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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 개신교가 급성장한 이유

▲ 기독교 민족주의 지도자들(1896~1910년).

한국 초기 개신교 민족주의 지형도

서구 기독교 국가가 선교하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선교국(서양 국가들)과 식민국(일본)이 달라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물론 전 세계 기독교 선교에 존재하고 있는 식민성과 문화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요소가 있었지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민족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허약해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자 민족주의자들은 충군애국 운동(황제 탄신일 기념식, 조선 건국일 기념식, 애국가 작사 운동, 태극기 게양 운동 등)을 전개해 고종 황제의 권위를 높였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1897~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개신교 선교사(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한국인 개신교 지도자(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배재학당의 이승만 등), 지방 유지들(평양의 길선주, 안창호 등)이 참여해 국권과 민권을 고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기독교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반일 시위를 주도한 평양 교인들이나 상동청년회(전덕기, 김구 등)의 활동, 1907년 일부 개신교인의 의병 전쟁 참가(구연영 등), 친일파 척결 암살 활동(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 1909년 우연준의 이토 통감 처단 참가) 등의 과격한 민족운동이 있었다. 그와 함께 온건한 교육 애국 계몽 운동(YMCA와 여러 학교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인 신민회 운동도 진행됐다. 기독교는 내연(內燃)의 긴 과정을 거친 후 외연(外延)하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과 성경의 가르침이 심겨진 사람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활동가·운동가가 되었다.

이를 도표화한다면 아래와 같은 기독교 민족주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4개의 종파가 민족문제를 놓고 각각 다른 해법을 내어놓았다면, 1905~1907년 한국 개신교는 초월적인 부흥파와 교육을 내세운 애국 계몽파가 서로 겹치면서 주류를 형성했다. 의병 투쟁이나 암살 운동에 가담한 소수의 무력 항쟁파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직 친일파나 세상을 떠나는 은둔파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도표에서 좌상(左上)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1910년대에는 애국 계몽파가 해외로 이주하면서 약화되고, 1920년대 이후 문명론의 교육 운동은 오른쪽으로 옮겨 간다.)

총독부는 이러한 기독교 민족주의를 탄압하기 위해 1910년 안명근 사건을 계기로, 1911년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600여 명을 체포하고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 대부분이 개신교인이었다. 105인 사건 이후 개신교는 상당 기간 성장세가 멈추었다. 외부적으로 총독부의 탄압과 교육령과 같은 규제가 작동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약화됐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그 운동을 가져간 만주나 해외에서의 개신교는 성장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연희전문대학 설립 문제를 놓고 논쟁이 지속되면서 에너지를 소비했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멈추고 쇠퇴했다.

기독교 문명 보급이 낳은 사회변혁

1910년 이전 초대 한국교회의 두 번째 성장 요인은 기독교 문명 보급에 있었다. 이는 근대화를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던 조선-대한제국의 의제와 맞닿아 고종과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개신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증가했다. 근대 문명에서는 인권과 여권신장이 중요했다. 백정 박성춘은 시의인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개신교인이 된 후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만민공동회 연사로 활동하였다. 그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첫 졸업생으로 첫 의사로서 면허를 얻어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양반 남편이 첩을 얻은 후 외로이 지내던 전삼덕은 1900년 전도 부인이 되어 북한 지방 전도에 헌신했다. 김점동(박에스더)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보구여관에서 미국인 여의사 홀의 조수로 일했다. 그녀는 후에 미국 볼티모어여자의대를 졸업하고, 1900년부터 한국의 첫 (여)의사로 일하며 여성 전문 직업인 시대의 문을 열었다. 부자의 후처로 들어간 하란사는 미국 웨슬리언대학에서 공부하여 한국인 여성으로서는 처음 문학사로 졸업하고 1906년 이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고아·불구로, 여종이었던 이은혜(이그레이스)는 보구여관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수술 후 바로 걷게 되었으며,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1908년 첫 졸업 간호원이 되어 독립된 전문인의 길을 걸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김마르다는 1908년 졸업, 간호원이 되어 간호원양성학교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1920년대에 등장한 ‘신여성’을 예고하는 1900년대 기독교 신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내연-외연의 이분법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 1900년대 기독교 신여성들.

중국과 일본에서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 신지식을 교육하는 학교나 대중화하는 인쇄소, 서양의학 병원 등을 세속 정부나 단체들이 설립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당 부분 선교 학교, 선교 출판소, 선교 병원이 그 일을 담당했다. 첫 근대 정부 병원인 제중원 원장에도 선교사 의사인 알렌, 헤론, 빈턴, 에비슨을 임명했다. 1904년 남대문 밖의 세브란스병원은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제일급의 근대 병원이었다. 한국의 첫 대학도 개신교가 세운 평양 숭실기독교연합대학(1905년)과 서울의 조선기독교대학 곧 연희전문학교(1915년)였다. 기독교는 현실도피적이지 않았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토착화는 어떻게 진행됐나

민경배는 1965년 초대교회가 선교사들이 이식한 문화제국주의적인 서구 신학으로 인해 한국이 서구화됐다고 주장한 이후, 40년 넘게 그 주장을 수정하지 않았다. 1990년대 말부터 탈식민주의 이론에 따라 등장한 소장 종교사학자들도 의식의 식민지화, 통제, 담론, 모방 등의 이론을 이용해 내한 선교사들의 식민성과 서구화를 비판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미화하거나 그들의 영웅전을 쓸 필요는 없다. 동시에 그들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이다. 나아가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신자들의 주체적 수용과 그들 스스로 한국 개신교를 만들어 나간 주체적 전통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흔히 토착화에서 다루는 첫 주제가 ‘네비어스’ 정책이다. 네비어스는 신속한 복음화를 위해 자급(지원받는 교회가 아닌 독립하는 교회: 선교사의 돈이 아닌 본토인의 돈으로)·자전(고용된 전문 전도사가 아닌 자원봉사를 하는 평신도 전도인에 의해)·자치(멀리 있는 선교사가 지시·통제하는 것이 아닌 훈련된 현지 본토인 지도자들이 직접민주주의 원칙으로 다스리는)를 통해 본토인이 주인이 되는 토착적인 교회를 설립해 확장하는 선교 초기에 적절한 모델이었다. 한국교회는 대체로 이 3가지 점에서 성공하여 1907~1910년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문제는 상황이 변한 도시에서 전도와 교회 개척 위주의 정책을 지속한 것이다. 1910년대 상황 변화에 따라 선교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했으나 네비어스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에 버리기 어려웠다. 한 정책만을 고수할 경우 교회는 고인 물이 되어 시대에 뒤지게 된다.

1910년 이전 한국교회는 네비어스 정책을 비롯해 한문으로 된 성경, 소책자, 주석서, 찬송가, 신학서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번역해 사용하는 등 같은 한문 문화권에 있는 중국 개신교회가 두 세대에 걸쳐 만든 여러 좋은 문서·정책·신학을 수용해서 이용했다. 중국 기독교는 서구 기독교가 한국 기독교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유불선 전통 종교에 대한 그들의 종교 신학은 한국에서 기독교를 유교·무교·불교·동학 등과 유기적으로 접목할 수 있도록 싸매는 새끼줄의 역할을 했다.

토착화의 좋은 예들은 한글 성경에서 새 용어인 ‘하나님’ 만들기, <정감록>에 나와 있는 구원의 방도인 ‘弓弓乙乙’을 십(十)자가로 해석한 것, 무교·불교·도교의 귀신(잡귀·객귀·병귀 등) 쫓기 의식을 기독교 축귀 의식으로 바꾼 것, 새벽 기도회 만들기, 추도회 만들기 등이었다.

1960년대 이후 3자 원칙에, 제4자인 자기 신학(self-theology)이 추가되었다. 자기 신학 입장에서 볼 때도 1900년대에 등장한 최병헌, 길선주 등의 자기 신학화 작업은 기독교 토착화의 좋은 출발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논의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참고 – 옥성득, “한일 합방 전후 최병헌 목사의 시대 인식,” <한국 기독교와 역사> 13 (2000년 9월): 43~72; 옥성득,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한국 기독교와 역사> 25 (2006년 9월): 7~35)

성장세 꺾인 일본 개신교와 급성장한 한국 개신교의 차이점들

▲ 1909년 출판된 최병헌의 <성산명경> 표지. 신소설 형태의 첫 근대 비교종교론 서적이다.

위의 3가지 요인을 일본 개신교와 한국의 개신교를 비교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자. 일본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허약했다. 대신 신도(神道) 민족주의로 무장한 천황주의가 국체 이념이 되어 한국을 침략했다. 기독교는 제국 신학으로 변질해 러일전쟁을 거룩한 의전(義戰)으로, 한국의 식민지화를 하나님의 나라인 신국(神國)의 확산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근대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곧 진화론·사회학·인류학 등 세속 학문과 사상이 바로 들어와 기독교 문명보다는 세속 서구 문명을 수용했다. 또한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일본 개신교의 성장은 둔화되었다. 반면 기독교 민족주의, 기독교 문명, 기독교 토착화가 진행된 한국의 개신교회 규모는 1909년이 되면, 역사가 길고 수많은 선교회들이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자한 일본 교회보다 더 커지게 된다.

논쟁적인 1907년 대부흥 운동의 성격도 이런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도 아래 도표처럼 105인 사건 이후 크게 세 부류로 분기되었다. 교회 부흥과 성장에 치중하는 부흥파, 애국 계몽 운동의 흐름을 이은 온건한 교육파, 그리고 점차 그 입지가 좁아지면서 해외로 이주한 정치 참여파. 이 세 집단은 1907년 당시에는 완전히 분기하지 않았고 공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부흥을 경험한 다수의 민족주의자가 있었으며, 항일운동에 참여한 다수 인물도 부흥 운동의 영적 기초 위에 활동했다. 선교사들이 비정치화 목적에서 부흥 운동을 추진했음에도 한국 신자들이 역사 현실에서 부흥 운동을 이끌며 애국 계몽,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1900~1915).

결론적으로 1910년 이전 한국 개신교는 건전한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한 운동,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는 반봉건 근대화 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했으며, 이런 정치·사회적 토착화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신학·의례·건물 등에서도 한국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토착화를 이루었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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