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청교도인 감리교인들을 실어 나른 제2의 메이훌라워, 갤릭(Gaelic)호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는 곧 감리교회의 역사라고 해서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 이민자들이 감리교 교인들이었고 한인 이민들을 위해 선교하기 위해 하와이로 오신 미주 한인이민교회 제1의 목회자 홍승하 목사.
인천 내리 감리교회 교인들 120명이 한국 제물포 항을 떠났고 갤릭호(Gaelic)호에서 하와이에 내리자마자 예배를 드리고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1620년 메이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 그들의 숫자와 신앙위주로 이민을 시작한 일이 꼭 같다는 것이 저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천내리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독실한 크리스천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청교도들과 많이 흡사하기에 한인이민을 제 2의 청교도라 하여 무리가 없다는 것이죠
한인 첫 이민자들은 1903년 11월10일 미국내 최초의 한인이민교회인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내리감리교회의 홍승하 전도사를 초대 목회자로 당시 호놀룰루의 상가 거리로 알려진 리버 호텔 거리의 한 주택을 빌려 감격스런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100여명으로 출발한 한국인의 미국 이민은 100년이 지난 현재 공식적으로 115만여명, 비공식적으로 200여만명이 넘는 비약적인 수준으로 증가했죠.
한인 최대 밀집지역인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해 뉴욕 시카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하와이에서부터 알래스카까지 한인들이 없는 지역은 발견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2의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것이 어색하지가 않고 이민교회가 없는 한인교포 사회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상사를 세우고, 중국계 미국인들은 식당을 세우나 한국계 미국인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조금도 어줍지가 않죠
1903년 하와이에서 시작된 한인 이민자들은 교회를 통하여 한인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지금까지 한인교회가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인 건강을 얻으며, 신도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고 상부상조하며, 미국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손쉽게 얻으며,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여러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며 이민 초기교회시절부터 한인들이 교회 중심으로 한글학교운영, 봉사센터운영, 무료 의료 검진, 노인들을 위한 건강 체크, 성경공부, 효도관광 및 경로잔치, 영어공부, 청소년을 위한 상담, 선도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한인 이민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왔습니다.
미주 한인이민교회 제1의 목회자 홍승하는 1863년 경기도 남양군 영흥도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국운의 쇠퇴함을 보고 일본에 건너가 무관학교에 다녔다.
국권수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용동교회(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죠지 존스(Jones, G. H., 趙元時)에게서 1901년 3월 세례를 받은 후 한국 최초의 기독교지도자 양성소인 감리교회의 신학회를(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 다녔다
홍승하는 그의 동생 홍승문과 더불어 축사와 신유의 은사를 통해 영흥과 선감도까지 전도의 불길을 일으켰는데 신학월보 1901년 10월호에는 그의 결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양 속장 홍승하가 전도하여 교회 일을 힘써 보시는 데 일 년 동안 일곱 교회를 일으키시나니 남양읍, 양철이, 포막, 매화동, 용두, 영흥섬, 선감섬이다. 그 외의 여러 섬과 촌은 일일이 셀 수 없으니 일곱 교회는 특별히 큰 교회가 될 여망이 있더라.” 1901년 말 홍승하가 최초의 권사가 되는데 누구도 의의를 달지 않았다.
감신에서 1902년 과정을 마친후 남양교회(南陽敎會)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존스 선교사가 적극 추진한 미국 이민단이 조직되어 하와이로 떠났고, 1903년 8월 죠지 존스 목사가 담임하는 내리교회는 하와이로 간 농업이주민촌에 홍승하를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로써 홍승하는 감리교회의 최초 해외선교사이면서 한국의 최초 해외선교사가 되었다.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죠지 존스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은 미국에 가서 세계를 바라보며 일해야 하고, 특히 교육을 위해서도 이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더니 1902년 12월 22일 첫 이민단 121명 중 절반가량이 내리교회 교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만이라도 존스선교사가 그의 제자인 홍승하를 선교사로 파송한 이유로 충분하다.
홍승하는 이교담, 우병길(후에 윤병구), 안정수, 박윤섭 등과 함께 1903년 8월 7일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받았고, 인천 내리 교회 권사이며 이민 첫배의 통역이었던 안정수와 개성 남부 교회 교인이었다가 인천으로 이사한 우병길이 미국 감리교의 피어슨 감리사와 의논하여 1903년 11월 3일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 선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달 10일에 홍승하전도사의 인도로 20여명이 모여 호노룰루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현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모태가 되고 있었다.
홍승하는 1904년 5월부터 우병길, 이교담, 임형주 등을 여러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 한인을 위로하고 전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등 선교 활동을 펼쳐 1904년 말에는 14개의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총 한인교인 수는 402명에 이르렀다.
1905년에 와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산하 한인 교인 수가 605명으로 하와이 한인 총수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고, 하와이 전체 감리교인 945명 중 64%를 차지했다. 특히 교회는 한인들에게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정착, 취업, 교육 등의 정보교환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니 많은 한인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하였는데 한인교회는 한인공동체뿐만 아니라, 하와이 지역 감리교회 내 여러 행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귀국한 지 3개월 후에 제물포 회의에서 찍은 사진에는 홍승하가 외국을 갔다온 사람답게 8명의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금주와 금연에 앞장섰던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아내를 잃는 슬픔 가운데서도 홍승하는 강화와 인천 지역에서 복음사역에 투신하였고, 특히 남양에 6칸짜리 새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가 1907년 집사목사가 됐을 때 1908년까지 남양구역의 초대 순회목회자와 공주지방 최초 순회목회자로 교회를 섬겼다.
1905년;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하와이를 방문하여 찍은 사진
1912년 장로목사가 된 홍승하는 수원지방 순회목사가 되어 수원종로교회는 류홍준 전도사에게 맡기고 수원지역 중앙의 4구역을 맡아 순회하며 신앙을 지도하였다. 1913년에는 미국 알테라 밥콕스 디터부인이 자기 모친을 위하여 기념예배당을 지으라고 헌금한 미화 150불(300원)과 기존 예배당에서 나온 초가재목을 판 값과 교인들이 헌금한 돈 등 900여 원으로 함석제 40평의 예배당을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터에 건축하였는데 건축 후 교인이 두 배가 되었고, 1914년에는 기와집 40평의 삼일여학교를 건축하였더니 학생이 두 배로 증가했다.
1903년 8월 교포의 지위향상·권익옹호·항일독립운동의 목적으로 윤병구(尹炳求)·문홍식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안정수·우병길 등 교인들과 한인선교회를 창설하여 하와이한인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1905년 정식으로 교회를 세웠다.
그뒤 하와이 각 지역에 교회건립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충남북지역의 순회목사로 활약하였고, 1912년 수원읍교회 담임목사와 수원지역 순회목사로서 전도하였다.
1918년에 55세에 홍승하(洪承河)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