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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감리교회(S.Korea First Korean Methodist Church), 1885년 10월11일 설립


한국의 첫 감리교회, 1885년 가을에 설립(10월11일)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1885-1887년)-노 종 해 목사 (말레이시아선교사)

한국의 첫 감리교회 설립은 1885년 가을로 10월 둘째 주일이다.(10월11일) 이러한 사실은 “아펜젤러 일기”와 초기 한국감리교회 사료들을 수집 검토 연구한 결과에서 밝혀졌다.

정동교회가 창립일을 “1887년 10월 9일”로 지키게 된 것은 ‘창립90주년행사’를 기해 <정동제일교회90년사>를 쓰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정동교회는 역사적으로 ‘1887년 10월 9일’을 창립일로 지켜 온 사실이 없었으며, ’90주년 행사’를 하기 전까지는 ‘1885년’으로 지켜 왔었다.

정동교회는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창립기념일에 대해서 먼저 정확한 원 사료를 통해 밝혀져야 함을 절감하고 추진하던 중 ‘1885년 10월 둘째 주일’이 밝혀져 결정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결정은 새로운 결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지켜 온 창립일로 환원시킨데 불과한 것이다.

 

1. 1887년 가을, 10월 9일은 어떤 날인가?

 

1887년 10월 9일은 아펜젤러 선교사(당시 한국선교회 감리사)가 별도의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고 수리하여 한국인 집회와 전도인 양성 사역 처로 공개한 날이다. 이 가옥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고 최초로 한국인들에게 개방한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이 정동교회의 시작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87년 10월 9일 이전에도 신도의 공동체로써 교회는 설립되어 존재하여 왔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1887년 7월 24일’자 일기(Daires)를 보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참조-Sunday, July 24, Seoul. Appenzeller Papers : Daires)

“오늘 나는 내 집에서 위리의 첫 번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박중상이다. 우리학교 학생이며 진지하고 지적인 젊은이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해서 들었다. 한국에 돌아 온 후 그는 하야까와 형제와 친해졌고 그를 통해 세례받기를 권고받았다.
이것이 여기에서의 우리 사업의 시작이다. 나는 완전히 주의 손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주의 손 안에서만 그가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오기 바란다. 그는 언약의 사람이다.”(아펜젤러, 노종해 역, 일기, P69. clsk 1988)

Today I baptized our first Korean convert in my house. His name is 박즁상 a member of our an earnest and intelligent young man. He has been in Japan where he first heard of Christianity. Since returning to Korea he has been intimate with Brother Hayakawa through whom he was recommended for baptism.
Thise is the beginning of our work here. I have given him entirely in the Lord’s hand because there only is he safe. May many more be added to our church. He is a man of promise.(아펜젤러는 ‘박즁상’을 한글로 표기 했다.)

이만열 교수는 아펜젤러의 일기 ‘1887년 7월 24일’자를 주시하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우리교회(our church)’라는 말에 유의해 본다고 하면서, “그는 벌써 이때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고 지적하였다.(이만열: “아펜젤러”, 연세대출판부 p495.)

여기서 우리는 1887년 7월 24일 이전에도 신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는 늘어나는 성경공부반(Bible Class)과 전도인 양성, 신도들을 위해 별도의 가옥을 마련하여 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기위해 1887년 9월에 가옥을 구입하고 수리하여 개방한 날이 10월 9일인 것이다.

이 건물에 대해서 아펜젤러는 ‘성서사업(Bible Work)’을 위해 마련한 집이라 하여,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권서인’, ‘평신도 전도인’을 위한 ‘사경반’으로 사용된 건물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11일, 일기’에서 벧엘에 대해 “at Bethel the house we purchased for Bible work”라 지적하고 있다.(Appenzeller, Daire. Tuesday October 11, 1887, Seoul)

이만열 교수가 눈여겨 보며 지적한 ‘우리교회(our church)’란 말은 1886년 4월 25일자 아펜젤러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정동교회의 창립일은 1886년 4월 25일 이전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지적하고 나갈 것은 ‘1887년 10월 9일’은 새로운 교회 건물(가옥)의 시작은 되어도 우리교회의 설립일은 아니란 점이다.

 

2. 정동제일교회 창립을 결정할 수 있는 근거

 

첫째, 1886년 4월 25일(부활주일)자 아펜젤러의 일기를 눈여겨보면 정동교회의 창립일에 대한 시기를 밝혀 주고 있다.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일요일)은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한 1주년 되는 기념주일이다. 이 날 아펜젤러는 그의 딸과 스크랜튼 박사의 딸에게 세례를 주었고, 일본공사관 직원에게도 세례를 주어 한국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첫 세례식을 베풀었다.

이날 세례 받은 분은 하야카와 떼쯔야(Hayakawa Tetzya)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쓰고 있다. “그는 준회원 세례인(a probationer)으로써 우리교회(our church)로 받아짐으로써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는 한국에서도 그 신도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좀 더 밝히기 위해 같은 일기를 눈 여겨 자세히 보면, 주일 집회가 모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난 가을 이 도시(서울)에 왔는데 우리와 사귐을 가지며 주일날 우리의 기도회(our prayer-meeting)에 나와 함께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내가 그에게 교회의 집회에 대하여 말했을 때 선뜻 참석하였던 분이라”고 기록하였다.(아펜젤러 일기, 1886년 4월 25일자, Appenzeller, Daire.)

1886년 4월 25일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우리교회(our church)’로 받아짐으로써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로 선교사들의 연합집회(유니언교회,Union Church)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분명히 한국 감리교회의 신도의 공동체, 본처(지역)교회임을 알 수 있다.

 

▲ 사료-아펜일기(영문1886.4.25.)

아펜젤러의 일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밑줄은 필자가 표시한 것임)

“He came to this city last fall, made our acquaintance, studies the bible with us on Sunday, attends our prayer-meetings and when I spoke to him about uniting with the Church he readily assented…, He was also received into our church as a probationer so that the Methodist Church has its followers even in Korea.”

옥성득은 “아펜젤러 일기 보고서의 ‘our Church(감리교회)’를 ‘our church(우리 정동교회)’로 오해한 데서 ‘해프닝’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1885년 감리교회가 시작된 것과 지역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시작된 것을 구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 지적하였다.(옥성득;  한국의 첫 개신교회들, 1887년 가을에 설립” , 뉴스앤죠이 2015.12.17.)

그러나 한국감리교회는 1885년 가을에(last fall) 감리교회는 물론 지역교회(our church)도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 정동지역에서, 규칙적인 예배(prayer-meetings)와 성경공부(studies  the bible)인 신도의 공동체(교회)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정동제일교회’란 명칭은 후에 정해진 것이다.

둘째, 1886년 제2회 한국선교회가 6월 10일에 모였는데 이때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준회원 세례인(probationer) 1명, 장년세례인 1명, 원입인 100명, 주일학교수 1, 주일학생수 12명, 학교수 1, 학교교사수 6명, 학생수 30명, 병원 1개 처”로 보고되었다.(1886 Annual Report of MEC, 1886년 연례보고서)

송길섭 박사는 “여기서 원입인 100명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에 대한 해명도 없다”고 하였다.(정동제일교회90년사,p60. 주(註)33번 참조)

1886년의 통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1885년도 한 해 동안의 선교활동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1886년 연례보고서는 이러한 통계를 먼저 보고한 다음 이어서 1885년 한 해 동안 활발히 전개된 전도사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즉, 아페젤러의 활동과 스크랜튼 박사의 의료전도 활동, 스크랜튼 여사의 여성전도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들을 마치면서 통계를 보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의 장년세례인은 1886년 4월 25일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며, ‘원입인 100명’은 스크랜튼의 의료전도활동과 아펜젤러의 전도활동 등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하고 개별적인 접촉으로 성서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1886년 연례보고서의 통계표 중에 “한 해 동안 인쇄한 종류 1,000종”이라 했고, “한 해 동안 인쇄한 면 수 4,000쪽”이라 한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원입인100명을 밝히는 글을 필자는 이미 ‘정동샘 67호(1986년4월호)’에 게재하였다. 이러한 연례보고서(Annual Report)는 이미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교인들이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참조, 노종해: 韓國監理敎史의 새 視覺, 서울, 도서출판 풍만 1988.)

셋째, ‘1885년 가을’에는 한국감리교회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선교기지와 건물이 모두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스크랜튼 박사(목사)는 1885년 5월 3일에 서울 정동에 도착하여 가옥을 구입하고, 6월 말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의료기구와 약품일체가 도착한 후 9월 10일에는 정식으로 ‘정동병원’을 개원하였다. 스크랜튼 박사의 병원을 통해 가장 빈천한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돌봐주는 의료선교활동을 통해 전도되었고, 스크랜튼과 아펜젤러를 돕는 종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최초 교인이 되었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7월 29일, 정동에 한국가옥을 구입하고 내실(內室) 한 방을 정결하고 새롭게 준비하여서 ‘우리의 첫 한국인 지성소(first Korean Sanctuary)’로 구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인들의 기독교회로 연결된 첫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진 곳”이라 하였다. 즉 성소로 ‘예배실(Chapel)’을 설치하여 복음 전도에 임할 준비를 갖추었다. 실제로 이 예배실에서 성경공부와 예배가 있었고, 최초 세례식도 이 예배실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다.(참조, The Korea Methodist 1권1호.1904)

정동의 교회는 바로 이러한 아펜젤러의 내실, ‘지성소(Sanctuary)’에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우국지사인 익명의 세 한국인과 후에 배재학당이 된 최초 학생들로 조직되고 설립되었다.

1885년 8월 3일에는 이겸나, 고영일 두 학생으로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9월 7일에는 오인탁, 이종운 두 학생이 입학하였다.

1885년 8월 17일 아펜젤러의 집에서 모인 ‘제1회 한국선교회’ 보고서에 보면 세명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을 받아들인 기록이 있으며, 적극적으로 전도사업해 나가기로 결의하였다.(참조, Annual Report 1885.8.17.)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1885년 6월 20일, 서울 정동에 도착하여 여성전도사업 용 주택을 구입하였고, 정동병원을 도우면서 여성전도에 착수하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여선교사업을 더 크게 학장할 계획을 가지고 1885년10월23일에는 정동에 19채의 한국주택과 6,200여 평의 대자를 구입하여 여선교사업 기지를 확보하였다.

해외여선교회선교부(W.F.M.S)의 스크랜튼 여사는 여선교회 첫 보고서(1885년)에서 그녀는 아들 집에서 여성전도에 힘썼으며, 1885년 10월 23일에 매입한 가옥 중에서 집회하기 좋은 고을 택하여 선교사 연합예배’도 모였고, 자신의 여성집회도 준비하고 있음을 보고서에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1885년 10월 둘째주일(11일)에는 개신교 첫 성례예식이 거행되었고, 성서번역에 대한 의논도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는 장로교 선교사들도 함께 참여하였고 미국 성서공회 루이스 목사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이 날을 기념하여 1895년 10월 9일부터 개신교선교1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885년 스크랜튼 여사의 ‘연례보고서(Annual Report)’를 보면, 8월에 스크랜튼 여사(Mrs, Scranton)는 “미국 공사관과 장로교선교부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를 구입하고 인접대지에는 집회하기 좋은 집이 있다”고 했으며, 이때 스크래튼 여사는 그녀를 도와 종사하는 부인들을 얻었다. 10월23일에는 그 인접대지와 가옥을 매입하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는 계약서에 싸인 하며 찬양했다. 해외여선교회에서도 이제 한국에서 정당하게 선교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내지선교와 학교, 시약소가 같이 일하도록 했고, 교회를 위한 건물도 세워지길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나의 아버지께서 아무 실수 없도록 간구한다. 나는 주일(主日)을 귀하게 여기도록 배워왔다. 모든 주간의 중심으로 지켰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첫 성찬예식을 행하였는데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Loomis)씨와 미국 마리온호(Marion)의 선장도 참석하였다.” 고 했다.(1885 Annual Report of WFMS)

1885년도 가을에는 ‘한국선교회(지방회)’가 설립되었었고, 대규모 정동선교기지가 형성되었다. 정동구역 내에는 기도처, 예배실(교회), 병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규칙적인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전도인양성반(사경반)도 설립되었다. 당시 예배와 교육 등은 남.여 구분하여 모였다.

넷째, 역사적으로 정동교회는 1885년을 창립일로 기록하였고 지켜왔다.

양주삼 박사는 ‘정동제일교회약사’에서 “선교는 당시 정부의 허가가 없으므로 현저하게 실행치 못하였으나 학당 조회 시간마다 기도실 내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기도하므로 은연중에 교회는 자연히 설립되다”고 기술하였고, 정동교회 역대목사로 제1대 아펜젤러(1885-1902), 2대 최병헌(1902-1913)이라 하였다.(감리교회보37호, 소화11년, 1936년)

또한 정동교회는 1935년 4월에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감리회보3권4호. 1935.4.10.) 한국감리교회 선교50주년은 1934년 6월 25일에 행하여 구분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감리회보2권6호) 뿐만아니라 감리회보 1935년 10월 10일자에 보면, ‘정동교회 5대 계획’을 작성하고 그 성공에 노력 중이다.

그 5대 계획은 “1. 본 교회는 감리교회 중 제일 먼저 된 교회니 만큼 교회 신설에 노력할 것, 2. 본교회 정문이 불성모양이니 신축할 것, 3. 고 아펜젤라, 최병헌씨의 기념비를 건립할 것, 4. 교회 후면을 1,500원 예산으로 신축할 것, 5. 교회근처기지 매입할 것”이라 하였다.

이어서 “첫 조건의 실현으로는 벌써 시내 계동에 지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후에는 적당한 곳에 교회를 완립 할 것이다.둘째 조건의 실현으로는 벌써 유지 백화선 여사의 500원 기증이 있었다. 그녀는 멀지 않아 실현될 것이다. 김종우 통신”라고 보고하였다.

지금 정동교회 문화재 예배당 안의 뒷벽에 부착 설치된 ‘아펜젤러와 최병헌 감리사의 전도기적’이란 비가 창립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설치된 것이다. 한국감리교회 선교50주년 기념비는 1884년을 기점으로 정동교회 뜰에 세워졌는데 지금도 있다.

또한 정동교회 83주년 기념행사도 1885년을 지켜 1968년 3월 13일-17일까지 기념행사를 하였다. 이때 정동교회 83주년 특별강연집도 발행하였다.(1968년 정동교회 발행. 특별강연집 참조)

 

3. 정동의 개신교 첫 성찬식(1885.10.11. 주일)

 

한국기독교의 최초 성찬식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날 오후 정동 예배처에서 거행되었다.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튼 여사는 이 감격스런 은혜의 사실을 각각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아펜젤러는 미 감리교 선교부 총무인 레이드(J.M. Reid) 박사에게 보낸 1885년 10월 13일자 편지에서 한국 최초 성찬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지난 주 일요일, 이달 11일에 우리는 오후에 늘 가지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개신교에 의해 거행된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미국 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있는 요코하마의 루미스(H. Loomis) 목사가 참석해서 이 모임을 인도했는데 <오직예수>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제물포에 입항해 있는 미국 선박 마리온(Marion)호의 고급선원 두 사람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 하였습니다.”(이만열 편역, 아펜젤러 연세대 1985. p282)

또한 성찬예식에 대하여 메리 스크랜튼(M.F. Scranton) 여사는 1885년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제16차 연례보고서>에 보고하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1885년 연례보고서에서 이미 거처할 집과 학교와 병원을 겸하기에 충분한 큰 저택을 준비하고 교회를 위한 건물이 마련되었습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어서 주일마다 모이는 작은집회가 있음을 보고하면서 최초 성찬식에 대하여 보고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 주일날인 11일에 우리는 우리의 첫 성찬예식(our fist communion service)을 가졌다. 미국 성서회의 루미스(Mr Loomis)씨, 또한 미국선인 마리온 호의 선장 밀러(Miller)씨도 참여하였다. 성찬식이 집례된 작은 다락방처럼 떡과 포도주의 자기 몫을 분배 받았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기념하던 밤’(memorable night) 처럼 여기에 참여한 우리들도 주님의 실제로 임재하심을 알 뿐아니라 체험 하였다.”(Annau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C, 1885-1940. p48)

한국 서울 정동에서 베풀어진 개신교 최초 성찬예식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 오후였음이 밝혀졌다. 이 성찬예식의 집례자는 일본에서 이수정과 함께 <감리교 교리문답>을 번역한 루미스 목사이였고,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가 나란히 성찬을 분급하였다.

한국기독교 최초 상찬식은 무엇보다도 감리교와 장로교 당시 개신교파의 구별 없이 같이 참여하였고, 연합기관인 성서공회 총무에 의해 집례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뜻과 경륜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한국기독교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실제로 이를 기념하여 1895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개신교선교를 기초한 10주년 기념식’을 거행 했다. 의장은 조원시(G.H. Jones)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 뿐만아니라 한국인 지도자들과 교인들까지 연합하여 감사예배와 강연회 및 축하행사와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감리사인 스크랜튼 목사는 ‘한국감리교 선교 10년사’를 발표하였고, 교회의 시작을 1885년부터 기술하였다.(The Korean Repository. 1895.10.)

1885년10월11일, 한국 최초 성찬예식이야 말로 정동의 교회 창립일로 써 지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축복의 날인 것이다.

 

4. 한국의 첫 감리교회, 정동에 1885년 가을에 형성

 

정동제일교회는 창립일은 1885년이어야 하며, 역사적으로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의 도착과 함께 지켜왔음이 밝혀졌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례 되는 곳’이므로 아펜젤러의 일기와 초기 한국감리교회 선교연례보고서에 의해 구체적이고 규칙적인 성경공부 모임과 집회가 모였던 1885년 가을’을 창립일로 정할 수 있다. 그 날짜는 10월 11일 첫 성례가 집행된 날로 정하였다.(참고, 필자 주-정동제일교회 ‘100주년기념 사업회’와 ‘기획위원회’를 거쳐 1986년 5월 18일 ‘임원회’에서 오후 1시 25분에 결의 통과되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당시 초기교회에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일본인도, 중국인도 참석하였다. 교회는 세계적이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5. 맺는말: 1885년도에 한국감리교회의 설립과 신앙의 기초를 놓아

 

첫째, 스크랜튼의 정동병원을 통한 민중과의 만남에서 최초 정동지역의 교인 구성이 이루어졌다. 가장 빈천한 사람에게 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몸소 보여주는 교회였다.

둘째는 아펜젤러의 교육을 통한 진취적이며, 의협심이 강한 청년 지도층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민족구국과 애국신앙을 형성시켰으며 민족과 사회의 신앙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는 교회로 형성케 했다.

셋째는 선교사들의 병원과 학교, 가정에서 도우며 일하는 분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분들 중에서 한국 최초의 김창식목사도 나왔으며, 박에스더의 한국 최초 여의사도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씨, 최씨, 조씨, 강씨 등으로 이분들이 첫 인가귀도 된 교인 가정이며 권서인(전도인)이 되었다.

당시 엄격한 내외하는 관습에 의해 여성집회는 스크랜튼의 집에서 모였다. 여성들도 평등하게 대하며 가르쳐서 가정과 사회의 유익한 일꾼이 되게 하는 여성해방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킨 교회였고, 민족의 여성지도자들을 배출케 한 교회였다.

넷째, 한국감리교회는 1885년에 서울 정동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고, 정동병원(1885. 6월 말)과 학교(1885년 8월 3일)를 시작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구분치 않고 활발히 선교가 시작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사연합집회(Union Church)도 모여 명실공히 한국 감리교회 뿐만아니라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이루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감리교회의 면모와 특성이 1885년 가을에는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음 분명하다.

우리는 한국감리교회 교회창립 130주년을 맞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민족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선교적 사명을 결단하고 감사하는 믿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섬기며 사명 감당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rch-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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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1. H.G. Appenzeller; Dairs(1886-1901), Appenzeller Papres.
2.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1885-1929), Cable Address, Missions, NY; Printed for the Sciety
3.Annau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C, 1885-1940.
4. The Korean Repository. 1895.10.
5. The Korea Methodist 1권1호.1904
6. 감리회보3권4호. 1935.4.10.
7. 감리교회보37호, 소화11년, 1936년
8. 이만열 편: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출판부 1985.
9. 아펜젤러(노종해 역): 빛과 자유를 주소서, 아펜젤러 일기, 서울, 기독교서회 1988.
10. 노종해: 韓國監理敎史의 새 視覺, 서울, 도서출판 풍만 1988.
11. 옥성득; “한국의 첫 개신교회들, 1887년 가을에 설립”, <뉴스앤죠이 2015.12.17.>
12. 송길섭: 정동제일교회구십년사, 1977.
13. 노종해: “초기 정동제일교회 창립에 관한 글 모음“, KL,동남아선교센타 2009.
14. 정동샘, 제67호-84호(1986-1987), 정동교회 발행

 

*필자소개*

노종해 목사
말레이시아 선교사
1986년 당시-감신대, 목원대, 협성대(전, 서울신학원) 강사-담당; 교리사,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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