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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생애조명

1364940298693513649398673247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선교사 탄생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선교사, 탐험가, 의사요 노예 해방주의자였던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빙스턴의 가정은 2세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 니일은 차(Tea)를 파는 행상으로 일하기도 했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적인 교인들의 열정에 의해서 해외 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나 런던 선교회 등의 선교회들이 설립되고 있었는데, 소년 리빙스턴도 중국 의료 선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독학하여, 글래스고우의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했으나, 아편 전쟁 때문에 중국에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팻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 머무르면서 복음 전도, 원주민 문화의 연구 등을 시작하였다. 1849-1856년, 제1회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 횡단, 1849년 느가미 호의 발견, 1851년 잠베지 강 발견, 1855년 빅토리아 폭포 발견 및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귀국하여 ‘전도 여행기’를 발표하였다.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대사가 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6명의 대원을 이끌고 잠베지 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과 영국간에 말썽이 생겨 영국 정부에서 리빙스턴에게 탐험 중지 명령을 내렸다.

1866년 왕립지리협회의 의뢰를 받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므웨르 호와 뱅웰루 호 등을 발견한 후, 탕가니카 호반 우지지에 도착하였다. 1871년 여기서 열병에 걸려 사경에 빠졌으나 11월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탕가니카 호 북부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듬해 스탠리와 작별하고 탐험을 계속하였다.

그는 1873년 5월 1일 극도의 쇠약과 병으로 뱅웰루 호반에서 사망하였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를 미라로 만들었는데, 현재도 그의 심장은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보존하고 있다. 장례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리빙스턴의 삶과 선교를 기리고 그를 알리기 위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 있는 데이빗 리빙스턴 센터에서는 그의 탄생지와 그가 자란 곳들을 돌아보는 그룹 여행이 진행되고 있다.

여행객들은 리빙스턴이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살던, 침대 두 개가 놓인 단칸방을 둘러보고, 그의 부모와 그가 일하던 방직공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번 그룹 여행에 참여했던 한 참가자는 “그가 어떻게 자랐고, 자라서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지를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당시 그의 선교사역 안에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데이빗 리빙스턴 센터의 재산 담당관 커런 커루써는 “리빙스턴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젊은이로서 그는 세상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신앙심을 조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리빙스턴은 중국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서의 의료 선교가 과학에 대한 자신의 흥미와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결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또 “그는 또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서의 노예매매를 금지 시킨 인물이자 위대한 박애주의자로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당대에도 리빙스턴은 찰스 디킨슨 같은 유명인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리빙스턴은 또 말라리아 치료방법을 개발했는데, 그 치료법은 후에 리빙스턴의 각성제(Livingstone’s Rousers)라는 약품으로 제작, 판매되기도 했다. 또 ‘아프리카 남부의 전도여행기와 조사(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라는 책은 지난 수년 동안 열대 열병 조사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가 쓴 전도 여행기를 당시 신문들은 앞 다투어 게재했었다고 런던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조애나 루이스 박사는 말했다.

한편 리빙스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도 만만치 않다.

리빙스턴은 가족과 정치인들, 다른 선교사들과 과학자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내고 일기와 여행일지를 남겼는데, 랭카스타 대학의 존 맥켄지 석좌교수는 “사람들은 리빙스턴의 글에서 그가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선교사역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생각, 즉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선교사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인 잠베지 강 유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더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할,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리빙스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낮춰 부름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873년 그가 사망한 이후 제국주의자들은 리빙스턴을 그들의 ‘보호성자’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자신이 태어난 말라위를 떠나 40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살고 있는 존 르완다 박사는 “말라위에 대한 데이빗 리빙스턴의 영향력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는 말라위에 기독교를 가져다주었고 말라위를 세계에 소개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에서는 쟁탈전이 벌어졌고 말라위의 경우 수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가 아프리카를 개척해 놓음으로써 강대국들이 보다 쉽게 우리의 땅을 빼앗아간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번 4월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잠비아의 한 마을에 아프리카와 전 세계 학자, 예술가들, 탐험가 등이 모여 리빙스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의 전설을 기린다.

‘제국주의적 강박관념-데이빗 리빙스턴, 아프리카 그리고 세계사: 생애와 전설의 재고(Imperial Obsessions-David Livingstone, Africa and world history: a life and legacy reconsidered)’라는 이름의 이번 컨퍼런스의 강사는 브라이언 스탠리, 저스틴 리빙스턴, 조애나 루이스, 줄리 데이비드슨 등이며, 대학원생들을 위한 웍샵도 열릴 예정이다.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이번 컨퍼런스 등의 행사를 통해서 리빙스턴에 대한 또 한 번의 재평가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크리스천 위클리, 조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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