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향한 멀고 긴 여정 떠난 故 넬슨 만델라, 그의 삶과 꿈
감리교에서 세례 받고 ‘넬슨’이란 이름 얻은 만델라
남아공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에 평생 헌신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WCC와 협력해 인권운동 펼치기도
“빌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가 그를 수십 년간 감옥에 가둔 백인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한번 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 힐러리 클린턴 <살아있는 역사> 중에서 –
고향에서 치른 장례식, 전 세계 추모 물결
지난 15일(현지시각). 故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장례식이 그의 고향, 쿠누에서 국장으로 진행 됐다. 임시로 설치된 타원형 모양의 초대형 천막에는 4500명의 하객이 참석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과 만델라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ㆍ전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데스먼드 투투 주교, 자카야 키크웨테 탄자니아 대통령 등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을 비롯해 찰스 영국 왕세자, 토크쇼 여왕 오프라 윈프리 등 유명인사들이 참석했다. 기독교와 코사족 전통의 혼합된 형태로 치러진 장례식은 남아공과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지난 11~13일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만델라의 유해는 14일, 2대의 전투기 엄호를 받으며 비행기로 쿠누에 옮겨졌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올라프 픽세 트베이트 총무는 지난 9일,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가족들에게 WCC의 345개 회원교회와 5억 5000만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해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WCC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오랜 시간 인종분리정책 철폐를 위해 협력했으며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 철폐를 위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투쟁을 다각도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넬슨 만델라는 1990년 출소 직후 이에 대한 감사로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를 방문해 총회에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기쁨에 겨워 무대에 올라 춤을 추기도 했다.
인권운동의 별이 지다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이 지난 6일, “만델라가 지금 영면했다”며 “조국은 위대한 아들을 잃었고 국민은 아버지를 잃었다”고 밝힌 후 남아공 전역은 슬픔에 잠겼다. 나이트 클럽에서조차 시끄러운 음악 대신 나직이 깔리는 음악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는 정의를 위한 거인이었다”고 생전의 고인을 회상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성명을 통해 “넬슨 만델라의 업적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을 상상할 수도 없다”며 “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혔다. 데이비드 카메룬 영국 총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위대한 빛이 떠났다. 만델라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다”고 적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주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전에 “중국 정부와 국민들을 대표해 만델라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족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애도했다.
故 만델라 전 대통령은 폐렴 재발로 최근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를 찾지 말아달라”며 은퇴를 선언한 이후 고향에서 요양생활을 하며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은퇴 기간에도, 장례 후에도 국민의식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싸우다 무려 27년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 그는
출소 후 흑인과 백인 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다.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전 세계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지도자인 그는 1999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세계 평화에 힘써 왔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변호사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웨슬리언 교회로 알려진 감리교회에 다녔고 이곳에서 ‘넬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실 이 이름에는 그의 전 생애를 대변하듯, 인종차별의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이름보다 영국식의 이름이 우월하다고 여겼고 그의 선생님도 만델라에게 영국식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이후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에 진학 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흑인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옳지 않은 일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는 그의 성격은 일찌감치 여러 행적에서 눈에 띈다. 대학에서 학생대표위원회로 활동하다 그만두려 하자, 퇴학을 시키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당시의 전통을 무시하고 집안에서 정해준 여인과 결혼하게 되자 집을 나와 버렸다. 복싱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백인에게 모욕당한 친구의 모욕을 갚아주기 위해 법률 공부를 시작해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한다. 1944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산하 청년연맹을 창설했고 1952년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가 되었다.
인권운동에 뛰어들다
당시 남아공 국민의 92%가 흑인이고 백인은 단지 8%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의 권리는 백인들이 독점한 상태였다. 흑인에게는 투표권과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고 토지소유권마저 박탈당했다. 195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 더욱 심해졌다.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세세한 구역까지 정책적으로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1951년, 인권운동에 뛰어들어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다음 해에는 법률상담소를 열어 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을 펼쳤다.
협박도 회유도 통하지 않는 그에게 압력이 들어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을 축출하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1952년,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와 교류가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다행히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석방되었으나 1955년, 흑인 거주지인 요하네스버그 구역에서 남아프리카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헌장’을 선포하면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는 용기란 두려움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용기라는 가면 속에 두려움을 감췄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 넬슨 만델라 –
27년간의 감옥살이
국가반역죄로 감옥에 들어간 그는 1961년, 최종 무죄로 판결 받았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범아프리카회의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데 경찰의 총기 난사로 69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한 것이다. 이를 ‘흑인학살사건’으로 규정한 만델라는 이를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투쟁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1961년 6월 비밀회의에서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고 정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게릴라 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62년, 아프리카를 순회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국민의 창’에 동참해 줄 것을 연설했다. 1962년,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와 집회를 열었다가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4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에스퀴티니섬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했다. 몸 하나 누이기 힘든 좁은 감옥 안에서 그는 간수들의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본인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끊임없는 감시 속에 이주를 요구 당하는 등 괴롭힘 당하고 있었다. 급기야, “아버지가 없는 동안 가족을 지키겠다”던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며 슬픔을 삭여야 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감옥을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언젠가는 자유인으로서 발밑에 풀의 감촉을 다시 느끼고 햇볕 아래 걷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넬슨 만델라 –
시대가 변하면서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는 등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잡아갔다. 결국 여론을 이기지 못한 남아프리카 대통령은 1990년 2월 11일,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대통령 선출
열렬한 군중들의 함성 속에 출소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파국을 막기 위해 드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줄루족 등과 ㄷ협상을 벌여 민주적인 선거를 관철시켰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자신을 감옥에 보낸 백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국가기구를 만들어 흑백 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모든 인간의 깊은 마음 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것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다. 피부 색깔이나 가정 배경과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증오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증오를 배울 수 있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넬슨 만델라 –
* 감리교 뉴스 조진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