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만나야할 14가지 친구들
1. 편하게 찾아뵐 수 있는 목사님
2. 행복한 가정의 모델을 보여주는 선배
3.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선배
4. 오래된 교회 친구
5. 기도원 같이 가 주는 친구
6. 그리스도와 교회의 뜨거운 사랑관계를 경험케 해주는 신앙의 애인
7. 새벽기도하는 친구
8. 선교지나 지방 낙도 개척교회 선교사(목사)님 내외
9. 자신이 전도한 친구
10. 전화비 아끼지 않는 친구
11. 먹여살려주고 싶은 후배
12. 삼각관계에 라이벌로 등장한 친구
13. 자신이 가르친 주일학교 어린이
14. 자신만이 웃길 수 있는 친구
1. 편하게 찾아뵐 수 있는 목사님
크리스천 청년의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는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말씀을 생활화하며 그리스도의 고매한 인격을 통해 삶을 살아가시는 분을 늘 가까이 두고 찾아뵐 수 있다는 것은 크리스천 청년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성경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지극히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목자는 양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교회도 대형화되고 분화된 조직에 항시 직무이동이 많아진 시대에 와서는 목사님과 성도가 가까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은 양들에게도 큰 시련이지만 목자들에게 더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교회 안에는 양들의 침묵시위와 양들의 반란사건이 가끔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크리스천 청년이라면 적어도 언제나 신앙적인 고민을 안고 찾아가서 안수기도를 받고 이 시대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서 있어야 할 위치를 가르쳐 주는 자신만의 목사님이 한분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자신에게 신앙의 영적 DNA를 물려준 목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상담뿐만 아니라 성경난제, 진로문제, 신앙지도도 받고 삶의 영역에서 그분이 결혼주례도 해주시고 아들과 딸들의 이름도 지어주고,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산모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며 태어난 아이 세례도 베풀어주시고, 인생의 겨울철이 다가와 힘들어 지칠 때 찾아와 심방을 해주시는 친밀한 목사님이 계시면 인생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행복한 가정의 모델을 보여주는 선배
오늘날 한국사회는 벌써 결혼하는 가정 3쌍 중에 1쌍이 깨어지게 되는 가정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비극적 가정의 통계수치는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비신자들보다도 이혼률이 급증하고 있다고 전한다. 우리 청년 세대들이 가정문제을 해결함에 특히 어려운 부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행복한 가정의 모델은 없는데 비해 우리가 보고 배워왔던 익숙한 우리 부모님 세대의 가정상은 오히려 불행을 가르쳐주는 역기능적 가정 모델이라는데 문제점이 있다.
앞으로 전개될 21세기 가정상은 기존 우리 부모님들이 살아왔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고, 남존여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유교적인 가부장상을 깨부수고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한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섬기는 크리스천 가장으로서 남성의 권위가 새롭게 세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고, 본격적인 맞벌이 시대를 맞아 남녀의 역할적 변화에 따른 가사와 육아 분담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화하고 양보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이 증가했다.
이렇게 변화되는 사회, 붕괴되는 가족문화 속에서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천국 공동체로 가정을 빚어가는 선배들이 있다. 그 선배들은 모두 저마다의 노하우가 있고 그 행복한 미소 속에 보이지 않는 눈물어린 노력이 숨어있다. 댓가를 치루지 않은 행복은 없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코 가정세미나만 들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행복한 가정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배들의 삶을 본보기 삼아 닮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며, 어려울 때는 이분들께 도움을 청하고 상담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3.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선배
크리스천 청년에게 무엇보다 선배가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직장생활과 교회생활, 가정생활 그 어느 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직장동료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예배자로서 직장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담당하며, 또한 교회에서는 선교와 봉사에 아낌없이 헌신하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머니로서 온전한 삶을 영위해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이미 동일한 고민과 실수를 반복하며 신앙과 직장생활에 있어 귀중한 깨달음을 얻은 선배의 가르침이다. 과연 직장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야하며, 믿지 않는 직장동료들과 직장상사, 그리고 고객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크리스천이 공통적으로 가장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직장-교회-가정에 있어서 시간과 열정의 배분문제, 그리고 일상의 영역에서 어떻게 선교적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술자리와 회식에서 빠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직장내 소외감문제 등 참으로 상담해야 할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기독 청년커뮤니티에 이러한 직장과 신앙 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상담해 주는 전문 사이트가 있어서 개인적인 사례들에 여러 선배들의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문제와 해결을 공유하는 크리스찬 문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제 선배들과의 만남을 통해 생생한 현실을 듣고 배울 수 있으면 더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4. 오래된 교회 친구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도 외롭다. 사역과 성경공부 다양한 프로그램과 색색가지 행사들이 교차되는 대형교회 역시도 현대사회가 주는 고독과 공허감을 매꾸어주지는 못한다.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동산지기라는 바쁜 직분으로 시달리며 수많은 동물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물론 하나님이 곁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와를 만날 때까지 근원적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인격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그곳이 에덴동산이라 해도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 청년들이 외로운 것은 주일학교 때부터 함께 고민하고 장난치고 공부하고 인생을 함께 헤쳐온 오래된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화와 직장변화, 교회의 수평이동현상 때문에 청년부에서 옛 신앙친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청년들은 홀로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에서 친해 보이는 친구들도 사실은 그렇게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 깊이와 친밀함은 한계가 있다.
교회 밖에는 오래된 친구가 있어 편하지만 그들은 크리스천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이고,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은 사역과 비전을 통해 만나고, 공식적인 집회와 모임이 아닌 경우 사적인 교류와 교제가 없기 때문에 거리감을 좁히기 어렵다. 더구나 사역 중심적 교제권에서는 친밀한 인격적인 만남이 어렵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교회현실에서는 부서와 팀, 순모임, 사역 프로그램과 관계없이 그냥 친구로서 언제고 교제할 수 있는 신앙친구가 필요하다. 나의 신앙적 변천과정을 함께 느끼며 서로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봐주고 때로는 신앙적인 충고와 중보기도를 아낌없이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함께 만들어 가는 동지 그래서 언제나 그 친구를 만나면 지나온 자신의 신앙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연상되는 그런 친구가 한 명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5. 기도원 같이 가 주는 친구
교회 밖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면 그 친구가 어려울 때 함께 술자리에서 열심히 푸념 들어주다가 오바이트 하는 친구 등 두들겨 주고 늦은 밤 자신의 집에 데려가서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방바닥에 누워자고, 아침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인에게 선물받은 속옷과 양말을 거리낌없이 빌려주는 친구를 가장 끈끈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 그것은 기도원에 함께 가서 중보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이다. 수련회나 아웃리치 가서 밤에 잠안자고 밤새워 좋아하는 남자 여자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친구는 백명 당 한 명 정도, 교회생활 관계의 어려움을 전화통 붙잡고 밤새워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백명 당 한 명, 힘든 경우에 자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줄 친구가 또 백명 당 한 명 정도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이 어렵다고 해서 특별히 월차 휴가까지 내서 기도원 가는 친구를 따라 함께 가서 나무 뿌리 뽑힐 때까지 함께 기도하고
기도산 무덤 곁에서 귀신나오지 않도록 지켜주는 친구를 만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그래 “너무 부담 준 것 아니야?” 이렇게 물어보면 “난 너에게 아웃리치 온 거야”라며 방긋 웃는 얼굴을 가진 이런 친구를 만나고 싶다.
성경에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도 있다. 그 사랑은 참으로 역사가 깊은 사랑이다. 그들의 조상 유다와 베냐민의 사랑(창세기에 보면 요셉의 잔을 훔쳤다는 죄목에 유다가 베냐민 대신 애굽에 남으려는 장면이 있다)에서 출발한 그 우정의 관계가 다윗과 요나단에 와서 뜨거운 우정관계로 발전했고, 그 사랑이 손자대인 르호보암때는 이스라엘 분열 왕국 위기에 베냐민 지파는 유일하게 유다 지파인 다윗 왕조와 함께 한 종족이 되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다 지파 예수님을 목숨보다 사랑한 베냐민 지파 바울의 사랑
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진정한 우정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왕권보다 자신의 가문의 흥망보다 친구를 사랑했던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한다. 성경은 사랑하는 이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가장 크다고 하지 않는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 사랑이 가장 크다고 얘기하고 있다.
6. 그리스도와 교회의 뜨거운 사랑관계를 경험케 해주는 신앙의 애인
아가서와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눈물을 흘릴 수 있으려면,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하는 애인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단 한번도 다투지 않고 아주 순탄하게 결혼에 골인한 일부 형제 자매들의 사례도 부러움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진짜 신앙적인 사랑이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예수님과 교회의 사랑처럼 우여곡절 많은 러브스토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때론 뜨거울 때가 있고 때론 차가울 때가 있으며 굳건히 설 때가 있고 방황할 때가 있듯이 남녀의 사랑 역시 다양한 변화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상처주고 상처받고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다시 돌아서고 실망하고 이해하고 용납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숙한 사랑으로 다듬어 가는 것이 아닐까?
세상 연속극과 미니시리즈,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사랑에는 키스는 있으나 기도는 없고, 섹스는 있으나 순결은 없다. 돈이냐 사랑이냐 하는 선택의 갈등은 있으나, 더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사랑의 아픔, 기도와 말씀으로 정금같이 다듬어져 가는 사랑, 결국 서로의 인격의 변화를 통해 성품으로 성숙해져가는 사랑의 모습이 없지 않은가?
신앙안에서 깊은 사랑을 하지 않으면 신앙의 요절인 다음 부분과 같은 구절을 결코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담이 하와를 보며 말했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표현이나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말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가 2:16)”나 예수님이 우리들 보고 말씀하신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7. 새벽기도하는 친구
오늘날과 같은 밤문화가 팽배한 시대 속에 새벽기도하는 신령한 중보기도자를 가까운 친구로 둘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 큰 영광이다. 내가 아는 K누나는 늘 밝고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그 누나의 사역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항상 느껴져서 주위에 큰 영향력을 주곤 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 누나는 기도할 시간이 별로 없고 기도하는 모습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기도도 많이 하지 못하는데도 삶에 큰 축복이 있고 사역에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 때 누나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 누나는 자기 자신만의 기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 친구들을 세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했다. 누나는 특별히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목사님과 선교사님이 항시 기도해주고 특히 새벽기도를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은 날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다고 했다. 새벽기도를 받을 수 있는 누나도 참 행복하지만 날마다 남을 위해 기도해주는 친구들 역시 참으로 주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8. 선교지 교회 목사님 내외
해외나 국내를 불문하고 선교지와 지방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과 목사님 내외분을 평생 알고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망각하고 이 땅의 썩어질 것이 전부인 것처럼 자본주의 소유경쟁 속에 휘둘려 살아가기 쉬운 우리들의 잘못된 성품을 바로잡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선교지와 별개가 아닌 섬기는 선교사 혹은 중보하는 선교사로서 선교사의 대열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10/40창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나 혹은 지역 미자립 교회에서 어려운 개척을 감당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만나 그들의 신앙적 삶을 들어보고 그들의 위로자이자 격려자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실 것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에서도 12번째 선수인 응원관중의 힘이 얼마나 중요했던 것인가?
선교사님이나 지방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가장 어려울 때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이라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들은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월드컵의 그라운드에서 뛰지 못한다면 그 관중석에서 최선을 다해 응원하는 12번째 선수가 되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최선을 다하는 청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선교사가 되면 더 좋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9. 자신이 전도한 친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 영혼이 주는 기쁨이다. 부모가 자식이 태어날 때 가장 기쁘고, 그 자식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가는 모습을 볼 때 인생의 보람을 느끼듯이, 진정한 신앙의 기쁨은 자신이 전도하거나 양육한 친구가 바른 신앙인이 되어 자신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교회에 큰 일꾼이 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기쁨은 그가 믿음으로 낳은 디모데와 디도,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을 볼 때였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기쁨은 내가 전도한 친구가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나의 신앙을 초월해 나보다 더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나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며 도전받음과 동시에 큰 보람을 느꼈다. 이러한 새영혼이 주는 기쁨은 그 무엇보다 큰 것이다. 평생에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자신이 양육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될 것인가? 천국에 가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이 땅에서 데리고 간 영혼 뿐이다.
10. 전화비 아끼지 않는 친구
청년 그리스도인은 힘들어도 주변에 마땅히 얘기할 사람이 없다. 교회 청년들이라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바쁘다. 예배와 부서모임, 순모임이 마치면 후다닥 사라져 버린다. 직장동료들은 술과 노래방을 거치지 않으면 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더구나 교회의 잦은 모임 참석하느라 가끔 있는 회사회식에 펑크를 냈더니 오랜만에 콜라와 사이다를 들고 회식 술좌석에 참석해도 왠지 거리감이 좁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업무 외적인 얘기가 나오면 교회적 삶과 다른 세상적 소재들 때문에 대화의 공통분모도 없다. 때아닌 벙어리 삼룡이가 되어 안그래도 힘든 마음 새파란 사이다 한잔에도 취하게 된다. 이 때 청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전화비 아끼지 않고 장시간 통화할 수 있는 친구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볼 때 바쁜 청년 그리스도인이 정서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전화 교제의 경우, 자매들은 본성적으로 잘 활용 수 있지만 형제들은 참 힘든 영역이긴 하다. 하지만 교회 형제들이 남자끼리 만날 만한 마땅한 방법도 없으며 그러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남자끼리 커피숍가서 죽치고 앉아있을 수도 없고, 당구치고 술 한잔 먹을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며, 교회의 다양한 행사 중간에 바쁜 크리스천들이 한번 주중에 모이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려울 때 전화 수화기를 베개삼아 늦은 밤까지 이야기 들어줄 친구를 갖는 것은 외로운 청년의 밤을 따뜻하게 샐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11. 먹여살려주고 싶은 후배
사랑 받는 기쁨보다 사랑을 주는 기쁨이 더 크고, 얻어먹는 재미보다 먹여 살려주는 재미가 더 큰 법이다. 예수님께서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지 않았는가? 알고보면 멋있고 이쁜 이성보다 뻔뻔하고 능청맞은 후배들이 소모임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교회 가는 일을 즐겁게 해준다.
교회 동생들은 사실 얼마나 귀엽고 재미있는가? 세상에 어떤 애완동물이 이처럼 귀여울 수 있을까? 기분이 울적할 때 골탕을 먹여주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며 순종하는 이삭과 같은 순종파 후배들도 있고, 오히려 선배들에게 덥태기를 씌우며 교회에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야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야곱과 같은 후배가 가끔씩 있는데 이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인간적이고 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12. 삼각관계의 라이벌로 등장한 친구
교회는 세상과 달라 경쟁보다는 상호협조와 이해를 통해 발전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청년부 생활을 통해 볼 때 아무리 친한 형제 자매들이라 해도 결코 서로 양보하지 않는 분야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마음에 드는 한 이성을 놓고 겨루는 라이벌과의 능력대결이다. 바로 연애와 결혼을 놓고 벌이는 애정의 경주이다. 이 영역에 있어서는 형제 자매도 따로 없는 것 같고,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서 서로 상처를 주고 누군가 부서를 떠나야 하는 그런 불상사를 겪기도 한다. 갈멜산상의 엘리야도 이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신앙의 갈등과 경쟁 역시 젊은 날의 아름다운 신앙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으며 서로의 신앙생활의 진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연애의 라이벌로서 기왕 진검승부를 내야한다면 청년여호수아답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세기사들의 로맨스라면 칼과 창으로 겨룰 것이며, 학창시절 연애라면 공부로 승부를 낼 것이며, 어학연수 가서 만난 사람이라면 어학실력으로 결판을 낼 것이요 사내연애라면 업무능력으로 겨룰 것이다. 그래야 승자는 물론 패자에게도 큰 축복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만일 삼각관계의 곤란한 상황이 발생되었을 경우 나는 신앙으로 승부를 겨룰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일 한 여성을 놓고 두 형제가 호의를 갖고 있는데 그 자매는 두 사람 모두에게 호의를 갖고 두 마음을 품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자매에게 신앙의 10종 종목을 정해놓고 1년을 정해 형제 둘이 신앙 대결을 통해 자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승부를 겨루는 이유는 하나님께 성실한 사람이 결국에 그 배우자에게도 성실하다는 선배들의 경험론에 근거한 것이다.
종목에는 예배, 기도, 전도, 말씀, 아웃리치, 봉사 등 큰 항목을 정해놓고 만일 예배라면 기본적으로 출석률, 예배의 열정과 집중도, 예배 좌석의 위치, 예배 시간 엄수, 휴지조각을 줍는 등의 예배당 청결의식, 주변 지체들과의 인사성 등을 놓고 상호비교하여 점수를 매긴다. 기도라면 성령집회, 금요철야, 부서기도모임 참석률과 기도 어휘와 기도응답률, 개인기도와 중보기도 비중 등을 집어넣는다. 말씀이라면 성경통독횟수와 QT노트 작성 검사, 성경요절 암송 개수와 일대일양육 여부를 비교한다. 아웃리치라면 선교의 열정과 리더십, 식당에서 닦은 접시 개수, 전도라면 노방전도 횟수와 전도지 접은 갯수, 전도한 영혼 수, 그리고 추수한 영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여부를 파악해서 ….. 1년이 된 후 총점을 매겨 신앙의 승자를 사랑의 승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는 사랑의 패자라고 해도 결코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정말, 학교 다닐 때는 성적 1등을 올리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고, 회사에서는 매출 1% 초과달성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청년들이 되었지만 신앙 안에서는 진정한 경쟁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성공하는 자에게는 라이벌이 있다. 우리 신앙에도 라이벌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선한 경주를 하던 베드로와 요한의 미묘한 감정대립을 읽고 미소를 금지 못할 때가 있다.
13. 자신이 가르친 주일학교 어린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친 영혼이 단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일년 매주일 가르쳐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여름 한 철 쌈박하게 3박 4일 화끈하게 가르칠 수 있는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라도 귀여운 영혼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해야 한다. 아무 의심없이 가르친 대로 믿고, 믿는대로 행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가르치는 청년들이 더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청년들은 두루두루 배워야 한다. 목사님과 교역자들 뿐만 아리라 부모님과 직장선배 등 인생의 선배들뿐만 아니라 책과 자연을 통해서도 배워야 하고, 일기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깨우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세상적인 수단과 권모술수, 타산적인 인간관계에 눈을 떠 가는 청년의 때에 순수한 어린이들과의 만남은 비둘기같은 순결한 신앙의 보존을 위해 중요한 것이다. 워즈워드가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칼린 지브란이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나는 어린이는 청년의 보호자라고 생각한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더 얻어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아이들은 청년들에게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을 가르쳐 준다. 신앙의 선배들은 청년들에게 지식과 경험과 세상을 살아갈 테크닉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 청년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순수함과 꿈을 가르쳐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청년들은 타민족에 관심이 많은 만큼 다음 세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아동 청소년 선교사로도 많이 헌신했으면 좋겠다.
14. 자신만이 웃길 수 있는 친구
하나님을 웃기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아무리 작은 것을 주어도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들의 얼굴에 미소를 주는 사람이 하나님을 웃기는 자다.” 따라서 고아원에 가서 어떤 고아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며 웃는 것이라 믿어도 틀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잘못된 신앙적 편견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교나 긍휼사역이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마태복음상의 지상명령과 야고보서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특별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주었고, 선교와 긍휼사역은 한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으로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또한 잃어버린 양을 찾아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섬기는 사역지나 선교지의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웃겨줄 수 있는 사람, 나를 친구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 힘이 들 때 제일 먼저 나의 전화번호를 떠올릴 사람, 내가 보고싶어 교회에 오겠다는 사람, 나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감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있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 15장 1절에 나타난 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가진 지식이 있어야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벌어야 한다. 그래서 나누어줄 수 있는 위치, 가르쳐 줄 수 있는 위치, 위로해 줄 수 있는위치에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