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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발자취(John Wesley’s Foot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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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재웅목사  by Rev Jaewoong Chang(NY Long Island UMC)

 

영국의 상황john-wesley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길거리에는 술취함,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구의 약 10%정도가 런던에 살았는데 대다수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질병이 많았습니다. 불안정한 생활에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은 일종의 해소책으로 술, 폭력, 매춘, 도박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Episcopal)와 청교도(Puritan)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어 종교적인 상황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백성들의 대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에서 공인된 영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이긴 해도 영국교회가 아닌 카톨릭,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퀘이커교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영국교회는 정치적인 세계와 아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17세기에 카톨릭과 청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투표를 하거나 의회에 참석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국교회는 기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바꾸도록 돕기 보다는 이러한 현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영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선한 의도와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처지 개선을 위한 일에 영국교회는 공헌을 별로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이 이러한 상황속에서 요한 웨슬레가 태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탄생과 성장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동북쪽 링컨주의 엡워즈(Epworth)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국교회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모친 수산나 아네슬리 사이의 열 아홉명의 자녀가운데 열 다섯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청교도 목사의 자녀들이었으며 교회를 영국교회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조부와 부친이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영국교회로 들어가 영국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은 후 링컨 주의 습지에 위치한 엡워스 교구를 맡아 거의 40년간을 봉직하였습니다.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성례를 귀하게 여기던 목사였습니다. 비록 위대한 학자나 시인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은 욥기에 관한 주석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엡워스 목사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그가 지은 찬송 중의 하나가 연합감리교 찬송가인(The United Methodist Hymnal)에 수록되어있습니다,(#293,“Behold the savior of Mankind”)

요한 웨슬레의 체격은 작았으나 그의 다갈색 머리와 정렬적인 성경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특별히 웨슬레가 태어나고 자라난 엡워즈 마을은 난폭한 주민들이 있어 사무엘 목사의 농작물에 불을 놓기도 하고 젖소를 찔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6살이 된 해 겨울 즉 1709년 2월 9일 한 밤 중에 원인 모를 화재가 목사관에 발생하였을 때 이층 다락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재속에서 깨어나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창문 곁에 다가서서 “사람 살리세요”라고 외쳤으며 이를 본 불을 끄던 교회 청년들이 무등을 서서 그를 구출해내는 순간에 그 집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구사일생으로 구원받은 자기 생명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조각”(스가랴 3:2)이라 비유하여 생각하고 자기 사진 밑에 이 성경구절을 쓰고 항상 “하나님이 왜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셨을까?”그 이유를 생각하며 평생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였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 화재로 인하여 집이 완전히 타 버렸는데도 가족중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타는 목사관에서 마지막으로 구출된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 웨슬리는 비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 양육은 직접 가정에서 조기 교육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독서는 광범위하였고 특히 종교와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섭렵하였으며 남편 목사의 출타 중에는 목사관에서 기도회를 직접 인도하였습니다. 수산나와 사무엘은 종교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서로 의견대립이 있을때가 많았는데 때론 이 일로 인해서 목사관에 심각한 긴잠감이 감돌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궁핍과 연이은 출산과 아울러 계속된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열 아홉명의 자녀중에서 요한 웨슬레를 포함하여 열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자녀중 가장 맏이인 사무엘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곱명의 딸, 곧 에밀리아, 수산나, 메리, 메헤타벨, 앤, 마타와 케지의 삶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프레데릭 E, 메이저는 그의 저서 ‘The Story of John Wesley’s Sisters or Seven Sisters in Search of Love‘에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여러번 자신의 누이들이 감리교 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지 못한다고 실망을 표현하곤 했는데 가난과 가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들은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었던 챨스 웨슬레(Charles Wesley)는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역자였습니다. 챨스 또한 아버지와 두 형과 같은 길, 영국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적인 신앙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으며 상당한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감리교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기록하였고 그의 찬송시는 다른 교단에서 발행하는 찬송가집에도 많이 수록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찬송으로 ‘천사 찬송하기를(새찬송, 통일 126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새찬송, 통일 23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새찬송 15장 통일55장)’이 수룩되어 있습니다.

엡워즈 목사관에서의 삶은 요한 웨슬레에게 귀한 신앙의 터를 닦아주고 오랜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과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에 대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는 학문과 교회의 가르침, 기독교인으로서 필요한 훈련, 또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이 모두를 귀중히 여겼으며 목회 말년에 이르서는 엡워스에서 경험되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회상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교육과 목사안수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로서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1714년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고 그 곳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1724년 졸업을 할 때에는 고전과 현대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고 신약성경을 원어로 능숙하게 읽을 정도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우수한 성적을 올린 우등생이었습니다. 옥수포드를 졸업할 무렵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종교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그가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졸업후에도 1726년 3월에는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뽑히는 영예로 인해 옥스퍼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연구원이 되면 특별 요청이 없는 한 캠퍼스에서 살아야 한다거나 대학에서만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로 인해 요한 웨슬레는 자유롭게 옥스퍼드를 떠나 상당한 기간 동안 아버지의 교회 일을 도와줄 수가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이 교회를 담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요한 웨슬레는 1728년 7월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는 하였지만 자신에게는 교구 목회가 적합하지 않음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1729년 9월 웨슬레는 링컨 칼리지로부터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옥스퍼드롤 돌아온 그는 옥스퍼드 학자로서의 동료간에 사이도 좋았고 운동을 잘하여 인기도 있었으나 그의 마음 저변에서는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생이 되어서 영적 성장을 목표로 옥스퍼드 대학의 다른 학생들과 소그룹으로 규칙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들의 초청으로 이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곧 그들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레 두 형제는 옥스퍼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기도와 성서연구와 봉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대학가에 만연하고 있었던 도덕적, 종교적인 방종을 거부하고 대신 정규적인 신앙클럽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요한 웨슬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꾸준히 기도생활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했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또는 그는 매주 성만찬에 참석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특히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매주 두 번씩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를 자신있게 질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 적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성례주의자’ ‘성경벌레’ ‘신성구락부’ 혹은 ‘규칙주의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에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단어에서 나온 ‘감리교인’이란 말이 이 후에 웨슬레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의 죽음과 조지아 선교여행

1735년 아버지의 별세후 요한과 챨스 웨슬레는 당시 영국교회의 선교기관이었던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로 자원을 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러한 선교사역이 초대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1735년 가을, 웨슬레 형제는 선교사 자격으로 영국의 새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에 있는 원주민들을 향해 떠나가게 됩니다. 새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던 도중 선상에서 심한 폭풍을 만났는데 함께 탑승한 26명의 모리비안 교도들이 기쁘게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젊은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저들을 내가 갖지 못한 내적 평화와 위로를 지녔을까?”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두 달동안의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항해 끝에 그들은 1736년 2월 6일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 웨슬레는 적어도 3가지 목표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조지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둘째로 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셋째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 죠지아주에서의 요한 웨슬레의 경험은 환멸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웨슬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원주민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슬레는 성실하게 정열적으로 일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교사역에 냉담하거나 반항적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접촉도 빈번하지 못했고 효과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 웨슬레가 섬긴 교구의 교인이었던 소피 합키라는 여인과의 불행한 사랑은 결국 대 배심원의 기소를 받게 되어 식민지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못된 1737년 12월 죠지아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동생 챨스는 그 때 이미 영국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과의 만남

그러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지아로 가던 배안에서 식민지에서 머무는 동안, 또한 영국으로 돌아오던 때 배안에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인 모라비안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루드윅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적인 지도하에 있었던 그룹으로 모라비언들은 영적으로 훈련된 내적인 긴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그들의 확실한 신뢰와 체험을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레는 몇개월동안 영적으로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로 돌아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으나 모라비언 친구였던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피터 뵐레(Peter Boehler)는 웨슬레에게 설득하기를 자신이 찾고 있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이를 위하여서라도 계속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의 신학은 내적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영혼을 뒤흔들만한 신앙의 체험으로 기독교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회심

1738년 5월 24일 저녁 요한 웨슬리는 내적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드디어 그가 바라던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위치한 어느 작은 기도 모임의 참석은 요한 웨슬레의 장래와 그의 사역 방향을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체험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모이는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할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고 그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같은 죄인의 죄마저도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일지, 1738년 5월 24일)

동생 챨스 또한 형 요한보다 삼일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올더스케이트에서의 회심 체험은 요한 웨슬레에게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큰 변화를 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모든 의문과 갈등을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요한 웨슬레에게는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하여 소망과 확신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었고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심의 체험이 시험이라든가 의심, 절망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로부터 그를 완전히 해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믿고 있던 평안, 기쁨,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가끔 고백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올더스케이드의 체험을 통하여 그가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힘 주시는 은헤를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독일 헤른후트: 모라비아본부 방문

5월 24일의 회심 체험이후 요한 웨슬레는 독일 헤른후트에 소잭하고 있었던 모라비언 교도들의 본부를 방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곳에 몇일을 머물면서 그는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진젤도르프 백작과도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보여준 친밀함과 서로를 돌보는 마음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헤른후트를 방문한지 몇 달이 지난후에 모라비안교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역사를 기다리는데 너무나 소극적이라고 웨슬레는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회심경험을 앞당기기 위해서 기도, 성경공부, 성만찬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을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음을 잘못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738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요한 웨슬레는 종교적인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독서와 연구, 기도, 감옥 방문, 성만찬 집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설교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전력하였습니다. 그는 교구 목사로서 어느 한 교구를 맡아 안정된 목회를 하는 대신에 교회마다 다니면서 순회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회 전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옥외설교시작: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희망을 잃었던 그들에게 말씀으로 희망을 되찾게 해주었고 의심에 가득찬 그들에게 확신을 갖게하고 종교가 한낮 차갑고 생명력 없던 일과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경건심과 뜨거움을 체험하도록 도와주었기에 일반 대중들은 웨슬레의 복음전파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반면에 웨슬리의 설교가 회중들을 사로잡고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되자 핍박과 비방도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교회로부터 요한 웨슬레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보면 그는 설교 도중에 계속 돌을 맞아 “세 번이나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60차례에 걸쳐 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1739년 4월 요한 웨슬레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됩니다. 그의 친구인 죠지 휫필드의 권유로 교회 건물밖에서 곧 브리스톨 야외에서 처음으로 옥외설교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739년 복잡한 브리스톨(Bristol) 도시 외곽에 위치한 킹스우드(Kingswood)라는 곳에서 광부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늦은 오후였습니다. 혹독한 노동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친 광부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처음으로 이 광부들에게 옥외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용하셨던 똑같은 성경 본문(눅4:18-19)으로 광부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이렇게 일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에 나는 상식에서 조금 더 벗어난 일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도시에 접하고 있는 약간 높은 언덕에 서서 약 삼천명의 청중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내가 선포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일지, 1739년 4월 2일)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정도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때는 그곳에 1만명이 훨씬 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회, 가정, 장터, 탄광 입구, 그 외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복음을 메시지를 들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250,000마일이나 순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도시, 마을, 농폰들을 순회했을뿐 아니라 북쪽의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규칙적으로 순회 전도를 다녔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250,000마일 이상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구 10바퀴 이상되는 거리를 다니며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8주간동안에 무려 80번의 설교를 한 정력가였습니다. 그는 평생 4만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이 만든 사람: 요한 웨슬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늘 “하나님! 나에게 이 책을 주소서. 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이 책의 메시지를 받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책이 참으로 나의 책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이 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웨슬레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그의 목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조직력: 속회의 시작

특별히 요한 웨슬레와 절친했던 조지 휫필드 목사 또한 웨슬레처럼 옥외 및 순회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개한 사람들을 계속 돌보는 영적 양육을 위한 별개의 조직이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요한 웨슬레는 회심한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양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 각계 각층에 속해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다양한 부류에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리교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이 경험 이후에 술주정, 가정 폭력, 매춘, 범죄,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 사랑과 희망, 기쁨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신앙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처럼 변화된 사람들이 은혜 안에서 성숙하고 성결에 이루도록 격려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에 감리교인들의 조직이 되었습니다. 1739년 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Class Meeting)’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속회는 약 12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속회의 인도자인 속장과 만나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회원들은 자신이 경험한 시험이나 유혹을 이야기하고 잘못을 고백하며 관심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보다 신실한 삶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감리교인들은 속회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속회에서 다른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발급하거나 갱신해 주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외에 영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신도들을 위하여 더 작은 모임은 ‘조(Band)’를 조직하였으나 이 조직은 속회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감리교 운동 초기에 웨슬레는 속회, 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속회와 조 모임보다 큰 모임을 ‘공회’라고 일컫는다. 최초의 공회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조직)

감리교 여성운동

감리교의 영적인 힘과 통찰력이 있는 속회와 조 모임의 인도자들의 지도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들이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라 크리스비, 도로시 다운즈, 그레이스 머레이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여성이 설교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787년에 그는 몇 명의 남성 설교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했던 교리적 선포와 규율을 준수하는 한 남녀를 불문하고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1791년 그의 죽음 이후 여성 설교자를 반대하는 기운이 다시 감돌았습니다. 1803년 맨체스터 연회에서 여성 설교자에 대한 반대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되었습니다. 1) 감리교인들의 거의 대다수가 반대한다, 2) 모든 설교 장소에 보낼 만큼 충분한 남성 설교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여성은 반드시 여성들에게만 설교를 해야한다” 더군다나 설교하기를 원하는 여성은 미리 설교 전에 해당 지역의 감리사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Minutes of Methodist Conference, 1803)(폴 칠코트는 그의 저서인 “She offered Them Christ:The Legacy of Women Preacher in Early Methodism”에서 감리교 운동의 초창기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감리교가 성장하면서 웨슬레는 평신도 전도자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공회를 하나의 구역으로 묶은 순회구역(Circuit)의 전임 순회 전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여가를 이용해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연회의 기원- 첫 예배처소 브리스톨(Bristol New Room)

1744년부터 웨슬레는 설교자들과 매년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연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연회에서는 신학, 감리교 선교, 다음해 설교자 파송에 관한 회의를 하였습니다. 공회의 모임 장소로 고심하던 웨슬레는 1739년 초에 예배처소(Chaplel)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브리스톨에서 지어진 첫 번째 예배 초소는 ‘새 집’(New Room)이라고 부릅니다. 그 곳은 예배와 설교를 위한 장소일뿐 아니라 웨슬레가 브리스톨을 방문할 때 머물 수 있는 거처 공간도 있었습니다. 이 집은 현재 영국 감리교회가 관리하며 방문자들에게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39년 웨슬레는 화운더리라고 알려진 런던에 있는 옛 무기 제조공장을 구입하여 개조하고 그 곳에 채플, 살림집, 출판시설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곳은 감리교인들의 사회봉사를 위한 여러 형태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후에 감리교인들을 위한 채플들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 설립되어 예배와 목회사역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진료소, 고아들을 위한 집,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뛰어난 조직력이 없었다면 그의 영향은 당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웨슬레는 교회를 분리할 의시가 전혀 없었고 오직 목표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데 그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평신도들은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여 성서연구, 기도, 신앙훈련,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웨슬레 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여 성직자가 모자랐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해줄 수 있는 순회설교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순회설교자들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말씀을 전파함과 동시에 속회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744년 요한 웨슬레와 챨스 웨슬레, 그리고 같이 일하던 4명의 영국 교회 성직자들과 4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여서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게 됩니다. 1791년 웨슬레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영국에는 313명의 목사와 76,968명의 신도가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목회자와 56,621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도전과 위기, 신학적 논쟁

영국교회의 목사와 평신도중에는 감리교 지도자와 평신도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특히 감리교 운동 초기에는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영국교회에서 허락하지 않는 야외설교를 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웨슬리의 죄악에 관한 단순한 논리와 복음주의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 선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레가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한 것이라든지 교구의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여기 저기 순회하며 하는 설교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자들 중에는 자기 부인들이 감리교 채플에서 보내며 아픈 사람들을 심방하는 등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정밖에서 쓰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웨슬레가 가정의 가치를 침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영국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영국교회를 분열시키려고 노력하는 위장된 카톨릭 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감리교인들은 만화와 풍자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웨슬레와 그의 설교자들과 감리교인들에 대한 폭도들의 폭력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극렬한 핍박은 그쳤지만, 예정론과 자유의지, 신앙과 이성간의 관계, 이 세상에서의 온전으로의 가능성, 감리교인들이 강조하는 종교적인 체험, 감리교인들이 영국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을 놓고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들이 요한 웨슬레의 삶에 암운을 드리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정문제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결혼생활과 지도력

1748년 웨슬레는 자신보다 13살 연하의 감리교 신자이며 과부인 그레에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결혼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지만 챨스 웨슬레의 방해로 인하여 그레이스는 다른 감리교 설교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절망에 빠진 요한 웨슬레는 자기 동생의 결혼 방해에 극도로 화가 났었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간의 관계는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1751년 2월 결혼을 했지만 이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메리 바제이, 혹은 몰리라고 부르는 뷰유한 상인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못되어 그는 부인과 갈등을 겪게 되어 외부사역에 신경을 쏟고 가정과 부인에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몰리는 요한 웨슬레가 계속해서 집을 비우고 다른 많은 여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1757년부터 두 사람은 몇차례 별거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1781년 사망할 때에도 웨슬레는 외출중에 있었고 장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레가 감리교 운동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독재를 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는 감리교가 자신의 꿈과 이상에 맞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예외없이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질때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리교운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런 운영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감리교인들은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당시 영국 감리교회를 향해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 즉 감리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단지, 그 교회가 능력이 없이 종교의 형태만 지닌채 한낱 죽은 단체로 전락할까 봐 염려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영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영성

88세의 생신을 맞은 요한웨슬리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한 유명한 목사가 영국을 여행하던 중 웨슬레의 고택과 집무실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기도실로 들어간 그는 마룻바닥에 쥐구멍 같은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슨 구멍입니까?” “목사님 생각에는 무슨 구멍 같으세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혹시 쥐구멍이 아닌가요? 맞습니까?” “천만에요. 저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기도의 흔적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던지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 마룻바닥에는 쥐 구멍같은 무릎 자국이 구멍처럼 뚫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새벽 4시에 두 시간씩 기도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규칙적으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기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빛을 띤 청명한 얼굴로 기도실에서 나오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웨슬레는 하루에 두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바침으로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샐리커햄이란 여성 중보기도사역자가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자신이 이 중보자를 만들었다고 고백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고 준비하셔서 자신에게 보내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 클라크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 역풍을 만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웨슬레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판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역풍이 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클라크 박사와 함께 “그러면 기도합시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웨슬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은 어느 곳에서나 주관하시며 만물은 당신의 뜻을 섬기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으로 바람을 움켜쥐시고 홍수도 잔잔케 하시며 영원히 왕으로 군림하시나이다. 이 바람과 파도에 명하시어 당신께 복종케 하사 우리가 갈 항구로 빠르고 전하게 우리를 데려가게 하소서 !

모든 사람이 웨슬레의 기도에 힘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웨슬레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아무 말없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클라크 박사가 갑판으로 올라가보니 놀랍게도 배가 다시 제대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그 후 줄 곧 순항하여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바람이 갑자기 순조로워졌을때에도 웨슬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으리라는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목사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첫째,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둘째, 너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셋째,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넷째,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다섯째,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여섯째, 너는 네 중심에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일곱째,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요한 웨슬레의 마지막 순간

요한 웨슬리가 1791년 2월 14일 죽기 6일전에 영국 노예매매제도에 대항했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이런 편지를 썻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과 사단의 공격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과연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 편지가 월버포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후인 1807년 영국의회는 마침내 노예매매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1807년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통과는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1791년 2월말 88회의 생일을 앞두고 요한 웨슬레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그의 침상 주변에 모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그는 아이삭 와트의 찬송가 ”내 생명 다할 때, 말할 수 있을때까지, 내 창조주 찬양하리“를 불렀습니다. 너무나 약해진 웨슬레는 ”내 찬양하리….내 찬양하리“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1791년 3월 2일 아침,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남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 동안 벌은 돈의 거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남은 재산이라곤 겨우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 자신의 관을 런던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 뒤뜰에 있는 묘지로 운반해 준 여섯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비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기도와 전도운동, 드림과 사회정화운동을 위해 헌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경건과 거룩의 삶, 성화의 삶을 사시다가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업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이란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속에서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통해 대규모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던 종교개혁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때를 찾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선을 행하라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라고 말함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드림으로써 온전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2013년 5월 24일은 요한 웨슬레 회심 275주년 기념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프랑스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는 “18세기 요한 웨슬레에 의해 일어난 감리교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켰으므로 불란서와 같은 유혈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사회와 국가의 희망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유산을 그로부터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서 끝없어 보이는 고민과 싸움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요한 웨슬레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요한 웨슬레가 남기고간 그 위대한 정신과 신앙만은 우리가 계승시켜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죽어가는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사람, 이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된 한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요한 웨슬리 부흥 전도운동이 필요합니다. 제2의 요한 웨슬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글: 뉴욕 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 장재웅목사)

 

Reference(참고자료)

챨스 유리긴, Jr ‘존 웨슬리:성결한 삶을 위하여’

John Hampson, ‘Memoirs of the Late Rev. John Wesley’, London 1791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 Nashville:Abingdon Press, 1995

Paul W. Chilcote, ‘She Offered Them Christ: The Legacy of Women Preachers in Early Methodism’ Nashville:Abington Press, 1993, 144page

Albert C. Outler, ‘Theology in the Wesleyan Spirit’, Nashville: Discipleship Resources, 1975

Albert C.Outler and Richard P.Heitzenrater, editors, ‘John Wesley’s Sermons: Anthology’, Nashville:Abingdon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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