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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생애와 업적

_1_~1 (2)마틴 루터는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 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1483년 11월 10일 출생하였다. 루터의 부모는 아이슬레벤(Eisleben:루터의 출생지)의 농부생활에서 맨스필드( Mansfield)의 광부생활로 일하다가 구리 광산업을 경영하고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했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엄격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였고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루터는 마그데부르그(Magdeburg)와 아이젠나하(Eisennach)에서 공부하면서 중세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의 영성과 프랜시스 교단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에르푸르트(Erfurt:1501-1505)대학에서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마쳤으며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이 곳에서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터는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 Stotternheim)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을 맞게되고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나?”라는 영적인 유혹( Anfechtung)문제를 풀기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결과였다.

그는 수도원의 생활을 성공적으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번민하였으며 하루에도 몇번씩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그의 담당사제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니 담당 신부는 “제발 죄를 모아서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그럼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고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수도원의 삶에서 학식과 능력을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1511년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 성서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석 강의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던 중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로마에 가면 계단성당이라는 것이 있는데 믿음이 좋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 황제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갔다고 하는 계단을 로마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 계단을 가운데 두고 성당을 지은 것이 28계단 성당이다. 로마를 찿는 사람들은 이 계단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루터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던 중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생각났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에서 돌아온 그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루터는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즉 대가없는 용서의 복음-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로마서 1장 17절의 성경말씀에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사상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Iustitia dei)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가장 미워했던 로마서 1:17절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되었고 바로 천국의 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루터의 서재가 비텐베르그 대학교 탑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경험을 루터는 ‘탑의 경험’( Tower Experiecne:Turmerlebnis)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구원의 진리를 발견함을 통해서 당시 로마교회를 바라보면서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성경말씀과 너무나 괴리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517년 루터는 갈수록 심해지는 교황청의 악폐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미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를 지지하는 모든 교수들의 선두주자이었으며 명실상부한 대표자가 되어 있었다. 루터가 강의를 시작한 1513년 이후 그는 점차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스콜라주의 신학의 기초가 된 펠라기우스주의, 곧 인간의 선천적 본성인 자유의지의 결단과 노력으로, 선행의 열매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학에 대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거스틴 신학에 입각하여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의지의 노예신세를 강조하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과 신학의 발견은 그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이 다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교 성곽예배당 정문에 계시된 95개조 항의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면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브란텐부르크의 알브레호트에게 마인츠의 대주교 직분과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직을 주었으며 동시에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 관습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의 주교직까지 수행하는 승인서를 주었다. 알브레흐트는 이러한 파격적인 겸직을 교황에게 받아내면서 아우그스브르그의 은행으로부터 거액을 빌려 교황에게 지불하게 되는데 그 대신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의 자기 구역 판매의 절반을 차지하기로 교황청으로부터 허용을 받았던 것이다. 이 판매를 위하여 웅변에 능한 요한 테첼이라고 하는 도미닉 수도가 면죄부의 효력을 지나치게 과장하기 시작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면제부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만큼 선행을 쌓지 못했다면 교황이나 로마 교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선행을 사는 것이다. 그 선행을 사면 내가 천국 가기에 모자란 선행이 더해지기에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 많은 돈을 거두워 들인 것이다. 이것을 안 루터는 분개하게 되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정문 게시판에 95개 조항을 내 걸게 되고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판이 되게 되었다.

사실 이 95개 조항은 라틴어로 씌여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학문적 토론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교황이 이것을 소상히 알게 되면 이 악폐들을 수정할 것이라는 기대감에게 씌여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어지게 되었다.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 다음해인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하게 된다. “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르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그의 영주이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였던 막스밀리안을 곧 죽을 것 같았고 황제선출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로서 스페인의 챨스나 프랑스의 프린시스가 후보로 나서는 것을 상당히 불편히 생각했고 차라리 프리드리히가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즉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총애하느 마틴 루터를 적극적으로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3가지의 저서였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은 독일어로 씌여져 독일전역에 퍼졌다. 이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뜨렸다. 두 달후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에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며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령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운다.

마침내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 손자 챨스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는 1521년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는데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할려고 하면서 결국 루터는 황제와 의회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루터는 그 곳에서 자신의 책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는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받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마틴 루터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 챨스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추방되었고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Wartburg)성으로 보낸다.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서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출발이었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서’에 만 주어질 뿐이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후 종교개혁운동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017년은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었던 날로부터 500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해 세계적인 축제가 계획되고 있다.

(참고도서: 세계 기독교의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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