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향유 옥합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하루 전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보내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마태복음서 기자가 이 곳에 수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 분이 당하는 수난과 죽음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밝힘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딸은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깨어진 옥합이 주는 의미는
1>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의미합니다.
본문과 같은 병행구절인 요한복음에 보면 이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심에 감사해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 예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드렸습니다. (요12:1-8)
신앙생활은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두려워서 믿는 신앙과 감사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두려워서 믿는 신앙생활은 자유함을 주지 못합니다. 믿는 것이 구속 즉 틀이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본문과 같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이 부은 향유 한 옥합의 가치가 당시 노동자 임금의 1년치분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인은 자신이 시집갈 때 쓰려고 조금씩 모아둔 값진 향유를 주님 예수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막14:3-9)
사실상 신앙생활의 승리는 물질생활에서의 승리를 말합니다. 물질과 신앙과의 상관관계는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앞에 아낌없이 드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8절에 보면 이 일을 놓고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26:8)’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Non-Christian들이 우리의 일을 낭비나 허비라고 생각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과 같이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한 말은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마26:9)“ 굉장히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말을 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죽음을 앞에 놓고 이 여인을 칭찬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1-13)”
3> 예수님을 향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주님의 죽으심을 미리 기념했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음으로 자신에게도 향유 냄새가 났고 또한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이 맡은 바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며 섬기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고 이웃에게도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딤전1:12, 고전4:2)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라고 불러 주셨으니 부름받은 자로서 택하심과 소명을 굳게하며 우리들이 가진 가장 값진 옥합, 즉 시간과 정성, 물질과 재능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아낌없이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우리가 섬기는 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와 가정, 일터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헌신이 주님의 나라에 기록될만한 발자취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