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의 수도가 로마라면 밀라노(Milano)는 금융과 패션의 수도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밀랜’이라고 하지만 이태리어로 밀라노다.
밀라노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역시 밀라노의 상징인 ‘두오모’ 성당과 그 옆에 있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찌에 교회, 그리고 스포르차 성을 꼽을 수 있다.
특별히 이 도시는 ‘패션의 메카’라고 불린다. 1950년대엔 패션을 주름잡던 프랑스에 의해 하청공장에 불과하던 밀라노가 1970년대엔 이 나라의 3대 브랜드를 세계화하는데 성공하면서 조오지 알마니, 버사체, 베네통이 이 도시를 패션의 메카로 만들었다. 또 프라다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장화 모양의 이태리 반도를 반으로 나누면 북쪽은 잘사는 지역, 상공업이 발달된 부촌이라면 나폴리를 비롯한 남쪽은 못사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민 소득격차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 잘 사는 지역의 중심이 바로 밀라노다. 그래서 밀라노 사람들은 로마의 남쪽지역을 ‘아래 사람들’이라며 남쪽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물론 오랜 정치적 변혁을 겪으면서 형성된 지방색일 것이다.
밀라노는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한때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서로마 제국은 395년부터 476년까지 유럽에 존재하던 제국. 광활한 제국의 통치에 힘이 부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하면서 2개의 제국이 생겨났는데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족에 의해 476년 멸망한 반면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하고 있던 동 로마제국은 수명이 훨씬 길어 1453년까지 존재하다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이 밀라노가 기독교 박해 역사의 분수령을 이룬 밀라노 칙령이 탄생한 곳이기에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참회를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회심의 장소가 바로 밀라노이기도 하다.
313년 발표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은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제거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가 되어 있었지만 밀라노 칙령은 한 발 더 나아가 소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에서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칙령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역사상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 길이길이 기억되는 인물이 되고 있다.
동서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발표한 이 칙령으로 기독교는 오랜 박해의 역사를 끝내고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뻗어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전문을 여기 소개한다.
[밀라노 칙령 전문]
전부터 우리(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 서방에서는 이미 기독교도에 대해서도 신앙을 인정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데 필요한 제의를 거행하는 자유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묵인 상태가 실제로 법률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우리의 이런 생각도 실제로는 사문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정제 리키니우스는 제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과제를 의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난 이 기회에 모든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도 각자가 원하는 신을 믿을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 신이 무엇이든, 통치자인 황제와 그 신하인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면 인정해야 마땅하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신하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의 정책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지 령-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결단을 내린 이상, 지금까지 발령된 기독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기독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훼손당하는 일이 많았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특히 몰수당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서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A.D 313년 6월 밀라노에서 로마의 두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공표
밀라노에 가면 당연히 가보는 곳이 두오모 성당이다. 이태리어로 두오모란 성당이란 뜻으로 영어와 독일어의 돔(dome)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도시마다 두오모가 있다. 흔히 우리는 두오모 성당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는 ‘밀라노의 두오모(Duomo of Milano)’라고 말해야 한다. 이번 두 번째 밀라노 방문길에 나는 작심하고 그 유명한 두오모 지붕에 오르기로 했다.
입장권을 사야하지만 엘리베이터로 성당의 꼭대기에 올라 밀라노를 두루 내다볼 수 좋은 기회였다. 이 두오모를 중심으로 밀라노의 길들이 쫙 뻗어있다. 이탈리아 최고의 고딕 건축물로 화려함과 정교함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조명환의 문화기행
이 대성당은 쟝 비스콘티란 건축가에 의해 착공되어 500년이 지난 지난 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의 명령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밀라노는 한때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던 도시임을 기억해야 한다.
두오모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세계 최초의 근대적 쇼핑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아케이드로 알려진 갈레리아다. 세계 쇼핑몰의 원조라고 하는 이 갤러리아 몰 안에는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본점이 있고 이 일대는 두오모와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를 묶는 통로로서 유명 카페나 레스토랑이 즐비한 ‘밀라노의 카페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