석하는 ‘해몽’에 달린 뜻입니다. 해몽이 꿈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해몽이 바뀌면 꿈도 바뀝니다. 사실 해몽은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바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의 꿈은 그의 마음을 번민케 할 만큼 뒤숭숭한 흉몽의 징조였습니다. 이집트 왕궁의 술객도, 박사도 바로의 그 꿈을 해몽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흉년이라는 흉과 화의 해몽을 꺼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꿈꾸는 자’로 통했습니다. 훗날 그는 ‘꿈을 해몽하는 자’로도 불렸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해몽하는 ‘길흉화복’의 기준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믿음의 눈 ‘영안’이었습니다. 요셉은 영안으로 닥쳐올 ‘흉년’이라는 바로의 흉몽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역사의 ‘풍년’으로 대처하는 길몽으로 해몽하였습니다.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은 그렇게 흉몽에서 길몽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로는 그런 요셉을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은 ‘꿈은 사람이 꾸지만, 그 꿈의 실현은 하나님께 있다'(잠 16:9)고 했습니다. 고된 삶의 무게로, 미국 현실의 장벽으로 꿈조차 꾸기 어려운 이민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꿈을 꾸어야 합니다.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시시한 세상살이의 꿈보다는,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믿음이 심령을 번민케 하는 흉년의 흉몽도, 하나님 역사의 풍년의 길몽으로 대처하는 힘입니다. 허투루 하는 말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앞날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꿈을 꾸는 자’, 하나님의 ‘꿈을 해몽하는 자’,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요셉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남성원/슈가힐한인교회, GA>

<묵상 기도> 가물어 메말라 버린 땅이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듯 저희의 마음이 그리도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기에 기대하지도 못할 정도로 황폐해진 마음에 새로운 은혜의 때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시금 은혜의 빗속에서 춤을 추게 하시고, 다시금 은혜의 햇살 아래 땀 흘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근심의 꿈이 아니라 희망의 꿈을 꾸게 하시고, 곧 없어질 세상의 안락함이 아니라 7 년의 흉년 속에서도 버텨낼 믿음의 넉넉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17 일 창세기 41:37-57

<언덕 위의 소리: 공동의 이익을 위한 선물> 우여곡절 많았던 요셉의 삶이 이제 좀 풀리는 듯합니다. 14 마리의 소와 14 개의 이삭에 대한 꿈을 기막히게 풀어내자 바로는 요셉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37 절), 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알아보게 된 것이지요. (38 절). 요셉은 왕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치국의 전권을 부여 받습니다. 서른 살의 잘생긴 청년이, 왕의 병거에 버금가는 수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옥쇄 반지와 금 목걸이를 한 그의 마음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란,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마다 어려운 일을 안겨주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준 채색 옷을 입었을 때도 그랬고, 보디발 장군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도 간수와 시종장의 신뢰를 얻었지만, 생각보다 오래 그곳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뜻밖의 호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본문은, 그가 아들들의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지었다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요셉의 기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권력을 누리고 어깨를 높게 하는 대신,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합니다. 묵묵히 풍년으로 얻어진 먹거리를 저장하면서 어려운 날들을 대비합니다. 그의 비전과 성실함 덕에 이집트의 온 백성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뭄 속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요셉은 잘 나갈 때 더 철저히 마음을 지켰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능력과 권력을, 생명 살리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무릇 은사란 “공동의 이익을 위함” (고전 12:7)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명훈/ 메디슨한인연합감리교회, WI>

<묵상 기도> 하나님 나의 주님, 오늘도 은혜와 사랑에 감격합니다. 처음 믿었던 신앙의 감격을 기억하며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과 처음 믿음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도 처음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어, 행복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도 교회를 세울 때의 설레임과 가슴 벅찬 결심을 떠올리며, 그 열심과 사랑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각 성도들도 주 안에서 서로 세워주고 칭찬하고 섬김으로써, 서로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하게 대단한 존재는 아닌 것을 압니다. 구원을 받은 거기에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매일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주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게 하옵소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신 말씀처럼,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18 일 창세기 42:1-25

<언덕 위의 소리: 옥석> 가나안 땅에 아주 심한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그 기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열 아들을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보내게 됩니다. 곡식을 구하는 틈 속에 있던 형들을 요셉은 한눈에 알아보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려 절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20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애굽 사람들처럼 머리와 수염을 하고, 총리의 의복을 입고 있으니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형들이 과거 자신을 팔아 넘긴 그때처럼 아직도 완악한 모습 그대로인지 알아보기 위해 요셉은 아주 엄한 소리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3 일 동안 옥에 가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종종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확인하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시련과 고난이 닥쳤을 때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지, 절망의 상태가 되어도 하나님을 의심하고 비난하지 않는지를 확인하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혼란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주 큰 시련과 혼란으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멈추면 안 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멈추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과 원망의 죄에 빠져 멸망 당하는 자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저희들을 자녀 삼아 주시고, 주의 백성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 때로는 주의 자녀답지 못하게 살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잘못과 죄를 저지르고 살았던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하신 말씀처럼, 저희 안에 왜곡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사 주의 자녀로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고, 공급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매일 삶의 이유와 사명을 가지고 사는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혹시 우리 주위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그들도 주님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삶의주관자가 되시고, 이유가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19 일 창세기 42:26-38

<언덕 위의 소리: 진정한 용서와 화해> 오늘 읽게 되는 창 42 장에서 화해와 관련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웃 나라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첩자로 오인당하여 고초 당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형제 가운데 한 명을 인질로 잡혀주고 집으로 가던 중에 또다시 자루 속에 있는 돈을 보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먼저 그들 마음속에 드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형제를 이웃 나라에 판 그들이 이제 돈을 보고도 행복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민감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도 아닌데 요셉은 왜 이런 일을 꾸몄고, 또 굳이 동생을 데려오라고 다른 형제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들의 진심을 확인도 하고, 또 베냐민을 포함한 모든 형제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결국, 화해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프로세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강세/그린한인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9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창세기 42 장 26 절 이하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요셉이 노예로 살아가는 그 고난 중에도 그의 부모님과 심지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향하여 변함없는 지극한 사랑을 품고 있음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여 가시는 고난 중에 계시면서도 주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려는 원수들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사랑의 승리를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때때로 제 마음의 텅 빈 공허함은 사랑을 받지 못함이 아니라 바로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섬기는 사랑 대신 이웃을 이용하려는 탐욕으로 가득했던 저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탐욕의 간계가 아니라 사랑의 지혜가 진정한 승리의 능력이 됨을 깊이 심비에 새기게 하옵소서. 저에게도 부모형제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상대방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원수를 위해서 까지 기도하는 주님의 사랑을 품게 하사 참 사랑이 없어서 인생의 갈증과 허기로 고통당하는 이 세상에서 참 된 행복의 씨앗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20 일 창세기 43:1-14

<언덕 위의 소리:야곱의 하나님> 존 비비어는 “임재”라는 책에서, 광야의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 하나님의 응답이 침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대체 어디 계신가요?” 이렇게 부르짖고 싶은 마음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오히려 좌절감으로 바뀌어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비어는, 광야처럼 팍팍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광야의 침묵이 때로는 너무 길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꿈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기억하자며 독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흔적과 하나님의 선물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메마른 광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시간조차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자리로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또한 아무나 허투루 부르지도 않습니다.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부르신 것도 아니며, 광야를 걸으며 때마다 시마다 이슬과 만나를 먹여 주시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세밀하게 속삭이듯이 가르치고 격려하며, 좌절한 마음에 새 소망을 하나씩 말씀하시고, 넘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과 가족들도 요셉과의 재회와 함께 그려질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비전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 위안으로 삼으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김덕건/달라스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TX>

<묵상 기도> 아 목마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셨던 갈증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만나 주시지 않는 것 같은 적막감, 부지런히 예배 드리고 기도 하지만 비어 있는 것 같은 한쪽 구석의 공허함, 응답 하시리라 믿고 간구하지만 기다리게 하시는 초초함, 요셉의 형제들도 그러했겠죠? 주님 야곱의 늦어지는 대답 때문에 모든 가족이 죽게 되었던 상황, 답답함, 초조함, 긴장감, 절망감, 애끓는 심정이야… 우리의 삶에도 종종 일어나는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의 마음, 다가올 앞날을 바라보는 초조함과 긴장감,, 고난을 감당해야만 하는 안타까움과 두려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주님도 피하기 원하셨던 고난과 고통의 순간들 우리 인생에도 피하기 바라는 어두움의 순간들 하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심으로 구원의 십자가를 영생의 부활을 이루어 내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두운 두려움, 초초함, 조급함, 절망감 만을 보지 않게 하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 섬세한 축복의 은혜, 예비하신 주님의 기적 같은 새 길을 만나게 하옵시고 그 안에서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주님은 여호와 이레 주님은 여호와 닛시 승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2 월 22 일 창세기 44 장

<언덕 위의 소리: 유다의 변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먼저 말한 인물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랬던 유다가 지금은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가 특별히 아끼며 사랑하는 막냇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평생 노예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반전인지 모릅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요셉만을 편애한다고 질투하였으나,

이제는 베냐민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와 그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유다의 변화를 통해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다는 실제로 죽지도 않고 노예가 되지도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랑과 죽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진실한 회개와 용감한 사랑의 결단이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의 흐름이 요셉이 아니라 유다로 흘러가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순간 누군가를 대신해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면, 유다의 용기 있는 결단과 그를 통해 크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합니다. 그 선하심으로부터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깊이 맛볼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인생 살이에서 여러 가지 슬픔과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힘 입게 하옵소서.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렸던 야곱의 경우와 같이, 자녀를 잃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아니, 악한 죄인들을 위해 그 선하신 아들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못 박혀 죽은 십자가를 보시며 뼈아픈 고통의 눈물을 흘리셨을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능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옵시고, 그리하여 그 선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거하게 하옵소서. 선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2 월 23 일 창세기 45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이 곳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요셉의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모함에 빠지고, 감옥에 갇히고 또 죽음의 협박에서도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지요. 그 해답을 요셉이 형제들을 만났을 때 하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억울함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45:7-8 절에서 요셉은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요셉처럼 그 섭리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요.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어려움을 마주하는 신앙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우리를 이끌지 모르기에 더 열심히 고민하고, 마음을 성찰하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지금 서 있는 위치가 과연 제대로 된 위치인지 자꾸 물어보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경도 언급하진 않지만, 아마 요셉도 어려움을 겪는 그 모든 순간에서, 수많은 고민과 질문을 가지고 신앙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 신앙의 노력이 계속될 때, 우리도 요셉처럼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될뿐더러, 현재의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되고,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홍종욱/비전교회, MA>

<묵상 기도> 요셉을 미리 부르시고 보내셔서 큰 구원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들에게 보내 주시어서 이 땅에 구원을 허락하시고, 저희들에게 영생의 삶을 보장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들도 주님의 보내심을 깨달아 이 땅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요셉이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할 수 없다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선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 하루의 삶이 요셉의 삶과 같이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구원으로 이끄는 자녀로 예비된 삶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2 월 24 일 창세기 46 장

<언덕 위의 소리: 흔들림의 여정> 성경에서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합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여정이나, 그의 이야기 중 유난히 길 한가운데서 겪는 일들이 많은 것은 그의 질곡 많은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 야곱이 노년에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간절히 다시 만나기를 원했던 아들 요셉이 기다리고 있는 애굽이었지만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첫 말씀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3 절). 뒤집어보면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며느리들을 제외하고도 야곱과 함께 내려간 식구들의 수가 육십육 명이니 대장정의 여정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안주하려는 속성이 커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진 풍파를 견뎌낸 세월을 뒤로하고 노년에 다시 한 번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야곱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키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개인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민족을 향한 그 큰 그림은 개인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손길을 통해 안내됩니다. 두려워하는 그 여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내려갈 것이고, 당신의 인도 하심 속에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거기 내려가면 요셉이 네 눈을 감겨줄 것이라고 야곱을 안심시킵니다(4 절). 이 약속은 벌써 오래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시 한 번 위험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에 안주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일은 늘 불안한 흔들림의 연속일 겁니다. 두려움과 좁은 시각의 뒤에는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듣고 붙들 수 있다면 그 흔들림도 신나는 모험의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치용/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인생 속에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주시고, 함께 울고 웃으며 인생을 같이 살아낼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을 축복하셔서 귀한 만남의 복을 더하시되 예수 그리스도와의 복된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남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하루하루 이어지는 만남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믿는 이의 본을 보이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 1 서 4:7-8)라는 말씀처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2 월 25 일, 창세기 47:1-19

<언덕 위의 소리: 다리 위에서> 요셉의 꿈과 해몽, 험난한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 사랑, 이집트 총리가 된 후 다시 만난 가족 이야기는 어린이는 물론이요, 어른들에게도 감동을 준다. 그런데 요셉의 여정 가운데 주석을 찾아봐도 뭔가 석연치 않고, 교회력상의 성서 일과에도 빠진 부분이 있다. 바로 야곱과 요셉의 감격스러운 상봉 이후에 등장하는 창세기 47 장 중반부다. 이집트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바로 왕은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영민한 요셉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백성들의 밭을 사들이고, 자유인들을 노예로 만든다. 구약학자인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따르면 요셉은 결국 먹거리와 생명을 담보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노예로 만드는” 황제의 충신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셉의 능력을 인정한 바로의 배려로 기근 속에서도 잠시 풍요를 누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훗날 이집트의 노예로서 고통을 당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는 장면과 만나는 이야기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지평을 연결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또한 변화산의 여정처럼 교회력 상의 주현절과 사순절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 다리 위에서 말씀을 묵상할 때, 순간의 영광이나 풍요로움을 넘어 고난 속에서도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된다. 주현절과 사순절이 만나는 2 월이다. 하늘 영광과 초막 셋의 유혹을 뒤로하고 가장 빛날 때 내려가신 주님, 내려가는 길을 걸을 때 가장 빛나는 삶인 것을 보여주신 주님의 뒤를 따라 걸으며 세상에 부활생명의 은혜를 나누는 달이 되면 좋겠다. <선우혁/시온감리교회, RI>

<묵상 기도>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어 가족들과 애굽으로 피나온 야곱의 고백과 같이 인생의 여정이 “험악한 세월” 이었음을 또한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때론 잠시 머물다 가는 애굽 땅의 풍요로움이 좋아 이 땅의 허무함에 대해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들을 놓칠까 봐 안달하는 두려움이 감사함의 넉넉함으로 바꿔 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세월의 험악함 앞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름 받은 소명을 또한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한숨 쉬지 않게 하시고, 움찔하지 않게 하시고, 눈 돌리지 않게 하시고, 성령을 들이 마시듯 큰 숨 한번 깊이 들이 쉬고,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자녀들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남편과 아내를 향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월의 험악함 속에서도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26 일 창세기 47:20-31

<언덕 위의 소리: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이라는 책을 보면, 20 세기 초인 1914 년경 비슷한 시기에 두 척의 배가 얼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극과 북극을 각각 탐험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두 배 모두 큰 얼음인 빙산의 벽에 갇혀 배가 꼼짝 못 하다가 배가 부서져 침몰하게 됩니다. 캐나다의 스테팬슨이라는 탐험가가 이끈 북극 탐험대는 얼음 속에 고립된 지 수개월 만에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들로 변해버립니다. 북극의 추위 속에서 살기 위해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둑질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11 명의 대원 모두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얼음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나 역시 빙벽에 갇힌 영국의 섀클턴이라는 탐험가가 이끈 남극 탐험대는 27 명의 대원 중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그것도 2 년이 다 되는 634 일을 얼음 위에서 표류하다가 전원 살아 돌아옵니다. 섀클턴의 탐험대는 혼자 살겠다는 이기심 대신 전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 희생정신과 팀워크,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독서, 축구, 체스 등을 하며, 2 년여의 얼음 속 생활을 즐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생존하여 귀환한 후 한 대원은 이처럼 이야기합니다. “처절한 시련을 겪은 우리 남극 탐험대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애굽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총리인 요셉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었나이다.” 섀클턴과 요셉의 공통점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섀클턴은 생존과 귀환을 확신했고, 요셉은 자기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개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고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가 되시길… <이영성/LA 복음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를 눈동자와 같이 귀히 여기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진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사순절에 주께서 친히 오르신 골고다 언덕의 길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게 된 것을 기억합니다.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에라도, 고통스럽게만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저희들, 고단한 인생길이지만,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상황과 환경을 탓하는 것보다는 모든 고단함과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보람과 기쁨과 감사가 있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 주변에 질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만져 주시고, 질병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또한 삶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힘든 일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잘 감당하고 이기게 하옵소서. 또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10) 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주의 뜻을 위해서 살다가 어려운 일 당해도 기쁨으로 극복하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게 하시며, 저희의 마음속에 간절히 원하는 기도의 소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게 하시고, 주의 영광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27 일 창세기 48 장

<언덕 위의 소리: 믿음의 유산> 야곱이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마지막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의 즐거움은 많지 않았다. 결국 부(富)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안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 세상의 부(富)가 축복인 줄 착각하며 그의 이름처럼 악착같이 움켜쥐었던 삶을 살아왔던 야곱,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과 원수가 되었으며, 교활한 장인과 속고 속이는 삶으로 맞서며 성공이란 허상을 좇으며 살아왔던 야곱.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이제 오직 세상의 성공과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섭리에 순종하는 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을 그의 살아왔던

험악한 세월을 온몸으로 자녀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손을 좌우로 바꾸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손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야곱의 최후가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이런 믿음의 유산을 줄 수 있는 부모였으면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윤국진/와싱톤한인교회 센터빌캠퍼스, V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벌써 16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창세기 48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이삭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여 자손들을 위한 축복 기도와 그 결과를 묵상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여 가시는 중에도 제자들을 위해 드리셨던 간절한 기도와 겟세마네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또한 세상을 바꾸어 놓으신 주님의 그 기도의 능력을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분주했던 삶을 되돌아 봅니다. 동분서주하며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뛰었지만 빈손으로 허탈함에 빈 그물을 거두어야 했던 그 무능력의 원인은 다름 아닌 바로 진실한 기도가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제 자신의 능력으로 소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던 허황된 교만함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이제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도 소중히 여기신 기도의 신비와 능력을 깊이 깨달아 심비에 새기에 하옵소서. 저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진정 어린 기도를 드리는 참 기도자가 되도록 매일 매일 저의 영을 깨우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기도의 능력으로 사단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29 일 창세기 50 장

<언덕 위의 소리: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사람들이 욥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욥기 42:12 절에 나오는 대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받았다는 부분이 아닐까요? “고난과 시련을 잘 참아내면, 삶의 마지막에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해피엔딩(?)은 누구나 원하는 결말이기에 사람들은 이 부분을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욥이 받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욥이 겪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1:12)”,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2:6)”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과 이후에 몸을 맡기셨지만, 마지막까지 “생명”은 맡기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남은 생명을 기반으로, 몸이 회복되고 새로운 재물의 축복을 받은 욥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떠올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인간은 “호흡(생명)”만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셨기에, 욥은 새로 얻은 자녀들에게도 거룩한 삶을 가르쳤을 겁니다.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의미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일단락되었고, 욥을 통해서 결국 그의 자녀들과 우리에게 당신의 새로운 계획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50 장에서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하나님 계획의 1 막이 끝나지요. 이삭이 죽고 요셉도 죽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의 사명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는 나이가 차기까지 후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고 증거하라고 전합니다: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며 스스로의 사명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믿음의 삶이 됩니다. <배연택/찰스톤한인연합감리교회, SC>

<묵상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그 사랑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이 죄악 가운데 멸망 당하는 것을 절대 기뻐하시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엄중하게 심판하시지만, 영원토록 죄인을 향해 진노를 품고 있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용서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안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이 사랑의 용서를 받은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살게 하옵소서. 요셉이 그 형제들을 용서했듯이, 우리도 기꺼이 용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기꺼이 용서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그 용서하시는 사랑의 능력을 깊이, 그리고 뜨겁게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능히 용서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리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언제나 선으로 악을 갚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1 일 로마서 1 장

<언덕 위의 소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알다시피, 바울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학파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행 22:3), 로마의 시민으로서 헬라 철학을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앞에서 그는 그의 화려한 이력을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을 가리켜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오직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일만 하기로 결심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도 감사함으로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바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란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로 고백하며 결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언제 어디서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진정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간이 가장 축복의 시간임을 주님, 고백합니다. 가진 어떤 재물보다도 가진 어떤 재능보다도 가진 어떤 학식보다도 가진 어떤 명예보다도 가진 어떤 권위보다도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일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일이 가장 귀하고 가장 복됨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처럼 나는 매일 죽고 예수는 매일 내 안에 살아 있음을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의 삶에 교만이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가식이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허위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살아있는 자아가 사라지게 하시옵소서 다만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살아 있게 하시고 우리 안에 죄의 종은 죽고 의의 종은 살게 하시고 우리 안에 순종이 자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자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감사와 찬양이 자리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사도 바울의 주인이 되시듯 주님, 나의 주인이 되어 주셔서 언제나 주님 안에서만 행복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만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자만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옵시고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매 순간의 삶에서 꼭 기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죽기를 원하오며 살아계신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3 월 2 일 로마서 2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 명탐정 ‘셜록 홈즈’를 쓴 영국의 소설가 아더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어느 날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 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당신의 모든 것이 밝혀졌다. 지금 곧 비행기를 타라” 였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유명인사 12 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드러나지만 않을 뿐,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온전해질 수 있는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집이 생기고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1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연인들이었다면 2 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졌던 마음이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아닌지요? 신앙 안에서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옳은 것이 죽어도 옳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누구나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특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판단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 판단은 자신을 판단하는 결과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진리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인내로써 선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 자신도 항상 저들과 동일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입니다. <홍성국/몽고메리주님의교회, AL>

<묵상 기도> 죄인 된 저희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형편을 체휼하시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오늘 하루의 삶이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확증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계획되고 이루어지는 일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삶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족들, 이웃들을 대할 때에 그들을 판단하며 정죄하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삶의 형편을 돌아보며 품어주며 주님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되는 삶을 오늘도 살아가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3 일 로마서 3 장

<언덕 위의 소리: 믿음의 안전운전> 자동차를 운전하시는 분들에게 ‘가장 운전하기 위험한 계절이 언제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그야 물론 겨울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로에 쌓이는 눈과 아침에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운전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2010 년 미네소타 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운전하기 가장 위험하고 사고가 많이 나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합니다. 특히 휴가철이 몰려 있는 미국 독립기념일은 일년 중 가장 운전하기 위험한 때라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 도로 위의 많은 휴가 차량과 그들의 음주로 인한 난폭 운전이 겨울철 빙판길과 눈보라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통계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믿고 있는 것과 실제 사실(진실)은 때때로 다를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과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성경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신앙 생활을 수십 년 해온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로 위의 운전자들이 사고를 막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항상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는지 확인해야 하며, 그래야 영적인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도우심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가 이루어짐을 믿는다면, 믿음의 안전 운행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정의와 사랑과 겸손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사오니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증거되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 때 높아지려는 마음을 낮추시고, 나서려는 마음은 감추시고, 드러내려는 마음은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분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시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소요가 하나님을 향하는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겸손히 주님의 길을 걷는 인생들을 축복하셔서 삶의 문제가 주의 뜻 안에서 해결되게 하시고, 죄에 얽매인 인생이 주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이를 정죄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용서하고 이해하므로 화목하게 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4 일 로마서 4 장

<언덕 위의 소리: 의로운 믿음>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란 아브라함이 어떤 선한 행동을 먼저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기에 의롭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을까?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자손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것이 의로움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본다. 우선,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상대방을 적당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적당히 의존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려움이 찾아오면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님을 완전히 백 퍼센트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존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기다림이다. 그의 기다림은 육 개월, 일 년, 이년 정도가 아니라 35 년이라는 긴 시간을 참아내고 인내해 온 기다림이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시간이 주는 인내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이 짧은 시간에 끝난다면 누구나 이를 악물고 견딜 수 있다. 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거나, 아니면 끝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끝난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장사가 없다. 다 포기하거나 기권하기가 쉽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이럴 때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이렇게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끝까지 기다리며 참아내며 견뎌냈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의로움이었다. <김진철/멤피스한인연합감리교회, TN>

<묵상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 같은 죄인을 의롭다 불러주시다니요? 안과 밖을 살펴보아도 보여드릴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제 안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믿음을 보시고 저를 의롭다 불러주시다니요?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고향집이라도 떠났고, 100 세때 얻은 아들을 제단 위에 바칠 마음이라도 먹었다지만,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힘겹게 달려있는 제 믿음이 저를 의롭다 선포하시기에 충분하다니요? 그렇게 넉넉히 보아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저의 재산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저의 가족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아니면 저의 생명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사라의 태처럼 메마른 마음에 이제 겨우 작게 돋아난 믿음을 충분하다 하시는 주님, 내 모든 것 드려 감사드립니다. 내 모든 것 드려 찬양합니다.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5 일 로마서 5 장

<언덕 위의 소리: 희생양과 속죄양> 그리스도 예수 한 사람으로 인한 화평의 선물이 온 누리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의로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희생양이었고, 결국은 온 인류의 은혜를 위한 속죄양이 된 것이지요. 많은 양을 사육하는 농장 주인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손님이 방문하거나 명절이 돌아오면 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잔치하였습니다. 어느 날 농장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양들은 낯선 발걸음 소리를 듣고 이미 난리가 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인이 울안으로 들어와 양 한 마리를 잡아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양을 주인 앞으로 밀쳐내서 주인의 손에 잡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벌써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얄미운 녀석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잘날척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 양들에게 배려하지 않는 그 놈이었습니다. 늘 왕따를 시킨 녀석이 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이 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휙 둘러보았습니다. 양들은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몰리면서 한쪽 구석으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못마땅한 그 한 마리 양을 밀쳐냈습니다. 왕따를 당한 양은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주인이 울안에 들어오자 울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손에 잡혔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지요. 언제인가는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희생양이 우리를 살게 하는 속죄양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선영/덴버연합감리교회, CO>

<묵상 기도> 단 한 사람!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 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만이 나의 구원의 통로임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사랑 없이는 우리는 세상의 환난을 견디지 못함을, 당신의 위로 없이는 우리는 세상의 고초를 감당 할 수 없음을, 당신의 동행 없이는 다가올 소망의 길로 나아갈 수 없음을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주님 없는 나는 없고 주님 없는 의는 없고 주님 없는 기쁨은 없음을 우리가 믿기에, 연약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 순간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 사랑! 바로 그 사랑! 내가 받았사오니,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사오니, 나도 그 사랑! 바로 그 사랑! 이웃과 나누기 원합니다. 나의 영혼에 사랑이 가득하게 하소서. 주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화평을 이루고, 평화를 만들고, 천국을 만들게 하옵소서.

한 사람이 모든 이들을 죄인 되게 하였고, 한 사람이 세상에 구원의 기쁨을 가져 온 것처럼, 나도 그 한 사람!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기쁨의 통로 되게 하시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은혜의 통로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IMG_18543 월 7 일 로마서 7 장

<언덕 위의 소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법> 불결한 마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래 깨끗한 마음에 어떤 다른 것들이 섞였을 때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음란, 미움, 교만, 거짓, 위선, 불평, 불만 이러한 죄악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입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말이 되고, 행동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1 서 1: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순수한 것을 받아 냅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소멸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얻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하며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그 때에 우리 마음속에 큰 은혜가 임하며, 성령의 불로 더러운 생각을 태워 버리며,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으며,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주님께 내려놓을 때 그 분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청결케 하십니다. <정건수 목사님 칼럼에서/디트로이트중앙연합감리교회, MI

<묵상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오래 전에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심하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얻는 일에 분주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는 일에는 게으르면서도, 육체의 건강을 위해 온갖 힘을 쏟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큰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작은 일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때에는 자기 만족에 겨워 기뻐하면서도,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원망과 불평 속에 주저 앉습니다. 여전히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게 하옵시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겸손히 무릎 꿇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8 일 로마서 8 장

<언덕 위의 소리: 성도를 위한 성령의 사역> 성도의 성화는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얻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성도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양자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시며,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 이동규/밸리연합감리교회 & 밸리중앙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저희 죄를 사하시고, 죽음에서 건져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죄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저희를 한 없는 은혜로 감싸 안아 살려 주시고, 실수 투성이의 저희를 버리지 아니 하시며, 오히려 그 실수와 잘못도 다 거두어 은혜의 기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거름이 되게 하시는 주님, 그 변치 않는 사랑과 놓치 않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정 아무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저희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한 없는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 오늘도 그 변치 않는 사랑을 향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 하오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으로 주님의 손 놓치 않고, 꼭 붙잡고 나아가는 저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3 월 9 일 로마서 9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국에 살 때 보았던 세계지도는 한국이 중심에 있는 지도였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지도책에 나오는 세계지도는 유럽이 중심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세계지도를 미국에서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양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미국이 중심에 있긴 하지만 아시아 대륙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지도도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남과 북이 뒤집어진 세계지도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호주 중심의 세계지도입니다. 북쪽이 지도의 맨 위가 아니라 남쪽이 지도의 맨 위가 된 세계지도, 우리 생각에는 세계가 뒤집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남반구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각자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바라봅니다. 21 세기 포스트모던시대에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다 맞는다고 생각할 수 도 있고, 또 반대로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모두 다 틀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떤 각도에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을까요? 지도를 바라볼 때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물, 사건, 사람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데, 과연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도 세상의 관심과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류계환 목사님 칼럼/미네소타복음연합감리교회, MN>

<묵상 기도>

주님, 저희 마음에도 사도 바울과 같은 큰 슬픔이 있습니다. 이 슬픔은 고향 땅에 있는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저희 마음에 차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저희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주시고, 지난 수 십년 동안 참으로 불같이 주님의 교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교회라는 칭찬을 받았고, 성급한 사람들은 “새로운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다!” 설레발 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지금의 한국 교회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혼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교회가 영혼의 등쳐먹었다는 이야기에 묻히고, 교회가 사람들을 섬기는 이야기는 섬김을 받아 목이 곶은 백성이 되었다는 비판에 묻혀버렸습니다. 더 이상 죄인들은 교회를 찾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은 교회에 마음을 열지 않으며, 길을 잃은 사람들은 교회에 길을 묻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도 주님의 긍휼과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맞길 때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주님, 저희 한국 교회를 주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니, 우리를 구원하여주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주소서.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0 일 로마서 10 장

<언덕 위의 소리: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막 10:17) 그는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성도’였습니다. 젊고 부유했으며, 집안도 좋았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게다가 신앙적인 열심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 10:2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제자로 부르실 때마다 이처럼 ‘전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을 만한 분인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 중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예수를 주로 시인”(9 절)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분이 내게 진정한 ‘주님’(믿고 따를 만한 분)이 되시도록 하려면, 내게도 ‘예수님이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을 만한 분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의”에 빠져있는 믿음 없는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내 선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약속의 말씀’으로 실현되는 것”(파미라 리브, 『믿음이란』)임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혁재/탈라하시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때로는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가 주의 뜻 가운데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순례길을 걸으며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는 말씀에 힘입어 주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복음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옵소서. 삶의 형편마다 함께 하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루하루가 소망의 날이 되게 하시며, 믿음을 보이며 사는 귀한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11 일 로마서 11 장

<언덕 위의 소리: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는 것> 1988 년 4 월 어느 날 저녁, 미국 전국 뉴스 시간에 안타까운 소식 하나가 보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에서 창공을 향해 뛰어내리는 스카이다이버들을 촬영하려고 구름 속으로 함께 몸을 던진 카메라맨(그 역시 스카이다이버였음)이 멋진 촬영은 하였지만 제시간에 자신의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하강하여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스카이다이버들을 촬영할 일에 정신이 팔려 카메라는 잘 챙기고 비행기 밖으로 나왔지만 정작 자기 비행을 위한 낙하산은 깜박 잊고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던 것입니다. 저녁 시간에 이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마감 논평을 합니다. “그에게 있었던 수십 번 낙하산 타기 경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 자신의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바로 그것을 휴대하지 않았을 때 그는 결국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여정 가운데 항상 지니고 살아야 할 것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접 붙여지게(연합)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늘의 기쁨, 영생을 맛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믿음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 세상에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었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롬 11:20, 새번역) 유대인들은 이 믿음을 갖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듣고 율법을 지키려고 그토록 애를 썼지만 정작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갖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 안에서 누릴 구원의 은총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1 장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합니다.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주님 안에서 접붙임 받아 살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을 주고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게 하는 이 은혜의 선물은 누구로부터 계속 공급받을 수 있나요?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주함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됩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황헌영/남부시카고한인연합감리교회, IL>

<묵상 기도>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새롭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순수한 뜨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이라도 느껴 내 안에 차갑게 식어버린 그 사랑에 불을 지르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했던 그 이가 어느새 나보다 훨씬 더 자란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을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에서라도 힘을 받아,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만 한 걸음이라도 옮기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나보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에라도 이끌려 “내가 가진 것 중 영원한 것은 없다!” 한번이라도 선언하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질투심에라도 이끌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부유하심이 사람의 부유함 보다 크고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보다 넓으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까닭이니 주여, 질투심이라도 주셔서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2 일 로마서 12 장

<언덕 위의 소리: 산 제사의 영향력> “여러분들이 믿는 신(하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 보려고 합니다.” 일 년 동안 이곳에 교환 교수로 오셨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 내외의 인사말이었습니다. 낯선 지역에서 외로워 일본인 커뮤니티를 찾다가 교회에 나오시게 되셨습니다. 짧다면 아주 짧은 기간 함께 교회생활을 하신 것인데, 그것도 학회와 여행 등으로 주일예배는 많이 참석하지 못하였었고 성경공부나 기도회 모임에도 거의 오지 못하셨었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드린 성경책도 주일예배 때만 펴 보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면서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무엇이 무관심했고 거리를 두려고 했던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바꾸어 놓았을까 놀랍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롬 12 장이 권면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예배 드리기’에 애쓰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 그리고 작은 일에도 십시일반 나누고 도우려고 하는 손길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분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신들도 믿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희생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라면, 생활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증거 되는 예배입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과 물질과 시간과 관계의 즐겁고 기쁜 희생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삶으로 예배 드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미가 6:6)”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김동기/로체스터한인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죄악된 세상에 육신을 입고서 오셨지만 죄와 흠이 없으셨던 주님, 하지만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과거의 죄된 습관과 이 세대의 악한 모습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된 모습을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여 주시며, 우리의 삶을 산 제물로 당신에게 드리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분별하여 결단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며, 우리 주위에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이들을 축복하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과 더 불어 화목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14 일 로마서 14 장

<언덕 위의 소리: 중심이 보이면 큰 믿음이다> 술 먹는 사람 봤을 때 ‘저거 아직 멀었군!’ 하는 마음 든다면 내 믿음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저렇게 쓴 걸 마시는 저 마음 참 아프겠구나’ 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반대로 술 먹지 않는 사람 봤을 때 ‘저렇게 유치하게 믿다니!’ 하는 마음 든다면 내가 유치한 것입니다. 대신 ‘저토록 믿음의 결의가 확고하구나!’ 하면 큰 믿음입니다. 무엇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했다 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것입니다. 대신에 내 안에 주님께서 이루신다 해야 큰 믿음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님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김호진/올랜도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평화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교회를 세우셨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서로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 안에 불화와 시비와 다툼과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평화를 해치는 인간의 헛된 자랑, 시기와 미움과 더불어, 교만과 자만과 거만과 오만을 버리게 하옵소서. 악한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게 하옵시고, 그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옵소서. 오직 일치된 믿음으로, 일치된 순종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바 된 우리 모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가게 하옵소서. 아무리 무엇을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믿음의 형제. 자매에게 거침돌이 된다면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게 하옵소서. 무엇이든지 교회의 평화를 위해, 덕을 위해 행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얼마든지 불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시고, 언제나 감사하는 말, 칭찬하는 말, 친절한 사랑의 말로써 교회의 평화를 굳게 지켜 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로써 화목하게 하신 평화의 왕,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15 일 로마서 15 장

<언덕 위의 소리: 사막에서 샘물을 찾아내는 사람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해결하면 되는 삶의 과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젯거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인도 캘커타 빈민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많아지면서 함께 일하던 젊은 수녀들이 “문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라고 할 때 “문제(problems)라고 말하지 말고 선물(presents)이라고 말해 보세요.”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신이 도와줄 수 없는 10 명의 사람들’(10 People You Can’t Help)이란 글에서 Joseph Mattera 는 자신들 스스로가 삶의 태도를 바꾸어 발전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돕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이런 도와줄 수 없는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사람들과 관계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고 감추는 것이 많은 사람, 부정적인 인생관을 고집하는 사람, 미래에 대한 비전을 거부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 발전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 교회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그리고 겸손하지 않고 양심 없고 거짓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발전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인가요? 당연하게 자기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 하나님 찾기를 목말라 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사람과의 건강한 교제를 하는 사람,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 미래 비전을 가진 사람, 정직한 사람,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겸손하고 양심 있고 참된 사람입니다. ‘노인과 어르신의 차이’라는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를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좋은 덕담을 해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 체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르신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알아도 모른 체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이제 배울 것이 없어 자기가 최고인양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믿음의 삶이란 사막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샘물을 소망하고 찾아내는 것입니다. <김정호 목사님 칼럼/후러싱제일교회, NY>

<묵상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 하루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없이 온전히 살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지혜와 깨달음과 실천력을 주시옵소서. 이 세상 사는 동안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살다 보면, 비천에 처할 때도 있고, 부활 때도 있고, 연약할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기쁨과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만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라고 하신 말씀처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굳센 믿음으로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향기를 지니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는 전하는 메신저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고 싶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감히 소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로운 말과 행동으로 대하는 덕스러운 모습, 다른 사람을 살리는 소금과 같은 모습, 일상생활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저희에게 힘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3 월 16 일 로마서 16 장

<언덕 위의 소리: 거룩한 입맞춤> 로마서 16 장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로 보통 짧은 축복 기도로 끝맺는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아주 긴 인사말로 마무리한다. 바울은 “문안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인사말을 15 번이나 반복하며 26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한다(3 절, 5 절, 6 절, 7 절, 8 절, 9 절, 10 절, 11 절, 12 절, 13 절, 14 절, 15 절, 16 절, 22 절, 23 절).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울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들이고( 5 절, 9 절),그리스도 안에서 인정 받은 자들이며(10 절), 주님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이고(12 절), 그리고 주님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다(13 절). 이들 가운데는 뵈뵈(1 절), 브리스가(3 절), 유니아(7 절)같은 여성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로마서 16 장의 긴 마지막 인사말은 로마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의 끈 안에서 주어진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를 위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지지와 헌신을 얻기 위해 쓰인 로마서의 중심주제와도 부합한다. 바울의 이러한 의도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16 절)라는 마지막 인사말 잘 드러난다. 거룩한 입맞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깊이 있는 연대를 가장 잘 표현한 인사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간의 거룩한 입맞춤은

거룩한 삶에 동참한다는 다짐으로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노예, 자유인, 유대파 기독교인, 헬라파 기독교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초대교회의 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갈 3:28;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초대교회는 육체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사명을 함께 감당하였던 것이다. 거룩한 입맞춤은 율법 아래의 차별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의 복음을 표현하는 인사법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배시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평화의 인사는 성도들 사이의 화해에 초점을 둔 것으로 “안녕하세요?”라는 개인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등의 표현이 적절하다. 세상의 모든 장벽을 넘어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교파와 신학을 넘어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진양/ Creston/Steward UMC, IL>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벌써 31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로마서 16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복음의 비밀을 알고 복음의 능력으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선진들과 그들의 창조적 삶의 능력이 바로 사명에 이끌려 가는 종의 삶에 있었음을 묵상하며, 죄와 사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거룩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시는 주님을 묵상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봅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제 삶의 현장인 가정, 교회, 일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았던 그 이유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것은 제가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부인하여 값싼 은혜만을 추구했던 저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고 그 능력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창조적 삶의 능력이 됨을 깊이 심비에 새기게 하옵소서. 더 이상 값싼 은혜를 구하지 않게 하옵시고, 저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사명에 이끌려 가는 삶과 종의 삶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3 월 17 일 고린도전서 1 장

<언덕 위의 소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회>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영적인 도전은 성도들 간의 분열과 갈등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다양한 의견 차이와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담임 목회자들의 잦은 이동, 성도들의 다양한 신앙적인 성향 및 의견들은 분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 개의 신앙적인 계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고린도 교회를 창립한 바울 파였습니다. 창립 파들은 바울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첫사랑과 좋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고 교회의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아볼로파 계열의 엘리트 그룹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문이 높은 학자 타입의 목회자였습니다. 헬라 철학에 능하고 교리와 성경을 희랍철학으로 해석한 사람이었습니다. 웅변을 잘하고 설교를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잘 하는 훌륭한 설교가였습니다. 이러한 학문적인 목회자에게 영향과 훈련을 받은 엘리트 그룹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면서 유대인들의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순교의 믿음 위에 신앙의 기초를 세운 전통적이고 유대적인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보다 사도 베드로의 권위를 더 높이 인정했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파 사람들입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이며 상업도시로서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서로의 다양성과 차이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함께 나눌 때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용연/미드허드슨한인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십자가! 우리가 자랑할 단 한가지 십자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오직 유일한 능력… 하지만 주님,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고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는데 늘 뒷걸음치는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믿음의 사람을 주님이 원하시고, 우리가 꿈꾸지만 늘 책망 받을 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주를 섬기며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게 해야 하는데, 늘 분파를 만들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고 우기며,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약한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지만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십자가 밖에 의지할 것 없어 십자가의 능력 아니면 이길 힘이 없어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 놓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패배로 보이나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어리석은 결정처럼 보이나 믿는 우리에게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인 것처럼 불신자에게는 십자가가 약함의 상징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강한 하나님 은혜의 통로인 것처럼 오직 주님만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이시고 힘이심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미련함이 지혜로움을 이기며, 천한 것이, 멸시 받는 것이, 없는 것이, 있는 것과 세상의 스스로 귀하다고 하는 것을 이김을 십자가가 죽음을 이김을

죽음이 영생을 가져옴을 순종이 구원을 이룸을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그 십자가를 내가 지게 하옵소서 그 십자가를 내가 붙들게 하옵소서 그 능력의 십자가를 내가 믿게 하옵소서 그 보혈의 십자가를 내가 체험하게 하옵소서 약한 죄인을 온전함과 강한 믿음으로 이끄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그리고 세상의 약한 자리, 십자가가 필요한 곳에 나의 십자가를 세우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3 월 18 일 고린도전서 2 장

<언덕 위의 소리: 은혜의 줄> 저는 성만찬 예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The Lord’s Table is ready, Come, not because you are worthy, but because you are invited.”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격을 묻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가 풍성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8)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노력한 것만큼 얻으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노력한 것만큼만 얻고 누리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수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과 재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연이 줄로 연결 되어 있어야, 땅에 떨어지지 않듯이, 우리들의 삶도 얼핏 보기에는 잘 나르는 연과 같이 공중에 저절로 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매어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줄로 연결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8 장에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여 있는 복된 성도들입니다. 은혜의 줄로 항상 우리를 묶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저 멀리 창공을 훨훨 날아가게 하여 주시며, 독수리와 같이 날마다 새 힘으로 날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안명훈 목사님 설교/아콜라연합감리교회, NJ>

<묵상 기도> 아버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지혜란 무엇인가요? 알고 싶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것을 모르게 만들 수도 있겠군요. 왜냐하면,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면,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하면 그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인가요?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요. 그렇게 믿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까닭은 제 안에 “사랑하는 것으론 지혜를 얻기에 충분치 않다.” 말하는

또 다른 사람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손에 든 무기는 비교. 이 사람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은 열등. 그리고 이 사람 나에게 만들어내는 것은 극성. 비교하면 부족하고, 부족하면 쪼그라들고, 쪼그라들면 채우려고 극성을 부리니 사랑하면 지혜를 주신다는 그 말씀, 믿고 싶으면 믿고 싶은 만큼, 끌어안고 싶으면 끌어안고 싶은 만큼 제 마음을 아프게 파고 듭니다. 용기를 주세요, 아버지.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사랑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으로만 얻어지는 지혜가 저에게 충분할 수 있도록… 오늘도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아버지!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9 일 고린도전서 3 장

<언덕 위의 소리: 사람으로 인해 소중한 교회>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은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일 또한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실족하고 갈등하고 고통받다 보면 삶의 보람과 기쁨,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인해 치유됩니다. 사람 때문에 흘린 눈물과 받은 상처는 삶의 가장 소중한 일부분이고 행복의 작은 씨앗임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22 년전 미국에 유학 와서 이민목회현장에 뛰어든 지 16 년이 넘도록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면서 한 영혼을 섬기는 보람과 기쁨, 교회가 부흥되어 성전 건물을 구입하여 입당 예배를 드렸던 영광스러운 순간들, 교우들을 떠나 보내야 했던 아픔의 순간들, 수많은 행사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던 희노애락의 목회여정가운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보화는 돈이나 건물이 아니요 학위도 명예도 아니요 일의 경력도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남,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오직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을 확장하려는 시도 이전에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세우는 곳, 사람을 남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서바이벌(Survival)공동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몸(Body of Jesus Christ)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 장 40 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메마른 세상에 생명을 주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할 때(Donation)항상 어린 자녀들의 손을 통해서 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도 장미꽃을 건네준 사람의 손에는 장미향이 남는다는 것을 기억하며 깨어진 인간관계로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 세대에 2000 년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말씀들을 다시금 가슴에 되새기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 소중한 ‘님’, 소중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인 까닭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구원자로, 치유자로, 중보자로, 성육신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까닭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지상에 남기신 주님과 꼭 닮은 ‘분신’이고 예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재웅/롱아일랜드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구원의 하나님,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오신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자녀스럽지 못하고, 죄와 허물로 가득 찼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려고 결심을 해봤지만, 의지가 약하고, 교만하고, 욕심과 고집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반복하여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저희에게 주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고 있음을 잊지 않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 삶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미지의 땅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았던 것처럼, 저희도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주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길과 진리와 생명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3 월 21 일 고린도전서 6 장 (Holy Week)

<언덕 위의 소리: 먼저 사랑할 이유> 거의 다섯 살 터울의 딸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둘이 서로 장단이 잘 맞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기도 합니다. 언니는 언니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고 동생은 동생이라서 불만입니다. 그런데 둘이 말다툼을 하다가도 한순간 사이 좋은 자매로 돌변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가 먼저 마음을 바꿔 먹을 때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언니 좋아’ 하고 말을 한다거나, 언니가 먼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언니가 놀아줄까?’ 하고 말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 좋은 자매가 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미움의 싸이클에 들어가면 그 싸이클을 먼저 깨고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먼저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미움의 싸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사랑의 말을 들은 후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미움의 싸이클 속에서 먼저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란 미움의 싸이클 속에 있으면서도 ‘먼저 사랑할 이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죄인이 되어 저주의 싸이클 속에 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미움의 싸이클 속에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먼저 사랑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먼저 받은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미움의 싸이클을 깨고 먼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먼저 사랑하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미움의 싸이클은 금새 사랑의 싸이클로 변화됩니다. 상대의 표정과 입술만 바라보며 사랑할 이유를 찾는 사람은 미움의 싸이클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대로 희생양이 되어 안타까운 결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먼저 시작된 사랑의 줄기에 반응하며 사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평의 시작이 되고,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하는 평화의 도구가 됩니다. 맡기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서 반복되는 미움의 싸이클을 거절하고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할 수 있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선형 목사님 칼럼/시카고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화로우심을 사모하며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죄악의 더럽고 누추한 옷을 벗기시고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겨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은 오늘의 세상 속에서 육체의 정욕과 쾌락을 좇아 살지 않게 하옵소서. 모든 음행과 음란, 부정과 탐욕을 경계하게 하옵소서. 행여 우리의 교회들이 더러운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인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교회들이 되도록 능력을 쏟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생각, 그리고 우리의 몸이 언제나 주님 앞에서 성결함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22 일 고린도전서 7 장

<언덕 위의 소리: 화평 중에서 부르셨느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신앙 갈등에 대한 상담 요청을 종종 받습니다. 또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경우에는 불신자와 결혼을 해도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안전한(?) 대답을 원해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했으면 그대로 지내고, 결혼을 했으면 갈라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도 안 해본 바울이 너무 무책임하게 대답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HOW”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어느 때인가 분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7:29) 어찌 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7:32)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르심의 이유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WHY”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배우자로 말미암아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믿는 아내가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지, 믿는 남편이 아내를 구원으로 인도할지 어찌 알겠냐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불쑥 “그때는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지! 이 인간이랑 결혼을 하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사람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을 이룬 것이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왜 부르셨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실은 “그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백승린/탬파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세상의 헛된 것에 메이지 아니하고 오직 은혜의 끈으로만 묶여 지기를 간구합니다. 주신 것을 기억하고, 주실 것에 감사함으로, 없는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게 하시며, 그럼으로 주님 오실 때 채워질 소망의 그릇이 커짐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끈에 매여 있는 우리의 욕심을 내려 놓기를 기도합니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을 이길 용기를 주시옵고, 주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지경의 선함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가정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 닮아 깊어지게 하시고, 부모님의 강건하심으로 감사가 넘치게 하시고, 자녀들이 하늘에서도 칭찬받는 귀한 자들로 성장해 가게 하옵소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부족함의 기도와 넉넉함의 감사가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희의 삶과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3 월 23 일 고린도전서 8 장

<언덕 위의 소리: 내가 죽인 친구의 형> 제가 중학교 3 학년 때, 저보다 3 살이나 많았던 제 친구의 형이 제 짝이 되었습니다. 간질을 앓고 있던 형은 몸이 너무 병약하고 아파서 세 살이나 어린 우리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던 겁니다. 저하고 친한 친구의 형이었기에 제가 처음에는 무척이나 잘 챙겨주고 잘 대해주었습니다. 가끔씩 수업시간에 발작을 일으키곤 했는데, 얼마 후부터 우리 반의 모든 친구들이 그 형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친구의 형이었기에 처음에는 같이 놀아주고 점심시간에 같이 밥도 먹었지만, 점차 저도 그 형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저마저 그 형을 외면하면 그 형은 정말 외톨이가 될 것을 알았지만 저는 친구들이 저까지 따돌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국 그 형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다른 친구들의 무리에 합세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약 올리고 손가락질하는 무리에 섞여 있는 제 모습을 보고 그 형이 얼마나 좌절하였을까?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그 형은 병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그 형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그 형의 육신의 병은 내가 준 것이 아닐지라도, 그 형의 마음의 병을 깊게 만든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비록 늦었지만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 내 곁에 작은 자의 모습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바로 그 형 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바라보며 내가 손 내밀어 주기를 바라셨는데, 나는 그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작은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던 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유대인의 무리 속에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이 우리 주의에 얼마나 많은지 ….나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세요! <강현중목사님 칼럼/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이 시간,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여정을 묵상합니다. 당신이 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인 것을 아시면서도,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저희들도 좁을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가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하옵소서. 또한 고난을 당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인내함으로 요동치 않는 믿음으로 더욱 연단 된 삶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낙담케 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시며, 믿음의 형제자매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며, 우리의 가정과 교우들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동반자들에게 항상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는 관계로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24 일 고린도전서 9 장 (Holy Thursday)

<언덕 위의 소리: 거룩한 책임감으로> 세계 정상급 테니스 선수들이 어떻게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수천 시간이 넘는 프로 선수들의 게임을 분석한 짐 로허 (Jim Loehr)라는 스포츠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가 선수들의 테니스 경기를 자세하게 분석했는데 경기가 시작되어 서로 열심히 경기할 때는, 최 정상급 선수와 그보다 못한 선수 사이에서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기 사이사이에, 점수 한 점 주고 받는 그 사이 사이에, 그리고 한 세트가 끝나고 다음 세트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양 선수간에

확실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최고의 선수들은 틈틈이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는 뭔가 탁월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20 초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의 박동수를 낮추고, 마음의 긴장을 풀고, 다시 집중력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두 세 시간씩 지속되는 테니스 경기에서 이러한 초 단기 회복 습관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한홍, 왕들의 이야기에서). 수영 경기 전후로 늘 이어폰을 끼고 다니던 박태환 선수와 큰 경기 앞에서 늘 환한 미소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 김연아 선수도 보통의 선수들과 비교되는 탁월한 선수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 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사도로서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바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까지 포기하고 오직 복음을 위해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경주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복음성가의 가사와 같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도바울이야말로 거룩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음질한 주님의 참 일꾼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지금도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니 참 일꾼이 적다고 합니다 (눅 10:2).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고 복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해 내는 참 일꾼 되기를 소망합니다. <박진원/사바나한인연합감리교회, G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 40 일 여정이 이제 거의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주신 고린도전서 9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의 위대한 과업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한 위대한 종의 그 아름다운 고백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인 메시아의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성 목요일에 남기신 거룩한 발자취를 통하여 면밀히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면서도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성만찬의 은혜를 주시고 자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심과 제자들의 발조차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주시며, 사랑과 섬김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보다는 그 사명을 위해 주신 직책의 권세를 누리는데 급급했던 부끄러운 처신들을 생각하며 깊이 참회합니다. 사랑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요, 섬김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일깨우시는 성령님의 권고를 귓등으로만 들었던 저의 오만한 어리석음을 참회합니다. 주님, 이제 저로 하여금 직책보다는 사명이 귀중함을 그리고 참 사랑과 참 섬김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심비에 깊이 새기게 하옵소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사명에 불타오르게 하시옵고 섬김의 용기를 갖도록 도우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3 월 25 일 고린도전서전 10 장 (Good Friday)

<언덕 위의 소리: 생명과 복>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 불행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권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과 시골 촌부의 집에서 태어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출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출생한 환경에 지배를 당하고 사느냐 초월해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이 그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고백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임의로 주신다기 보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다른 예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모두를 믿게 하셨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세상 사람들의 의지적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영생을 준다고 하지 않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쓰면 “저를 거부하면 사망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은 생명과 사망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든지 거부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선택한 사람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철구 목사님 칼럼/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금요일 주님께 기도하는 우리의 심령이 회개와 기도, 감사와 찬양,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총이 우리의 삶 속에 임하게 하옵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구속의 증거가 되게 하셨사오니 그 몸과 피를 통해 우리가 한 몸 이루는 감격을 누리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은혜로 새 사람된 믿음의 백성들이 산제사의 삶을 살게 하옵시고, 신앙의 신비가 일상이 되어 우리를 돕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바라며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26 일 고린도전서 12 장

<언덕 위의 소리: 자기중심성(Ego-Centrism)>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터전이 되는 장소인 교회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영적 공동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조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터전인 교회에도 세상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공존 합니다. 그러한 문제의 근원을 차근히 살펴보게 되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의 자기중심성(Ego-Centrism)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개인의 내면, 가정, 교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의 모습 속에서도 그러한 갈등이 보입니다. 교회 내에서 여자교우들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문제,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교우들 사이에서의 갈등의 문제들이 보여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해 주었던 빌립보 교회와는 달리 고린도 교회와의 사이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명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 스스로가 회심 전에는 가장 극명한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 있던 자였기에,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문제들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님도 그의 사역의 첫 시작을 앞두고 광야에서 자기 스스로를 부인해야 하는 시험을 감당하셨고 십자가에서 그 최고의 정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성만찬의 참 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의미가 담겨있는 성만찬을 온전히 이해하고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 안의 자기중심성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만만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견뎌나가며 가나안 땅을 꿈꾸어야 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깊이 있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성장해 나갔지만, 그들이 광야에서의 어려움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만찬의 과정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단순히 예수님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기념하는 단계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서는 살과 피를 나눠주신 분이시고, 나의 죄를 씻겨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고백해야 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만찬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무너지고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기념함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되는 주님의 거룩한 초청인 것입니다. <이병훈/에임스사랑의교회, IA>

<묵상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께서 주신 성만찬을 오해하고 남용할 때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성만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마술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며, 우리의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이 식탁에서 쫓아냄으로 그를 심판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성만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가 그 분과 하나되었다는 신비를 우리 자신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희가 이 신비에 참여하고 또 참여할 때, 우리를 위해 값없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의 몸을 내어줄 수 있게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승리자로 오시는 그 날, 하늘 나라의 영원한 잔치에 참여함을 늘 기억하여 오늘 하루 하루를 성찬이 연속된 삶으로 살아가게 인도하 여 주소서. 이제 내일 아침이면 찬란한 부활로 우리를 맞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2 월 10 일 수요일 창세기 35 장 (Ash Wednesday)

<언덕 위의 소리: 벧엘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삶> 야곱에게 벧엘의 경험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가족들과 자신 스스로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갱신의 장소입니다. 야곱에게 벧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가족들과 함께 갱신의 장소로 만들었다면, 저에게는 새벽기도가 벧엘의 경험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한국을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미국에서 계속 사역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집에서 가까운 작은 성결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10 명도 나오지 않는 작은 교회였는데, 목사님께서 열정적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설명해 주시는데, 저에게는 말씀 하나하나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10 명도 안 되는 성도들과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이, 내 안에 있던 벧엘의 기억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입니다. 신학생 때 간절하게 기도하던 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한국의 교우분들도 떠올랐습니다. 미래를 놓고, 계산적으로 생각만 하던 저의 부끄러운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벧엘의 경험을 가지고, 어렵고 힘들 때 그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원홍연/어바인 드림교회, CA>

<묵상 기도> 모세가 거룩한 떨기나무 불길 앞에서 신발을 벗었듯이, 야곱의 식구들이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기 전 미디안에서 가지고 왔던 우상들을 쓸어 모아 세겜에 묻어 버렸듯이, 사순절을 시작하며 지난 세월 끌고 다니며, 곰쳐 가지고 다녔던 나의 우상들을 내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처음 뵈었던 벧엘로 다시 올라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지체하며 먼 길을 돌아온 죄송한 마음으로, 새롭게 보여 주실 하늘 사닥다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벧엘을 향해 가듯, 골고다를 향해 다시금 믿음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고난의 돌 베개를 거룩한 제단 삼아 주신 주님, 힘에 겨울 수 있는 이 사순절의 하루하루를 통해 돌 베개가 은혜의 제단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11 일 창세기 36 장

<언덕 위의 소리: 조연도 빛날 수 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있다가 잠시 산책하러 나갔는데 예배당 옆에 있는 저희 교회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인 회중(Central UMC)교회 싸인 밑에 자리 잡은 저희 교회 이름이 왜소해 보였습니다. 한인 회중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영어로만 적혀 있습니다. 교회 사인을 보면서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물어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형아~ 어떤 교회를 꿈꾸며 목회하고 있니? 설마 언젠가는 저 아래 쪽(Secondary Position)이 아니라 위쪽(Primary Position)에 큼지막하게 교회 이름을 써 붙이고야 말리라~ 하는 생각으로 나의 소중한 양들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진정한 교회라면 설사 땅속에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 복음의 생명력과 삶의 변화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역동성 때문에 감추어 질 수가 없는 법이란다. 어떤 교회도 홍보가 덜 되어 문을 닫는 교회는 없단다. 단지 생명력과 변화의 소문이 밖으로 흘러 나갈 만큼 진정한 나의 교회가 되지 못되고 있을 뿐이란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교회 싸인 앞에 서서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다시 채워졌을 때, 교회 간판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저희 교회 이름이 그렇게 아래쪽에 그리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생명력과 사랑의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작아도 감사하고 감추어 져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라는 빛을 발하고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알아서 필요한

곳에 우리를 비추시고 보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에서는 마치 약속의 자녀가 아닌 비주류 조연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에서의 족보 또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조연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은 없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빛의 자녀의 삶으로 나아갈 선택 앞에 매일 같이 서 있을 뿐입니다. <조선형/시카고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죄인 된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하시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 저희들에게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시어서 주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과의 만남이 동행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의 삶과 이 땅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헌신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그 가문을 이루게 하셨으니,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믿음의 자녀로서 주님을 닮아가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2 월 12 일 창세기 37 장

<언덕 위의 소리: 편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셉과 그 형제들 비극의 시작은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합니다. 코넬대학(Cornell University)의 칼 필레머(Karl Pillemer)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Mothers’ Differentiation and Depressive Symptoms Among Adult Children) 부모의 편애는 가족 갈등의 주된 원인 중의 하나이며, 자녀들의 심리 형성과 행동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고 자란 야곱이 그의 자녀 중 요셉만을 아끼는 모습과 그로 인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결국 노예로 팔게 되는 모습을 보면 칼 필레머 교수의 연구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명심보감 (Myeangsim Bogam: The Precious Mirror of Bright Mind) 은 편애를 가리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가시와 같이 날카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오랫동안 편애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 마음에 아픔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 아픔은 미움과 증오심으로 변해 결국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가시로 바뀌게 됩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특별한 감정이 아무런 여과 없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와 가시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3 일째입니다. 오늘 창세기 37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요셉이 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애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가슴 아픈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당시의 불의한 기득권자들에게 받으셨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시던 제자,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은 30 에 팔려가며 주님이 겪으신 그 고통과 고뇌를 묵상하여 봅니다. 이제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저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이 가져오는 처절한 고통을 더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따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나는 참 자유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의를 행하는 자와 함께 평화를 누리고 귀한 일을 성취한 자와 함께 그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늘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13 일 창세기 38 장

<언덕 위의 소리: 성도의 책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즘 유행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아이를, 그것도 쌍둥이를 출산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행동이 막장과는 거리가 먼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인들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은 한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사내아이를 출산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자 장남인 엘이 그의 악함으로 죽게 되자 다말이 시동생 오난과 결혼을 한 것도 남편 엘의 후손을 잇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25:5-10) 하지만 오난은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소홀히 한 결과 목숨을 잃게 되고 율법에 따라 다말은 유다의 셋째 아들인 셀라와 결혼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과 오난의 죽음은 결국 본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유다 또한 다말을 셋째 아들인 셀라와 결혼시켜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다말 때문이라 생각한 나머지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립니다. 다말이 창기로 변해 시아버지인 유다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은 결코 그녀가 음란해서가 아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아버지를 속인 다말의 행위를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형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다말에게 성경은 그녀의 행위가 옳았음을 인정합니다. 다말이 낳은 쌍둥이 중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 다윗왕이 있고, 그 족보를 통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속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입니까? 유다와 그의 아들들처럼 그 소중한 책임을 소홀히 여겨 응당 받을 복을 걷어차 버리는 신앙의 막장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연약한 입술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삶의 여러 갈래 길 속에서 항상 최선의 것만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주님의 길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걷는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 되게 하시고, 오늘 걷는 이 길이 좁고 험한 길일지라도 그 길이 은혜의 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 없이 헤매던 다말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셔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사오니, 우리에게도 주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지게 하시되 세상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좇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의 첫 주간을 지나며 겸허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기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오니 주님이시여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따르는 삶에 굳건한 믿음 허락하셔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늘 새로운 소망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2 월 15 일 창세기 40 장

<언덕 위의 소리: 운명과 섭리>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규태 씨가 한국인의 운명론에 대한 생각을 기술하며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서양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분수인데 모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있는 것을 서양에서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물을 아래서 위로 올리며 분수를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화는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에 힘을 쏟아 지금의 서양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반면에 동양 문화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서양문화가 분수로 대표할 수 있다면 동양문화의 대표는 폭포라고 하며 물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세상 이치가 음양오행이라는 이치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이치에 순응하고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이것을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기구한 삶에 대해 정말 팔자가 사납거나 꼬인 인생 즉 이것이 요셉의 불행한 운명으로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요셉의 인생에는 필연적인 불행한 운명이라는 표현보다는 요셉의 인생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대가로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 안에서 왕의 신하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불행한 운명 같아도 하나님 안에서는 만남도 문제도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주활/솔즈베리감리교회, MD>

<묵상 기도> 오 주님, 십자가가 당신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는,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긴 터널 같은 어두움이 계속되지만 그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요셉의 고난이 불행의 연속이요 억울함의 연속이요 실패의 연속처럼 보이나 그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늘 함께 계셨고 그의 매 순간에 당신이 늘 인도하셨음을 바라봅니다. 나의 인생에도 요셉처럼 주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계획을 바라보며 당신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아 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애굽으로의 길이, 감옥으로의 길이, 총리대신의 길이었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이, 죽음의 길이 부활의 길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길이, 고난과 역경의 길이 주님이 예비하시는 은총의 길, 축복의 길이 되게 하옵소서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2 월 16 일 창세기 41:1-36

<언덕 위의 소리: 꿈보다 해몽>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습니다. ‘길몽’인지 ‘흉몽’인지는 꿈 그 자체보다는, 꿈을 해석하는 ‘해몽’에 달린 뜻입니다. 해몽이 꿈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해몽이 바뀌면 꿈도 바뀝니다. 사실 해몽은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바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의 꿈은 그의 마음을 번민케 할 만큼 뒤숭숭한 흉몽의 징조였습니다. 이집트 왕궁의 술객도, 박사도 바로의 그 꿈을 해몽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흉년이라는 흉과 화의 해몽을 꺼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꿈꾸는 자’로 통했습니다. 훗날 그는 ‘꿈을 해몽하는 자’로도 불렸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해몽하는 ‘길흉화복’의 기준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믿음의 눈 ‘영안’이었습니다. 요셉은 영안으로 닥쳐올 ‘흉년’이라는 바로의 흉몽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역사의 ‘풍년’으로 대처하는 길몽으로 해몽하였습니다.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은 그렇게 흉몽에서 길몽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로는 그런 요셉을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은 ‘꿈은 사람이 꾸지만, 그 꿈의 실현은 하나님께 있다'(잠 16:9)고 했습니다. 고된 삶의 무게로, 미국 현실의 장벽으로 꿈조차 꾸기 어려운 이민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꿈을 꾸어야 합니다.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시시한 세상살이의 꿈보다는,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믿음이 심령을 번민케 하는 흉년의 흉몽도, 하나님 역사의 풍년의 길몽으로 대처하는 힘입니다. 허투루 하는 말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앞날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꿈을 꾸는 자’, 하나님의 ‘꿈을 해몽하는 자’,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요셉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남성원/슈가힐한인교회, GA>

<묵상 기도> 가물어 메말라 버린 땅이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듯 저희의 마음이 그리도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기에 기대하지도 못할 정도로 황폐해진 마음에 새로운 은혜의 때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시금 은혜의 빗속에서 춤을 추게 하시고, 다시금 은혜의 햇살 아래 땀 흘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근심의 꿈이 아니라 희망의 꿈을 꾸게 하시고, 곧 없어질 세상의 안락함이 아니라 7 년의 흉년 속에서도 버텨낼 믿음의 넉넉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17 일 창세기 41:37-57

<언덕 위의 소리: 공동의 이익을 위한 선물> 우여곡절 많았던 요셉의 삶이 이제 좀 풀리는 듯합니다. 14 마리의 소와 14 개의 이삭에 대한 꿈을 기막히게 풀어내자 바로는 요셉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37 절), 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알아보게 된 것이지요. (38 절). 요셉은 왕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치국의 전권을 부여 받습니다. 서른 살의 잘생긴 청년이, 왕의 병거에 버금가는 수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옥쇄 반지와 금 목걸이를 한 그의 마음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란,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마다 어려운 일을 안겨주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준 채색 옷을 입었을 때도 그랬고, 보디발 장군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도 간수와 시종장의 신뢰를 얻었지만, 생각보다 오래 그곳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뜻밖의 호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본문은, 그가 아들들의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지었다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요셉의 기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권력을 누리고 어깨를 높게 하는 대신,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합니다. 묵묵히 풍년으로 얻어진 먹거리를 저장하면서 어려운 날들을 대비합니다. 그의 비전과 성실함 덕에 이집트의 온 백성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뭄 속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요셉은 잘 나갈 때 더 철저히 마음을 지켰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능력과 권력을, 생명 살리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무릇 은사란 “공동의 이익을 위함” (고전 12:7)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명훈/ 메디슨한인연합감리교회, WI>

<묵상 기도> 하나님 나의 주님, 오늘도 은혜와 사랑에 감격합니다. 처음 믿었던 신앙의 감격을 기억하며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과 처음 믿음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도 처음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어, 행복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도 교회를 세울 때의 설레임과 가슴 벅찬 결심을 떠올리며, 그 열심과 사랑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각 성도들도 주 안에서 서로 세워주고 칭찬하고 섬김으로써, 서로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하게 대단한 존재는 아닌 것을 압니다. 구원을 받은 거기에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매일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주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게 하옵소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신 말씀처럼,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18 일 창세기 42:1-25

<언덕 위의 소리: 옥석> 가나안 땅에 아주 심한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그 기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열 아들을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보내게 됩니다. 곡식을 구하는 틈 속에 있던 형들을 요셉은 한눈에 알아보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려 절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20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애굽 사람들처럼 머리와 수염을 하고, 총리의 의복을 입고 있으니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형들이 과거 자신을 팔아 넘긴 그때처럼 아직도 완악한 모습 그대로인지 알아보기 위해 요셉은 아주 엄한 소리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3 일 동안 옥에 가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종종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확인하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시련과 고난이 닥쳤을 때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지, 절망의 상태가 되어도 하나님을 의심하고 비난하지 않는지를 확인하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혼란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주 큰 시련과 혼란으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멈추면 안 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멈추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과 원망의 죄에 빠져 멸망 당하는 자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저희들을 자녀 삼아 주시고, 주의 백성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 때로는 주의 자녀답지 못하게 살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잘못과 죄를 저지르고 살았던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하신 말씀처럼, 저희 안에 왜곡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사 주의 자녀로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고, 공급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매일 삶의 이유와 사명을 가지고 사는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혹시 우리 주위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그들도 주님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삶의주관자가 되시고, 이유가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19 일 창세기 42:26-38

<언덕 위의 소리: 진정한 용서와 화해> 오늘 읽게 되는 창 42 장에서 화해와 관련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웃 나라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첩자로 오인당하여 고초 당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형제 가운데 한 명을 인질로 잡혀주고 집으로 가던 중에 또다시 자루 속에 있는 돈을 보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먼저 그들 마음속에 드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형제를 이웃 나라에 판 그들이 이제 돈을 보고도 행복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민감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도 아닌데 요셉은 왜 이런 일을 꾸몄고, 또 굳이 동생을 데려오라고 다른 형제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들의 진심을 확인도 하고, 또 베냐민을 포함한 모든 형제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결국, 화해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프로세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강세/그린한인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9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창세기 42 장 26 절 이하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요셉이 노예로 살아가는 그 고난 중에도 그의 부모님과 심지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향하여 변함없는 지극한 사랑을 품고 있음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여 가시는 고난 중에 계시면서도 주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려는 원수들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사랑의 승리를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때때로 제 마음의 텅 빈 공허함은 사랑을 받지 못함이 아니라 바로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섬기는 사랑 대신 이웃을 이용하려는 탐욕으로 가득했던 저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탐욕의 간계가 아니라 사랑의 지혜가 진정한 승리의 능력이 됨을 깊이 심비에 새기게 하옵소서. 저에게도 부모형제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상대방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원수를 위해서 까지 기도하는 주님의 사랑을 품게 하사 참 사랑이 없어서 인생의 갈증과 허기로 고통당하는 이 세상에서 참 된 행복의 씨앗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20 일 창세기 43:1-14

<언덕 위의 소리:야곱의 하나님> 존 비비어는 “임재”라는 책에서, 광야의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 하나님의 응답이 침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대체 어디 계신가요?” 이렇게 부르짖고 싶은 마음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오히려 좌절감으로 바뀌어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비어는, 광야처럼 팍팍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광야의 침묵이 때로는 너무 길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꿈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기억하자며 독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흔적과 하나님의 선물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메마른 광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시간조차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자리로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또한 아무나 허투루 부르지도 않습니다.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부르신 것도 아니며, 광야를 걸으며 때마다 시마다 이슬과 만나를 먹여 주시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세밀하게 속삭이듯이 가르치고 격려하며, 좌절한 마음에 새 소망을 하나씩 말씀하시고, 넘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과 가족들도 요셉과의 재회와 함께 그려질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비전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 위안으로 삼으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김덕건/달라스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TX>

<묵상 기도> 아 목마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셨던 갈증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만나 주시지 않는 것 같은 적막감, 부지런히 예배 드리고 기도 하지만 비어 있는 것 같은 한쪽 구석의 공허함, 응답 하시리라 믿고 간구하지만 기다리게 하시는 초초함, 요셉의 형제들도 그러했겠죠? 주님 야곱의 늦어지는 대답 때문에 모든 가족이 죽게 되었던 상황, 답답함, 초조함, 긴장감, 절망감, 애끓는 심정이야… 우리의 삶에도 종종 일어나는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의 마음, 다가올 앞날을 바라보는 초조함과 긴장감,, 고난을 감당해야만 하는 안타까움과 두려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주님도 피하기 원하셨던 고난과 고통의 순간들 우리 인생에도 피하기 바라는 어두움의 순간들 하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심으로 구원의 십자가를 영생의 부활을 이루어 내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두운 두려움, 초초함, 조급함, 절망감 만을 보지 않게 하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 섬세한 축복의 은혜, 예비하신 주님의 기적 같은 새 길을 만나게 하옵시고 그 안에서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주님은 여호와 이레 주님은 여호와 닛시 승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2 월 22 일 창세기 44 장

<언덕 위의 소리: 유다의 변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먼저 말한 인물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랬던 유다가 지금은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가 특별히 아끼며 사랑하는 막냇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평생 노예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반전인지 모릅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요셉만을 편애한다고 질투하였으나,

이제는 베냐민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와 그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유다의 변화를 통해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다는 실제로 죽지도 않고 노예가 되지도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랑과 죽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진실한 회개와 용감한 사랑의 결단이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의 흐름이 요셉이 아니라 유다로 흘러가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순간 누군가를 대신해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면, 유다의 용기 있는 결단과 그를 통해 크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합니다. 그 선하심으로부터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깊이 맛볼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인생 살이에서 여러 가지 슬픔과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힘 입게 하옵소서.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렸던 야곱의 경우와 같이, 자녀를 잃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아니, 악한 죄인들을 위해 그 선하신 아들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못 박혀 죽은 십자가를 보시며 뼈아픈 고통의 눈물을 흘리셨을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능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옵시고, 그리하여 그 선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거하게 하옵소서. 선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2 월 23 일 창세기 45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이 곳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요셉의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모함에 빠지고, 감옥에 갇히고 또 죽음의 협박에서도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지요. 그 해답을 요셉이 형제들을 만났을 때 하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억울함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45:7-8 절에서 요셉은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요셉처럼 그 섭리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요.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어려움을 마주하는 신앙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우리를 이끌지 모르기에 더 열심히 고민하고, 마음을 성찰하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지금 서 있는 위치가 과연 제대로 된 위치인지 자꾸 물어보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경도 언급하진 않지만, 아마 요셉도 어려움을 겪는 그 모든 순간에서, 수많은 고민과 질문을 가지고 신앙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 신앙의 노력이 계속될 때, 우리도 요셉처럼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될뿐더러, 현재의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되고,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홍종욱/비전교회, MA>

<묵상 기도> 요셉을 미리 부르시고 보내셔서 큰 구원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들에게 보내 주시어서 이 땅에 구원을 허락하시고, 저희들에게 영생의 삶을 보장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들도 주님의 보내심을 깨달아 이 땅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요셉이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할 수 없다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선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 하루의 삶이 요셉의 삶과 같이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구원으로 이끄는 자녀로 예비된 삶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2 월 24 일 창세기 46 장

<언덕 위의 소리: 흔들림의 여정> 성경에서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합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여정이나, 그의 이야기 중 유난히 길 한가운데서 겪는 일들이 많은 것은 그의 질곡 많은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 야곱이 노년에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간절히 다시 만나기를 원했던 아들 요셉이 기다리고 있는 애굽이었지만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첫 말씀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3 절). 뒤집어보면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며느리들을 제외하고도 야곱과 함께 내려간 식구들의 수가 육십육 명이니 대장정의 여정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안주하려는 속성이 커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진 풍파를 견뎌낸 세월을 뒤로하고 노년에 다시 한 번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야곱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키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개인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민족을 향한 그 큰 그림은 개인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손길을 통해 안내됩니다. 두려워하는 그 여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내려갈 것이고, 당신의 인도 하심 속에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거기 내려가면 요셉이 네 눈을 감겨줄 것이라고 야곱을 안심시킵니다(4 절). 이 약속은 벌써 오래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시 한 번 위험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에 안주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일은 늘 불안한 흔들림의 연속일 겁니다. 두려움과 좁은 시각의 뒤에는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듣고 붙들 수 있다면 그 흔들림도 신나는 모험의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치용/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인생 속에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주시고, 함께 울고 웃으며 인생을 같이 살아낼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을 축복하셔서 귀한 만남의 복을 더하시되 예수 그리스도와의 복된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남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하루하루 이어지는 만남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믿는 이의 본을 보이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 1 서 4:7-8)라는 말씀처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2 월 25 일, 창세기 47:1-19

<언덕 위의 소리: 다리 위에서> 요셉의 꿈과 해몽, 험난한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 사랑, 이집트 총리가 된 후 다시 만난 가족 이야기는 어린이는 물론이요, 어른들에게도 감동을 준다. 그런데 요셉의 여정 가운데 주석을 찾아봐도 뭔가 석연치 않고, 교회력상의 성서 일과에도 빠진 부분이 있다. 바로 야곱과 요셉의 감격스러운 상봉 이후에 등장하는 창세기 47 장 중반부다. 이집트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바로 왕은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영민한 요셉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백성들의 밭을 사들이고, 자유인들을 노예로 만든다. 구약학자인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따르면 요셉은 결국 먹거리와 생명을 담보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노예로 만드는” 황제의 충신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셉의 능력을 인정한 바로의 배려로 기근 속에서도 잠시 풍요를 누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훗날 이집트의 노예로서 고통을 당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는 장면과 만나는 이야기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지평을 연결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또한 변화산의 여정처럼 교회력 상의 주현절과 사순절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 다리 위에서 말씀을 묵상할 때, 순간의 영광이나 풍요로움을 넘어 고난 속에서도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된다. 주현절과 사순절이 만나는 2 월이다. 하늘 영광과 초막 셋의 유혹을 뒤로하고 가장 빛날 때 내려가신 주님, 내려가는 길을 걸을 때 가장 빛나는 삶인 것을 보여주신 주님의 뒤를 따라 걸으며 세상에 부활생명의 은혜를 나누는 달이 되면 좋겠다. <선우혁/시온감리교회, RI>

<묵상 기도>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어 가족들과 애굽으로 피나온 야곱의 고백과 같이 인생의 여정이 “험악한 세월” 이었음을 또한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때론 잠시 머물다 가는 애굽 땅의 풍요로움이 좋아 이 땅의 허무함에 대해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들을 놓칠까 봐 안달하는 두려움이 감사함의 넉넉함으로 바꿔 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세월의 험악함 앞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름 받은 소명을 또한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한숨 쉬지 않게 하시고, 움찔하지 않게 하시고, 눈 돌리지 않게 하시고, 성령을 들이 마시듯 큰 숨 한번 깊이 들이 쉬고,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자녀들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남편과 아내를 향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월의 험악함 속에서도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2 월 26 일 창세기 47:20-31

<언덕 위의 소리: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이라는 책을 보면, 20 세기 초인 1914 년경 비슷한 시기에 두 척의 배가 얼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극과 북극을 각각 탐험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두 배 모두 큰 얼음인 빙산의 벽에 갇혀 배가 꼼짝 못 하다가 배가 부서져 침몰하게 됩니다. 캐나다의 스테팬슨이라는 탐험가가 이끈 북극 탐험대는 얼음 속에 고립된 지 수개월 만에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들로 변해버립니다. 북극의 추위 속에서 살기 위해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둑질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11 명의 대원 모두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얼음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나 역시 빙벽에 갇힌 영국의 섀클턴이라는 탐험가가 이끈 남극 탐험대는 27 명의 대원 중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그것도 2 년이 다 되는 634 일을 얼음 위에서 표류하다가 전원 살아 돌아옵니다. 섀클턴의 탐험대는 혼자 살겠다는 이기심 대신 전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 희생정신과 팀워크,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독서, 축구, 체스 등을 하며, 2 년여의 얼음 속 생활을 즐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생존하여 귀환한 후 한 대원은 이처럼 이야기합니다. “처절한 시련을 겪은 우리 남극 탐험대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애굽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총리인 요셉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었나이다.” 섀클턴과 요셉의 공통점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섀클턴은 생존과 귀환을 확신했고, 요셉은 자기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개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고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가 되시길… <이영성/LA 복음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를 눈동자와 같이 귀히 여기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진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사순절에 주께서 친히 오르신 골고다 언덕의 길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게 된 것을 기억합니다.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에라도, 고통스럽게만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저희들, 고단한 인생길이지만,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상황과 환경을 탓하는 것보다는 모든 고단함과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보람과 기쁨과 감사가 있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 주변에 질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만져 주시고, 질병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또한 삶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힘든 일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잘 감당하고 이기게 하옵소서. 또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10) 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주의 뜻을 위해서 살다가 어려운 일 당해도 기쁨으로 극복하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게 하시며, 저희의 마음속에 간절히 원하는 기도의 소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게 하시고, 주의 영광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2 월 27 일 창세기 48 장

<언덕 위의 소리: 믿음의 유산> 야곱이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마지막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의 즐거움은 많지 않았다. 결국 부(富)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안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 세상의 부(富)가 축복인 줄 착각하며 그의 이름처럼 악착같이 움켜쥐었던 삶을 살아왔던 야곱,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과 원수가 되었으며, 교활한 장인과 속고 속이는 삶으로 맞서며 성공이란 허상을 좇으며 살아왔던 야곱.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이제 오직 세상의 성공과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섭리에 순종하는 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을 그의 살아왔던

험악한 세월을 온몸으로 자녀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손을 좌우로 바꾸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손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야곱의 최후가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이런 믿음의 유산을 줄 수 있는 부모였으면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윤국진/와싱톤한인교회 센터빌캠퍼스, V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벌써 16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창세기 48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이삭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여 자손들을 위한 축복 기도와 그 결과를 묵상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여 가시는 중에도 제자들을 위해 드리셨던 간절한 기도와 겟세마네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또한 세상을 바꾸어 놓으신 주님의 그 기도의 능력을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분주했던 삶을 되돌아 봅니다. 동분서주하며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뛰었지만 빈손으로 허탈함에 빈 그물을 거두어야 했던 그 무능력의 원인은 다름 아닌 바로 진실한 기도가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제 자신의 능력으로 소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던 허황된 교만함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이제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도 소중히 여기신 기도의 신비와 능력을 깊이 깨달아 심비에 새기에 하옵소서. 저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진정 어린 기도를 드리는 참 기도자가 되도록 매일 매일 저의 영을 깨우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기도의 능력으로 사단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2 월 29 일 창세기 50 장

<언덕 위의 소리: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사람들이 욥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욥기 42:12 절에 나오는 대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받았다는 부분이 아닐까요? “고난과 시련을 잘 참아내면, 삶의 마지막에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해피엔딩(?)은 누구나 원하는 결말이기에 사람들은 이 부분을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욥이 받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욥이 겪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1:12)”,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2:6)”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과 이후에 몸을 맡기셨지만, 마지막까지 “생명”은 맡기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남은 생명을 기반으로, 몸이 회복되고 새로운 재물의 축복을 받은 욥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떠올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인간은 “호흡(생명)”만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셨기에, 욥은 새로 얻은 자녀들에게도 거룩한 삶을 가르쳤을 겁니다.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의미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일단락되었고, 욥을 통해서 결국 그의 자녀들과 우리에게 당신의 새로운 계획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50 장에서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하나님 계획의 1 막이 끝나지요. 이삭이 죽고 요셉도 죽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의 사명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는 나이가 차기까지 후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고 증거하라고 전합니다: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며 스스로의 사명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믿음의 삶이 됩니다. <배연택/찰스톤한인연합감리교회, SC>

<묵상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그 사랑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이 죄악 가운데 멸망 당하는 것을 절대 기뻐하시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엄중하게 심판하시지만, 영원토록 죄인을 향해 진노를 품고 있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용서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안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이 사랑의 용서를 받은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살게 하옵소서. 요셉이 그 형제들을 용서했듯이, 우리도 기꺼이 용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기꺼이 용서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그 용서하시는 사랑의 능력을 깊이, 그리고 뜨겁게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능히 용서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리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언제나 선으로 악을 갚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1 일 로마서 1 장

<언덕 위의 소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알다시피, 바울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학파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행 22:3), 로마의 시민으로서 헬라 철학을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앞에서 그는 그의 화려한 이력을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을 가리켜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오직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일만 하기로 결심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도 감사함으로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바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란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로 고백하며 결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언제 어디서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진정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간이 가장 축복의 시간임을 주님, 고백합니다. 가진 어떤 재물보다도 가진 어떤 재능보다도 가진 어떤 학식보다도 가진 어떤 명예보다도 가진 어떤 권위보다도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일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일이 가장 귀하고 가장 복됨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처럼 나는 매일 죽고 예수는 매일 내 안에 살아 있음을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의 삶에 교만이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가식이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허위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살아있는 자아가 사라지게 하시옵소서 다만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살아 있게 하시고 우리 안에 죄의 종은 죽고 의의 종은 살게 하시고 우리 안에 순종이 자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자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감사와 찬양이 자리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사도 바울의 주인이 되시듯 주님, 나의 주인이 되어 주셔서 언제나 주님 안에서만 행복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만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자만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옵시고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매 순간의 삶에서 꼭 기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죽기를 원하오며 살아계신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3 월 2 일 로마서 2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 명탐정 ‘셜록 홈즈’를 쓴 영국의 소설가 아더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어느 날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 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당신의 모든 것이 밝혀졌다. 지금 곧 비행기를 타라” 였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유명인사 12 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드러나지만 않을 뿐,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온전해질 수 있는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집이 생기고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1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연인들이었다면 2 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졌던 마음이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아닌지요? 신앙 안에서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옳은 것이 죽어도 옳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누구나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특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판단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 판단은 자신을 판단하는 결과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진리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인내로써 선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 자신도 항상 저들과 동일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입니다. <홍성국/몽고메리주님의교회, AL>

<묵상 기도> 죄인 된 저희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형편을 체휼하시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오늘 하루의 삶이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확증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계획되고 이루어지는 일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삶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족들, 이웃들을 대할 때에 그들을 판단하며 정죄하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삶의 형편을 돌아보며 품어주며 주님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되는 삶을 오늘도 살아가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3 일 로마서 3 장

<언덕 위의 소리: 믿음의 안전운전> 자동차를 운전하시는 분들에게 ‘가장 운전하기 위험한 계절이 언제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그야 물론 겨울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로에 쌓이는 눈과 아침에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운전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2010 년 미네소타 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운전하기 가장 위험하고 사고가 많이 나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합니다. 특히 휴가철이 몰려 있는 미국 독립기념일은 일년 중 가장 운전하기 위험한 때라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 도로 위의 많은 휴가 차량과 그들의 음주로 인한 난폭 운전이 겨울철 빙판길과 눈보라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통계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믿고 있는 것과 실제 사실(진실)은 때때로 다를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과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성경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신앙 생활을 수십 년 해온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로 위의 운전자들이 사고를 막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항상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는지 확인해야 하며, 그래야 영적인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도우심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가 이루어짐을 믿는다면, 믿음의 안전 운행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편집부>

<묵상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정의와 사랑과 겸손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사오니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증거되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 때 높아지려는 마음을 낮추시고, 나서려는 마음은 감추시고, 드러내려는 마음은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분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시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소요가 하나님을 향하는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겸손히 주님의 길을 걷는 인생들을 축복하셔서 삶의 문제가 주의 뜻 안에서 해결되게 하시고, 죄에 얽매인 인생이 주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이를 정죄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용서하고 이해하므로 화목하게 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4 일 로마서 4 장

<언덕 위의 소리: 의로운 믿음>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란 아브라함이 어떤 선한 행동을 먼저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기에 의롭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을까?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자손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것이 의로움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본다. 우선,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상대방을 적당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적당히 의존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려움이 찾아오면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님을 완전히 백 퍼센트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존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기다림이다. 그의 기다림은 육 개월, 일 년, 이년 정도가 아니라 35 년이라는 긴 시간을 참아내고 인내해 온 기다림이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시간이 주는 인내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이 짧은 시간에 끝난다면 누구나 이를 악물고 견딜 수 있다. 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거나, 아니면 끝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끝난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장사가 없다. 다 포기하거나 기권하기가 쉽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이럴 때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이렇게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끝까지 기다리며 참아내며 견뎌냈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의로움이었다. <김진철/멤피스한인연합감리교회, TN>

<묵상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 같은 죄인을 의롭다 불러주시다니요? 안과 밖을 살펴보아도 보여드릴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제 안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믿음을 보시고 저를 의롭다 불러주시다니요?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고향집이라도 떠났고, 100 세때 얻은 아들을 제단 위에 바칠 마음이라도 먹었다지만,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힘겹게 달려있는 제 믿음이 저를 의롭다 선포하시기에 충분하다니요? 그렇게 넉넉히 보아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저의 재산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저의 가족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아니면 저의 생명을 드리면 충분할까요? 사라의 태처럼 메마른 마음에 이제 겨우 작게 돋아난 믿음을 충분하다 하시는 주님, 내 모든 것 드려 감사드립니다. 내 모든 것 드려 찬양합니다.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5 일 로마서 5 장

<언덕 위의 소리: 희생양과 속죄양> 그리스도 예수 한 사람으로 인한 화평의 선물이 온 누리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의로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희생양이었고, 결국은 온 인류의 은혜를 위한 속죄양이 된 것이지요. 많은 양을 사육하는 농장 주인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손님이 방문하거나 명절이 돌아오면 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잔치하였습니다. 어느 날 농장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양들은 낯선 발걸음 소리를 듣고 이미 난리가 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인이 울안으로 들어와 양 한 마리를 잡아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양을 주인 앞으로 밀쳐내서 주인의 손에 잡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벌써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얄미운 녀석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잘날척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 양들에게 배려하지 않는 그 놈이었습니다. 늘 왕따를 시킨 녀석이 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이 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휙 둘러보았습니다. 양들은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몰리면서 한쪽 구석으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못마땅한 그 한 마리 양을 밀쳐냈습니다. 왕따를 당한 양은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주인이 울안에 들어오자 울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손에 잡혔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지요. 언제인가는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희생양이 우리를 살게 하는 속죄양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선영/덴버연합감리교회, CO>

<묵상 기도> 단 한 사람!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 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만이 나의 구원의 통로임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사랑 없이는 우리는 세상의 환난을 견디지 못함을, 당신의 위로 없이는 우리는 세상의 고초를 감당 할 수 없음을, 당신의 동행 없이는 다가올 소망의 길로 나아갈 수 없음을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주님 없는 나는 없고 주님 없는 의는 없고 주님 없는 기쁨은 없음을 우리가 믿기에, 연약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 순간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 사랑! 바로 그 사랑! 내가 받았사오니,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사오니, 나도 그 사랑! 바로 그 사랑! 이웃과 나누기 원합니다. 나의 영혼에 사랑이 가득하게 하소서. 주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화평을 이루고, 평화를 만들고, 천국을 만들게 하옵소서.

한 사람이 모든 이들을 죄인 되게 하였고, 한 사람이 세상에 구원의 기쁨을 가져 온 것처럼, 나도 그 한 사람!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기쁨의 통로 되게 하시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은혜의 통로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3 월 7 일 로마서 7 장

<언덕 위의 소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법> 불결한 마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래 깨끗한 마음에 어떤 다른 것들이 섞였을 때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음란, 미움, 교만, 거짓, 위선, 불평, 불만 이러한 죄악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입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말이 되고, 행동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1 서 1: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순수한 것을 받아 냅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소멸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얻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하며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그 때에 우리 마음속에 큰 은혜가 임하며, 성령의 불로 더러운 생각을 태워 버리며,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으며,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주님께 내려놓을 때 그 분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청결케 하십니다. <정건수 목사님 칼럼에서/디트로이트중앙연합감리교회, MI

<묵상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오래 전에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심하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얻는 일에 분주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는 일에는 게으르면서도, 육체의 건강을 위해 온갖 힘을 쏟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큰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작은 일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때에는 자기 만족에 겨워 기뻐하면서도,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원망과 불평 속에 주저 앉습니다. 여전히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게 하옵시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겸손히 무릎 꿇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8 일 로마서 8 장

<언덕 위의 소리: 성도를 위한 성령의 사역> 성도의 성화는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얻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성도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양자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시며,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 이동규/밸리연합감리교회 & 밸리중앙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저희 죄를 사하시고, 죽음에서 건져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죄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저희를 한 없는 은혜로 감싸 안아 살려 주시고, 실수 투성이의 저희를 버리지 아니 하시며, 오히려 그 실수와 잘못도 다 거두어 은혜의 기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거름이 되게 하시는 주님, 그 변치 않는 사랑과 놓치 않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정 아무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저희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한 없는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 오늘도 그 변치 않는 사랑을 향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 하오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으로 주님의 손 놓치 않고, 꼭 붙잡고 나아가는 저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3 월 9 일 로마서 9 장

<언덕 위의 소리: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국에 살 때 보았던 세계지도는 한국이 중심에 있는 지도였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지도책에 나오는 세계지도는 유럽이 중심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세계지도를 미국에서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양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미국이 중심에 있긴 하지만 아시아 대륙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지도도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남과 북이 뒤집어진 세계지도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호주 중심의 세계지도입니다. 북쪽이 지도의 맨 위가 아니라 남쪽이 지도의 맨 위가 된 세계지도, 우리 생각에는 세계가 뒤집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남반구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각자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바라봅니다. 21 세기 포스트모던시대에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다 맞는다고 생각할 수 도 있고, 또 반대로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모두 다 틀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떤 각도에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을까요? 지도를 바라볼 때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물, 사건, 사람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데, 과연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도 세상의 관심과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류계환 목사님 칼럼/미네소타복음연합감리교회, MN>

<묵상 기도>

주님, 저희 마음에도 사도 바울과 같은 큰 슬픔이 있습니다. 이 슬픔은 고향 땅에 있는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저희 마음에 차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저희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주시고, 지난 수 십년 동안 참으로 불같이 주님의 교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교회라는 칭찬을 받았고, 성급한 사람들은 “새로운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다!” 설레발 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지금의 한국 교회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혼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교회가 영혼의 등쳐먹었다는 이야기에 묻히고, 교회가 사람들을 섬기는 이야기는 섬김을 받아 목이 곶은 백성이 되었다는 비판에 묻혀버렸습니다. 더 이상 죄인들은 교회를 찾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은 교회에 마음을 열지 않으며, 길을 잃은 사람들은 교회에 길을 묻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도 주님의 긍휼과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맞길 때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주님, 저희 한국 교회를 주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니, 우리를 구원하여주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주소서.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0 일 로마서 10 장

<언덕 위의 소리: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막 10:17) 그는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성도’였습니다. 젊고 부유했으며, 집안도 좋았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게다가 신앙적인 열심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 10:2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제자로 부르실 때마다 이처럼 ‘전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을 만한 분인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 중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예수를 주로 시인”(9 절)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분이 내게 진정한 ‘주님’(믿고 따를 만한 분)이 되시도록 하려면, 내게도 ‘예수님이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을 만한 분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의”에 빠져있는 믿음 없는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내 선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약속의 말씀’으로 실현되는 것”(파미라 리브, 『믿음이란』)임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혁재/탈라하시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때로는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가 주의 뜻 가운데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순례길을 걸으며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는 말씀에 힘입어 주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복음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옵소서. 삶의 형편마다 함께 하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루하루가 소망의 날이 되게 하시며, 믿음을 보이며 사는 귀한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11 일 로마서 11 장

<언덕 위의 소리: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는 것> 1988 년 4 월 어느 날 저녁, 미국 전국 뉴스 시간에 안타까운 소식 하나가 보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에서 창공을 향해 뛰어내리는 스카이다이버들을 촬영하려고 구름 속으로 함께 몸을 던진 카메라맨(그 역시 스카이다이버였음)이 멋진 촬영은 하였지만 제시간에 자신의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하강하여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스카이다이버들을 촬영할 일에 정신이 팔려 카메라는 잘 챙기고 비행기 밖으로 나왔지만 정작 자기 비행을 위한 낙하산은 깜박 잊고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던 것입니다. 저녁 시간에 이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마감 논평을 합니다. “그에게 있었던 수십 번 낙하산 타기 경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 자신의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바로 그것을 휴대하지 않았을 때 그는 결국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여정 가운데 항상 지니고 살아야 할 것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접 붙여지게(연합)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늘의 기쁨, 영생을 맛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믿음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 세상에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었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롬 11:20, 새번역) 유대인들은 이 믿음을 갖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듣고 율법을 지키려고 그토록 애를 썼지만 정작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갖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 안에서 누릴 구원의 은총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1 장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합니다.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주님 안에서 접붙임 받아 살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을 주고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게 하는 이 은혜의 선물은 누구로부터 계속 공급받을 수 있나요?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주함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됩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황헌영/남부시카고한인연합감리교회, IL>

<묵상 기도>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새롭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순수한 뜨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이라도 느껴 내 안에 차갑게 식어버린 그 사랑에 불을 지르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했던 그 이가 어느새 나보다 훨씬 더 자란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을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에서라도 힘을 받아,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만 한 걸음이라도 옮기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나보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주님, 저에게 질투심을 주십시오. 질투심에라도 이끌려 “내가 가진 것 중 영원한 것은 없다!” 한번이라도 선언하고 싶은 까닭이니 주님, 저에게 질투심이라도 주십시오. 질투심에라도 이끌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부유하심이 사람의 부유함 보다 크고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보다 넓으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까닭이니 주여, 질투심이라도 주셔서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2 일 로마서 12 장

<언덕 위의 소리: 산 제사의 영향력> “여러분들이 믿는 신(하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 보려고 합니다.” 일 년 동안 이곳에 교환 교수로 오셨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 내외의 인사말이었습니다. 낯선 지역에서 외로워 일본인 커뮤니티를 찾다가 교회에 나오시게 되셨습니다. 짧다면 아주 짧은 기간 함께 교회생활을 하신 것인데, 그것도 학회와 여행 등으로 주일예배는 많이 참석하지 못하였었고 성경공부나 기도회 모임에도 거의 오지 못하셨었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드린 성경책도 주일예배 때만 펴 보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면서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무엇이 무관심했고 거리를 두려고 했던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바꾸어 놓았을까 놀랍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롬 12 장이 권면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예배 드리기’에 애쓰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 그리고 작은 일에도 십시일반 나누고 도우려고 하는 손길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분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신들도 믿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희생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라면, 생활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증거 되는 예배입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과 물질과 시간과 관계의 즐겁고 기쁜 희생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삶으로 예배 드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미가 6:6)”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김동기/로체스터한인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죄악된 세상에 육신을 입고서 오셨지만 죄와 흠이 없으셨던 주님, 하지만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과거의 죄된 습관과 이 세대의 악한 모습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된 모습을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여 주시며, 우리의 삶을 산 제물로 당신에게 드리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분별하여 결단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며, 우리 주위에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이들을 축복하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과 더 불어 화목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14 일 로마서 14 장

<언덕 위의 소리: 중심이 보이면 큰 믿음이다> 술 먹는 사람 봤을 때 ‘저거 아직 멀었군!’ 하는 마음 든다면 내 믿음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저렇게 쓴 걸 마시는 저 마음 참 아프겠구나’ 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반대로 술 먹지 않는 사람 봤을 때 ‘저렇게 유치하게 믿다니!’ 하는 마음 든다면 내가 유치한 것입니다. 대신 ‘저토록 믿음의 결의가 확고하구나!’ 하면 큰 믿음입니다. 무엇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했다 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것입니다. 대신에 내 안에 주님께서 이루신다 해야 큰 믿음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님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김호진/올랜도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평화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교회를 세우셨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서로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 안에 불화와 시비와 다툼과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평화를 해치는 인간의 헛된 자랑, 시기와 미움과 더불어, 교만과 자만과 거만과 오만을 버리게 하옵소서. 악한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게 하옵시고, 그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옵소서. 오직 일치된 믿음으로, 일치된 순종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바 된 우리 모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가게 하옵소서. 아무리 무엇을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믿음의 형제. 자매에게 거침돌이 된다면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게 하옵소서. 무엇이든지 교회의 평화를 위해, 덕을 위해 행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얼마든지 불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시고, 언제나 감사하는 말, 칭찬하는 말, 친절한 사랑의 말로써 교회의 평화를 굳게 지켜 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로써 화목하게 하신 평화의 왕,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15 일 로마서 15 장

<언덕 위의 소리: 사막에서 샘물을 찾아내는 사람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해결하면 되는 삶의 과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젯거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인도 캘커타 빈민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많아지면서 함께 일하던 젊은 수녀들이 “문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라고 할 때 “문제(problems)라고 말하지 말고 선물(presents)이라고 말해 보세요.”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신이 도와줄 수 없는 10 명의 사람들’(10 People You Can’t Help)이란 글에서 Joseph Mattera 는 자신들 스스로가 삶의 태도를 바꾸어 발전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돕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이런 도와줄 수 없는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사람들과 관계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고 감추는 것이 많은 사람, 부정적인 인생관을 고집하는 사람, 미래에 대한 비전을 거부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 발전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 교회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그리고 겸손하지 않고 양심 없고 거짓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발전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인가요? 당연하게 자기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 하나님 찾기를 목말라 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사람과의 건강한 교제를 하는 사람,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 미래 비전을 가진 사람, 정직한 사람,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겸손하고 양심 있고 참된 사람입니다. ‘노인과 어르신의 차이’라는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를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좋은 덕담을 해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 체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르신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알아도 모른 체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이제 배울 것이 없어 자기가 최고인양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믿음의 삶이란 사막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샘물을 소망하고 찾아내는 것입니다. <김정호 목사님 칼럼/후러싱제일교회, NY>

<묵상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 하루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없이 온전히 살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지혜와 깨달음과 실천력을 주시옵소서. 이 세상 사는 동안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살다 보면, 비천에 처할 때도 있고, 부활 때도 있고, 연약할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기쁨과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만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라고 하신 말씀처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굳센 믿음으로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향기를 지니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는 전하는 메신저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고 싶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감히 소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로운 말과 행동으로 대하는 덕스러운 모습, 다른 사람을 살리는 소금과 같은 모습, 일상생활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저희에게 힘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3 월 16 일 로마서 16 장

<언덕 위의 소리: 거룩한 입맞춤> 로마서 16 장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로 보통 짧은 축복 기도로 끝맺는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아주 긴 인사말로 마무리한다. 바울은 “문안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인사말을 15 번이나 반복하며 26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한다(3 절, 5 절, 6 절, 7 절, 8 절, 9 절, 10 절, 11 절, 12 절, 13 절, 14 절, 15 절, 16 절, 22 절, 23 절).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울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들이고( 5 절, 9 절),그리스도 안에서 인정 받은 자들이며(10 절), 주님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이고(12 절), 그리고 주님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다(13 절). 이들 가운데는 뵈뵈(1 절), 브리스가(3 절), 유니아(7 절)같은 여성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로마서 16 장의 긴 마지막 인사말은 로마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의 끈 안에서 주어진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를 위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지지와 헌신을 얻기 위해 쓰인 로마서의 중심주제와도 부합한다. 바울의 이러한 의도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16 절)라는 마지막 인사말 잘 드러난다. 거룩한 입맞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깊이 있는 연대를 가장 잘 표현한 인사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간의 거룩한 입맞춤은

거룩한 삶에 동참한다는 다짐으로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노예, 자유인, 유대파 기독교인, 헬라파 기독교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초대교회의 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갈 3:28;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초대교회는 육체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사명을 함께 감당하였던 것이다. 거룩한 입맞춤은 율법 아래의 차별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의 복음을 표현하는 인사법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배시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평화의 인사는 성도들 사이의 화해에 초점을 둔 것으로 “안녕하세요?”라는 개인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등의 표현이 적절하다. 세상의 모든 장벽을 넘어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교파와 신학을 넘어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진양/ Creston/Steward UMC, IL>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지 벌써 31 일째입니다. 오늘 주신 로마서 16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복음의 비밀을 알고 복음의 능력으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선진들과 그들의 창조적 삶의 능력이 바로 사명에 이끌려 가는 종의 삶에 있었음을 묵상하며, 죄와 사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거룩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시는 주님을 묵상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봅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제 삶의 현장인 가정, 교회, 일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았던 그 이유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것은 제가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부인하여 값싼 은혜만을 추구했던 저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고 그 능력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창조적 삶의 능력이 됨을 깊이 심비에 새기게 하옵소서. 더 이상 값싼 은혜를 구하지 않게 하옵시고, 저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사명에 이끌려 가는 삶과 종의 삶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3 월 17 일 고린도전서 1 장

<언덕 위의 소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회>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영적인 도전은 성도들 간의 분열과 갈등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다양한 의견 차이와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담임 목회자들의 잦은 이동, 성도들의 다양한 신앙적인 성향 및 의견들은 분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 개의 신앙적인 계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고린도 교회를 창립한 바울 파였습니다. 창립 파들은 바울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첫사랑과 좋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고 교회의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아볼로파 계열의 엘리트 그룹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문이 높은 학자 타입의 목회자였습니다. 헬라 철학에 능하고 교리와 성경을 희랍철학으로 해석한 사람이었습니다. 웅변을 잘하고 설교를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잘 하는 훌륭한 설교가였습니다. 이러한 학문적인 목회자에게 영향과 훈련을 받은 엘리트 그룹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면서 유대인들의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순교의 믿음 위에 신앙의 기초를 세운 전통적이고 유대적인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보다 사도 베드로의 권위를 더 높이 인정했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파 사람들입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이며 상업도시로서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서로의 다양성과 차이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함께 나눌 때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용연/미드허드슨한인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십자가! 우리가 자랑할 단 한가지 십자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오직 유일한 능력… 하지만 주님,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고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는데 늘 뒷걸음치는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믿음의 사람을 주님이 원하시고, 우리가 꿈꾸지만 늘 책망 받을 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주를 섬기며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게 해야 하는데, 늘 분파를 만들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고 우기며,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약한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지만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십자가 밖에 의지할 것 없어 십자가의 능력 아니면 이길 힘이 없어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 놓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패배로 보이나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어리석은 결정처럼 보이나 믿는 우리에게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인 것처럼 불신자에게는 십자가가 약함의 상징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강한 하나님 은혜의 통로인 것처럼 오직 주님만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이시고 힘이심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미련함이 지혜로움을 이기며, 천한 것이, 멸시 받는 것이, 없는 것이, 있는 것과 세상의 스스로 귀하다고 하는 것을 이김을 십자가가 죽음을 이김을

죽음이 영생을 가져옴을 순종이 구원을 이룸을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그 십자가를 내가 지게 하옵소서 그 십자가를 내가 붙들게 하옵소서 그 능력의 십자가를 내가 믿게 하옵소서 그 보혈의 십자가를 내가 체험하게 하옵소서 약한 죄인을 온전함과 강한 믿음으로 이끄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그리고 세상의 약한 자리, 십자가가 필요한 곳에 나의 십자가를 세우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동수/한미연합감리교회, CO>

3 월 18 일 고린도전서 2 장

<언덕 위의 소리: 은혜의 줄> 저는 성만찬 예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The Lord’s Table is ready, Come, not because you are worthy, but because you are invited.”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격을 묻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가 풍성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8)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노력한 것만큼 얻으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노력한 것만큼만 얻고 누리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수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과 재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연이 줄로 연결 되어 있어야, 땅에 떨어지지 않듯이, 우리들의 삶도 얼핏 보기에는 잘 나르는 연과 같이 공중에 저절로 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매어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줄로 연결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8 장에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여 있는 복된 성도들입니다. 은혜의 줄로 항상 우리를 묶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저 멀리 창공을 훨훨 날아가게 하여 주시며, 독수리와 같이 날마다 새 힘으로 날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안명훈 목사님 설교/아콜라연합감리교회, NJ>

<묵상 기도> 아버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지혜란 무엇인가요? 알고 싶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것을 모르게 만들 수도 있겠군요. 왜냐하면,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면,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하면 그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인가요?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요. 그렇게 믿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까닭은 제 안에 “사랑하는 것으론 지혜를 얻기에 충분치 않다.” 말하는

또 다른 사람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손에 든 무기는 비교. 이 사람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은 열등. 그리고 이 사람 나에게 만들어내는 것은 극성. 비교하면 부족하고, 부족하면 쪼그라들고, 쪼그라들면 채우려고 극성을 부리니 사랑하면 지혜를 주신다는 그 말씀, 믿고 싶으면 믿고 싶은 만큼, 끌어안고 싶으면 끌어안고 싶은 만큼 제 마음을 아프게 파고 듭니다. 용기를 주세요, 아버지.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사랑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으로만 얻어지는 지혜가 저에게 충분할 수 있도록… 오늘도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아버지! <한명선/요벨교회, NJ>

3 월 19 일 고린도전서 3 장

<언덕 위의 소리: 사람으로 인해 소중한 교회>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은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일 또한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실족하고 갈등하고 고통받다 보면 삶의 보람과 기쁨,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인해 치유됩니다. 사람 때문에 흘린 눈물과 받은 상처는 삶의 가장 소중한 일부분이고 행복의 작은 씨앗임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22 년전 미국에 유학 와서 이민목회현장에 뛰어든 지 16 년이 넘도록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면서 한 영혼을 섬기는 보람과 기쁨, 교회가 부흥되어 성전 건물을 구입하여 입당 예배를 드렸던 영광스러운 순간들, 교우들을 떠나 보내야 했던 아픔의 순간들, 수많은 행사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던 희노애락의 목회여정가운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보화는 돈이나 건물이 아니요 학위도 명예도 아니요 일의 경력도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남,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오직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을 확장하려는 시도 이전에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세우는 곳, 사람을 남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서바이벌(Survival)공동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몸(Body of Jesus Christ)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 장 40 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메마른 세상에 생명을 주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할 때(Donation)항상 어린 자녀들의 손을 통해서 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도 장미꽃을 건네준 사람의 손에는 장미향이 남는다는 것을 기억하며 깨어진 인간관계로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 세대에 2000 년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말씀들을 다시금 가슴에 되새기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 소중한 ‘님’, 소중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인 까닭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구원자로, 치유자로, 중보자로, 성육신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까닭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지상에 남기신 주님과 꼭 닮은 ‘분신’이고 예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재웅/롱아일랜드연합감리교회, NY>

<묵상 기도> 구원의 하나님,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오신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자녀스럽지 못하고, 죄와 허물로 가득 찼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려고 결심을 해봤지만, 의지가 약하고, 교만하고, 욕심과 고집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반복하여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저희에게 주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고 있음을 잊지 않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 삶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미지의 땅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았던 것처럼, 저희도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주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길과 진리와 생명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장학범/그레이스연합감리교회, NJ>

3 월 21 일 고린도전서 6 장 (Holy Week)

<언덕 위의 소리: 먼저 사랑할 이유> 거의 다섯 살 터울의 딸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둘이 서로 장단이 잘 맞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기도 합니다. 언니는 언니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고 동생은 동생이라서 불만입니다. 그런데 둘이 말다툼을 하다가도 한순간 사이 좋은 자매로 돌변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가 먼저 마음을 바꿔 먹을 때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언니 좋아’ 하고 말을 한다거나, 언니가 먼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언니가 놀아줄까?’ 하고 말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 좋은 자매가 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미움의 싸이클에 들어가면 그 싸이클을 먼저 깨고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먼저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미움의 싸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사랑의 말을 들은 후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미움의 싸이클 속에서 먼저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란 미움의 싸이클 속에 있으면서도 ‘먼저 사랑할 이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죄인이 되어 저주의 싸이클 속에 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미움의 싸이클 속에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먼저 사랑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먼저 받은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미움의 싸이클을 깨고 먼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먼저 사랑하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미움의 싸이클은 금새 사랑의 싸이클로 변화됩니다. 상대의 표정과 입술만 바라보며 사랑할 이유를 찾는 사람은 미움의 싸이클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대로 희생양이 되어 안타까운 결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먼저 시작된 사랑의 줄기에 반응하며 사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평의 시작이 되고,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하는 평화의 도구가 됩니다. 맡기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서 반복되는 미움의 싸이클을 거절하고 사랑의 싸이클을 시작할 수 있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선형 목사님 칼럼/시카고예수사랑교회, IL>

<묵상 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화로우심을 사모하며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죄악의 더럽고 누추한 옷을 벗기시고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겨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은 오늘의 세상 속에서 육체의 정욕과 쾌락을 좇아 살지 않게 하옵소서. 모든 음행과 음란, 부정과 탐욕을 경계하게 하옵소서. 행여 우리의 교회들이 더러운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인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교회들이 되도록 능력을 쏟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생각, 그리고 우리의 몸이 언제나 주님 앞에서 성결함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광훈/버지니아한인연합감리교회, VA>

3 월 22 일 고린도전서 7 장

<언덕 위의 소리: 화평 중에서 부르셨느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신앙 갈등에 대한 상담 요청을 종종 받습니다. 또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경우에는 불신자와 결혼을 해도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안전한(?) 대답을 원해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했으면 그대로 지내고, 결혼을 했으면 갈라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도 안 해본 바울이 너무 무책임하게 대답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HOW”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어느 때인가 분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7:29) 어찌 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7:32)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르심의 이유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WHY”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배우자로 말미암아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믿는 아내가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지, 믿는 남편이 아내를 구원으로 인도할지 어찌 알겠냐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불쑥 “그때는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지! 이 인간이랑 결혼을 하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사람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을 이룬 것이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왜 부르셨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실은 “그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백승린/탬파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세상의 헛된 것에 메이지 아니하고 오직 은혜의 끈으로만 묶여 지기를 간구합니다. 주신 것을 기억하고, 주실 것에 감사함으로, 없는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게 하시며, 그럼으로 주님 오실 때 채워질 소망의 그릇이 커짐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끈에 매여 있는 우리의 욕심을 내려 놓기를 기도합니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을 이길 용기를 주시옵고, 주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지경의 선함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가정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 닮아 깊어지게 하시고, 부모님의 강건하심으로 감사가 넘치게 하시고, 자녀들이 하늘에서도 칭찬받는 귀한 자들로 성장해 가게 하옵소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부족함의 기도와 넉넉함의 감사가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희의 삶과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준/살렘한인연합감리교회, IL>

3 월 23 일 고린도전서 8 장

<언덕 위의 소리: 내가 죽인 친구의 형> 제가 중학교 3 학년 때, 저보다 3 살이나 많았던 제 친구의 형이 제 짝이 되었습니다. 간질을 앓고 있던 형은 몸이 너무 병약하고 아파서 세 살이나 어린 우리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던 겁니다. 저하고 친한 친구의 형이었기에 제가 처음에는 무척이나 잘 챙겨주고 잘 대해주었습니다. 가끔씩 수업시간에 발작을 일으키곤 했는데, 얼마 후부터 우리 반의 모든 친구들이 그 형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친구의 형이었기에 처음에는 같이 놀아주고 점심시간에 같이 밥도 먹었지만, 점차 저도 그 형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저마저 그 형을 외면하면 그 형은 정말 외톨이가 될 것을 알았지만 저는 친구들이 저까지 따돌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국 그 형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다른 친구들의 무리에 합세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약 올리고 손가락질하는 무리에 섞여 있는 제 모습을 보고 그 형이 얼마나 좌절하였을까?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그 형은 병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그 형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그 형의 육신의 병은 내가 준 것이 아닐지라도, 그 형의 마음의 병을 깊게 만든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비록 늦었지만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 내 곁에 작은 자의 모습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바로 그 형 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바라보며 내가 손 내밀어 주기를 바라셨는데, 나는 그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작은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던 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유대인의 무리 속에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이 우리 주의에 얼마나 많은지 ….나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세요! <강현중목사님 칼럼/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CA>

<묵상 기도> 이 시간,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여정을 묵상합니다. 당신이 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인 것을 아시면서도,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저희들도 좁을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가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하옵소서. 또한 고난을 당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인내함으로 요동치 않는 믿음으로 더욱 연단 된 삶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낙담케 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시며, 믿음의 형제자매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며, 우리의 가정과 교우들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동반자들에게 항상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는 관계로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혁/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TX>

3 월 24 일 고린도전서 9 장 (Holy Thursday)

<언덕 위의 소리: 거룩한 책임감으로> 세계 정상급 테니스 선수들이 어떻게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수천 시간이 넘는 프로 선수들의 게임을 분석한 짐 로허 (Jim Loehr)라는 스포츠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가 선수들의 테니스 경기를 자세하게 분석했는데 경기가 시작되어 서로 열심히 경기할 때는, 최 정상급 선수와 그보다 못한 선수 사이에서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기 사이사이에, 점수 한 점 주고 받는 그 사이 사이에, 그리고 한 세트가 끝나고 다음 세트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양 선수간에

확실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최고의 선수들은 틈틈이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는 뭔가 탁월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20 초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의 박동수를 낮추고, 마음의 긴장을 풀고, 다시 집중력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두 세 시간씩 지속되는 테니스 경기에서 이러한 초 단기 회복 습관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한홍, 왕들의 이야기에서). 수영 경기 전후로 늘 이어폰을 끼고 다니던 박태환 선수와 큰 경기 앞에서 늘 환한 미소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 김연아 선수도 보통의 선수들과 비교되는 탁월한 선수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 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사도로서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바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까지 포기하고 오직 복음을 위해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경주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복음성가의 가사와 같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도바울이야말로 거룩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음질한 주님의 참 일꾼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지금도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니 참 일꾼이 적다고 합니다 (눅 10:2).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고 복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해 내는 참 일꾼 되기를 소망합니다. <박진원/사바나한인연합감리교회, GA>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나선 40 일 여정이 이제 거의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주신 고린도전서 9 장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의 위대한 과업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한 위대한 종의 그 아름다운 고백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인 메시아의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성 목요일에 남기신 거룩한 발자취를 통하여 면밀히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면서도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성만찬의 은혜를 주시고 자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심과 제자들의 발조차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주시며, 사랑과 섬김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제 조용히 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보다는 그 사명을 위해 주신 직책의 권세를 누리는데 급급했던 부끄러운 처신들을 생각하며 깊이 참회합니다. 사랑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요, 섬김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일깨우시는 성령님의 권고를 귓등으로만 들었던 저의 오만한 어리석음을 참회합니다. 주님, 이제 저로 하여금 직책보다는 사명이 귀중함을 그리고 참 사랑과 참 섬김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심비에 깊이 새기게 하옵소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사명에 불타오르게 하시옵고 섬김의 용기를 갖도록 도우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광태/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IL>

3 월 25 일 고린도전서전 10 장 (Good Friday)

<언덕 위의 소리: 생명과 복>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 불행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권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과 시골 촌부의 집에서 태어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출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출생한 환경에 지배를 당하고 사느냐 초월해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이 그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고백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임의로 주신다기 보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다른 예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모두를 믿게 하셨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세상 사람들의 의지적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영생을 준다고 하지 않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쓰면 “저를 거부하면 사망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은 생명과 사망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든지 거부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선택한 사람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철구 목사님 칼럼/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묵상 기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금요일 주님께 기도하는 우리의 심령이 회개와 기도, 감사와 찬양,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총이 우리의 삶 속에 임하게 하옵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구속의 증거가 되게 하셨사오니 그 몸과 피를 통해 우리가 한 몸 이루는 감격을 누리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은혜로 새 사람된 믿음의 백성들이 산제사의 삶을 살게 하옵시고, 신앙의 신비가 일상이 되어 우리를 돕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바라며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창민/LA 한인연합감리교회, CA>

3 월 26 일 고린도전서 12 장

<언덕 위의 소리: 자기중심성(Ego-Centrism)>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터전이 되는 장소인 교회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영적 공동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조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터전인 교회에도 세상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공존 합니다. 그러한 문제의 근원을 차근히 살펴보게 되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의 자기중심성(Ego-Centrism)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개인의 내면, 가정, 교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의 모습 속에서도 그러한 갈등이 보입니다. 교회 내에서 여자교우들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문제,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교우들 사이에서의 갈등의 문제들이 보여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해 주었던 빌립보 교회와는 달리 고린도 교회와의 사이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명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 스스로가 회심 전에는 가장 극명한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 있던 자였기에,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문제들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님도 그의 사역의 첫 시작을 앞두고 광야에서 자기 스스로를 부인해야 하는 시험을 감당하셨고 십자가에서 그 최고의 정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성만찬의 참 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의미가 담겨있는 성만찬을 온전히 이해하고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 안의 자기중심성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만만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견뎌나가며 가나안 땅을 꿈꾸어야 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깊이 있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성장해 나갔지만, 그들이 광야에서의 어려움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만찬의 과정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단순히 예수님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기념하는 단계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서는 살과 피를 나눠주신 분이시고, 나의 죄를 씻겨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고백해야 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만찬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무너지고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기념함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되는 주님의 거룩한 초청인 것입니다. <이병훈/에임스사랑의교회, IA>

<묵상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께서 주신 성만찬을 오해하고 남용할 때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성만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마술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며, 우리의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이 식탁에서 쫓아냄으로 그를 심판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성만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가 그 분과 하나되었다는 신비를 우리 자신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희가 이 신비에 참여하고 또 참여할 때, 우리를 위해 값없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의 몸을 내어줄 수 있게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승리자로 오시는 그 날, 하늘 나라의 영원한 잔치에 참여함을 늘 기억하여 오늘 하루 하루를 성찬이 연속된 삶으로 살아가게 인도하 여 주소서. 이제 내일 아침이면 찬란한 부활로 우리를 맞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명선/요벨교회, 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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