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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종교개혁 사상의 주요 논점

By 홍삼열(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 목사, Ph.D. 교회사 전공)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한 위대한 지도자가 이끄는 조직적인 운동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구심점이 없는 무질서한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개혁가들 사이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통된 특징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 표현들 중 “다수의 평행운동들”이란 표현이 아마 유럽 종교개혁운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용어일 것입니다. 각자가 전체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을 진행했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비슷한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각국의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했던 사항들이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2) 둘째는 최고의 권위는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 있다는 것이고, 3) 셋째는 교회의 본질은 안수받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는 위계구조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전이 제대로 실시되는 데 있다는 것이고, 4) 넷째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비성서적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네 가지 주요 논점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선행을 많이 하고 성례전과 고백성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구원은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꼭 무엇을 해야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만큼 충분히 선한 공적(功績)을 쌓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교회에서 요구하는 고백성사를 거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선 고백성사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모조리 기록하고 그것을 일일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 기록합니까? 잊어버린 죄는 어떻게 합니까? 모르고 지은 죄는 어떻게 합니까? 또한 고백신부가 지정하는 벌을 받으면 죄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된다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대가를 치를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가 그런 식으로 신자들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미신(迷信)을 부추기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면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 그것으로 용서받았다는 착각을 하겠지만, 실제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회개와 그에 따른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종교개혁가들은 고백성사를 비성서적인 미신행위로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될까요? 종교 개혁가들은 우리가 선한 양심과 선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외부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사람이 새 옷을 입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면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우리 몸이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것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중세의 고백성사 제도를 기초부터 무너뜨리는 사상입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중세 교회의 기본 입장은 신자는 평생 죄인이거나 의인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고백성사를 하고 죄의 값을 치르면 의인이고 그렇지 못하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해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루터는 이 세상에서 의인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용서받은 신자는 평생 “의인인 동시에 죄인”의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즉 실제 행동에서는 항상 죄인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는 의인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 아니면 또 그 은총을 의지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용서함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인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최고의 권위는 성서: 두 번째 종교개혁사상의 특징은 최고 권위는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면죄부 판매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가지고 시정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교권(敎權)으로 그의 주장을 묵살하자 그는 권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였고 그 결과 교회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히 더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 루터, 어거스틴, 바울, 심지어 하늘의 천사도 성서의 주인이거나 재판자이거나 조정자일 수는 없고 단지 성서의 증인들, 제자들, 고백자가 될 뿐이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처(Bucer)는 왕과 그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왕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그 편지의 진실성을 보장하는가 아니면 그 편지 때문에 전달자가 대접을 받는 것인가? 누가 권위를 더 가지는 것인가? 당연히 왕의 편지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서에게 권위를 제공한다거나 교회가 성서보다 더 권위가 있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서에 비추어봐서 그 진위(眞僞)를 판단 받아야 하고 만일 성서에 위배된다면 당장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 개혁가들의 공통 주장이었습니다.

신앙의 절대적 권위가 더 이상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서가 주어져야 마땅한 일이겠죠.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들이 성서를 읽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성서읽기를 절대 권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신비가 담긴 어려운 책인데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섣불리 성서를 읽다가 이단을 빠지게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가 평신도에게 성경을 주지 않은 실제 이유는 그들이 성서를 읽고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오류들을 발견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글을 깨우친 사람이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단지 성서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중심으로,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것을 중심으로 읽으면 절대 잘못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어야 하겠지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한 후 대량으로 출판하여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서를 구입하여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3) 말씀과 성례전이 제대로 시행되는 곳이 교회: 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구조를 교회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그 밑에 성직자들이 있으면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참 표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고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과 세례가 제대로 시행되는 곳이면 그곳이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준을 카톨릭교회에 적용해볼 때 가톨릭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닌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성찬과 세례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교육되고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신부들은 주일에 설교를 거른 채 미사만 드리고, 그렇다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주어 읽게 하지도 않고, 또 가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부들이 성경대로 설교할 경우에 그것을 금지시키는데, 그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덧붙여 가톨릭교회는 잘못된 성직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직자를 일반신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별종의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직자가 무슨 말을 하던지 절대 반대의견을 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평신도들도 “제사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미 영적인 기독교인이 된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기도드리고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성서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직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군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선택되어 사역을 위임받게 되는데 그것이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영원히 지속되는 타이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직무(職務)인 것입니다.

4) 가톨릭교회의 성찬식은 비성서적: 가톨릭교회는 신자가 매주 성만찬(미사)에 참여해서 떡을 받아먹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습니다. 행여나 예수님의 피를 땅에 흘리는 실수를 저지르면 큰일 나니까요). 즉 신자가 믿음이 없어도 떡을 받아먹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에게 물질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체설(化體說)입니다. 신부가 성별의 기도를 하는 순간 제단 위의 포도주와 빵이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빵을 받아먹는 사람은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이런 이론이 철저하게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어떤 외적인 종교의식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총은 그야말로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총이 선물이라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한 공적(功績)이 아니라 당연히 믿음이겠죠. 이점에서 개신교 성찬론이 가톨릭 성찬론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이 없이도 미사에 참여해서 떡을 받아먹으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다고 믿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믿음이 없이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받아먹어도 아무 효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성찬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신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는 성찬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식이 중요한 것은 빵과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사역이기 때문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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