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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A.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1865-1949)선교사

한국교회의 회개운동과  부흥

이덕주교수,한국교회사 전공(감신대)

34737-2-5401 로버트 A.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1865-1949)

  

하디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토론토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 열풍처럼 번지고 있던 ‘대학생 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접하고 1890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토론토대학교 학생 기독교청년회(YMCA)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그러나 1896년 6월 선교비가 중단되어 잠시 귀국하였다가 2년 후인 1898년 5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소속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그는 개성 삼포막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후에 남성병원이 되었다. 1899년 8월부터 서울에 머물면서 강원도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고 1900년 10월 남감리회 중국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 해 12월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전국으로 확산된 원산부흥운동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1903년 원산에서 발원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른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한국 토착교회의 교세 성장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성격과 내용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부흥운동은 한 순간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세계 교회사적으로는 영국 웨일즈와 인도, 미국 아주사에서 이와 유사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도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1907년 1~2월, 평양에서 ‘대폭발'(big bang)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산 부흥운동을 촉발시킨 하디의 회개운동이 갖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가 실로 크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하디의 회개와 부흥운동은 사도시대 오순절 성령운동(Pentacostal Movement)의 한국적 실현이었다. 사도시대 오순절 사건은 주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성령 강림을 기다라는 기도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원산 부흥운동도 한국과 중국의 어려운 정치,사회 상황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변화를 사모함’이 기도 모임의 동기가 되었고 그 결과 변화의 은총이 기도 모임에 참여한 이들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사도들이 먼저 성령 충만을 받아 (여태까지와) ‘다른 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원산에서도 성령 충만을 받은 선교사들이 지금까지와 다른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사도시대 오순절 운동의 가장 중요한 결실은 사도들의 ‘변화된 삶’이었는데 원산 부흥운동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그런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선교사가 변하였고 토착교회 지도자들이 변하였으며 토착교회 교인들이 변하였고 이들의 변화된 삶이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끼쳐 한국 사회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초기 부흥운동은 종교적 회개로 시작하여 윤리적 갱신으로 연결되었다. 개인적 성화에서 사회적 성화로, 개인 구원에서 민족과 사회 구원으로 발전하였다. 윤리적으로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로 교회는 일반 사회에서 그 ‘영적 권위'(spiritual charisma)를 인정받게 되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 지도력'(socialistic leadership) 향상으로 연결되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가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둘째,하디의 회개와 부흥운동은 복음의 토착화(Evangelistic Indigenization)를 가능케 하였다.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 부흥운동이 일어난 시기(1903~1907년)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지 20~25년 정도 되던 때였다. 따라서 선교사도 우리나라 토착 문화와 정서에 익숙하지 못했고 토착 교인 역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와 토착교인 상호간에 오해와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시기 개종한 토착 교인 중 대부분은 경제적이고 정치, 문화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다른 토착 종교와 구별하지 못하고 기복적(祈福的)인 자세로 선교사와 교회를 바라보았다. 이런 토착 교인들을 보는 선교사들의 시각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런 교인을 두고 ‘쌀 교인'(Rice Christian)이라 칭하였다.

그런데 원산 부흥운동을 계기로 선교사와 토착 교인들은 회개와 중생과 성화(성결)란 기독교의 ‘본질 체험'(initial experience)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토착교인들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비로소 ‘참 교인'(real Christian)이 된 셈이다.

이런 체험을 하는 토착교인들을 보는 선교사들의 시각이 달라진 것은 당연하였다. 선교사와 토착교인 사이의 오해와 편견이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이를 통해 복음이 비로소 우리 민족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복음의 토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하디의 회개와 부흥운동은 초교파적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을 가능케 했다. 하디가 처음 한국 선교사로 올 때(1890년)는 개혁교회(장로교) 배경의 평신도(의사) 선교사였다. 그러나 선교비 문제로 1898년 감리교회로 옮기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면서 신앙적,신학적 정체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신분상 과학과 이성을 강조하는 의사에서 감성과 체험을 강조하는 목회자로 신분이 바뀌었으나 그것을 본질적 체험으로 완성한 것이 1903년 부흥운동이었다. 그는 부흥운동을 통해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를 체험하였다. 교리 중심에서 체험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성과 전통,성서와 체험의 조화를 강조하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J. Wesley)의 신앙과 신학 전통을 체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 부흥운동을 통해 하디는 비로소 ‘참 감리교인'(real Methodist)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그러했지만 하디의 ‘감리교 체험’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하디의 회개운동이 처음 일어난 모임이 캐나다 장로회와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연합 기도모임이었다. 이후 하디는 자신이 속한 남감리회 선교구역 철원, 서울, 개성 뿐 아니라 미감리회 선교구역인 인천,북장로회와 북감리회 선교구역인 서울과 평양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를 통해 부흥운동은 교파별로 나누었던 선교구역을 넘나들며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초교파적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부흥운동이 갖는 ‘오순절운동’ 성격 때문이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를 지향하는 오순절운동의 기본 성격 때문에 하디는 교파를 초월하여 집회를 인도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이 초교파적 부흥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런 초교파적 부흥운동은 교회 일치운동으로 이어졌다. 원산 부흥운동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었던 1905년에 이르러 선교사들과 토착교회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만큼은 ‘단일’ 개신교회로 ‘대한예수교회’를 조직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이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계기로 한국에 진출한 여러 교파교회 선교부들이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조직하여 성경과 찬송가 등 기독교 문서 발행,병원과 학교 운영 등 대규모 사업에서 교파 간 경쟁과 독점을 지양하고 상호 연합과 협력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출발 근거가 원산 부흥운동의 ‘오순절’ 체험에 있었다.

이처럼 초기 한국 토착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성격 및 내용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원산 부흥운동이 하디 선교사의 성령 체험과 회개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하디 개인의 회개가 선교사 공동체의 회개를 끌어냈고 선교사의 회개가 토착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를 유도하였으며 그것이 일반 교인들의 회개를 이끌어냈다. 구약시대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도 그러했고 신약 사도들의 오순절 체험에서도 그러했듯 교회사에서 위기의 시대마다 나타났던 회개운동은 항상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루어지는 ‘하향'(下向,downward) 운동이었다.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는 ‘진솔한’ 회개운동이라야 그를 바라보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먼저 이런 회개와 변화를 이룬 후에야 밖을 향하여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 이처럼 ‘하향적’ 회개운동을 이끌어낸 하디는 부흥운동 이후에도 감리교 뿐 아니라 한국 교회와 신학계 지도자로 큰 업적을 남겼다.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 부각된 하디는 1909년부터 서울의 감리교 협성성경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이 되어 23년 간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성서신학자로서 ‘신약총론'(1918년)과 ‘구약총론'(1921년) 등 20여 권의 저서와 1백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전공 분야인 성서신학 외에 웨슬리 신학과 교회사 분야까지 다루었다. 그의 신학적 성향은 당시 구미 신학계에서 유행하던 성서비평학을 수용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신앙에서 보수,신학에서 진보’를 추구했던 그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 연구와 뜨거운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경건 훈련을 강조함으로 ‘경건 학문 실천’이라는 감리교 신학교육 전통을 세웠다. 교장 직에서 물러난 1923년 이후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총무 겸 ‘기독신보’ 발행인으로 문서 선교 활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4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1949년 미시건주 랜싱에서 별세하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원인은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 문제로 그 지도력이 교회 안팎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교회 운영과 사업이 세속적 물량주의,과시형 업적주의,당파적 경쟁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회로부터 냉소적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적 오류의 근본 원인은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양태에 있다. 회개와 중생과 성화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대신 기복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도록 만든 한국교회 강단의 책임이 실로 크다. 회개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체험하고 고백해야 할 구속의 은총의 출발이다. ‘가슴을 찢는’ 아픔이 수반된 회개라야 중생과 성화의 삶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03년 8월,하디가 원산의 토착 교인들 앞에서 하였던 ‘괴롭고 창피한'(painful and humiliating) 자백이 오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재현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4737-2-5401
(*자료: 한국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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